(1820-1870) 오페라 로만티카: 벨리니, 도니제티, 그리고 벨칸토
[역사의 팁: 그때 그 당시]
1800년경: 이탈리아에서 벨칸토 오페라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다.
1825: 이탈리아의 테너 조반니 루비니(Giovanni Rubini)가 파리에서 공연하여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러시아의 생페테르부르그는 그에게 한 시즌당 오늘날의 약 4만불을 지불하였다. 벨리니는 그를 위해 3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1832: 도니제티의 L'Elisir d'Amor(사랑의 묘약)이 밀라노 라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목가풍의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Opera Romantica: Pastoralism: 전원주의)의 전형이었다.
1835: 도니제티의 Lucia di Lammermoor(람메무어의 루치아)가 나폴리에서 광란의 장면과 함께 광란과 같은 갈채를 받았다.
1843: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아델리나 패티(Adelina Patti)가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훗날 패티는 당대에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소프라노가 되었고 계약서에 따르면 어떠한 리허설에도 참가하지 않아도 좋다고 되어 있다.
1848: 이탈리아 오페라 로만티카를 완성한 게타노 도니제티가 세상을 떠났다.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 로시니
로시니의 포맷은 다른 작곡가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러면서 이탈리아 오페라는 한편으로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이미 수립되어 있는 낭만주의 형식을 따랐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의 낭만주의는 벨리니에 의하여 개척되었고 도니제티에 의하여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원래 이런 오페라에서는 주인공 테너의 영웅적 존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조국을 위기에서 구하고 사랑에 목숨을 거는 남성 테너의 모습은 영웅 그 자체였다. 바쏘 프로폰도(Basso Profondo)의 역할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보다 드라마틱하고 보다 흥미를 더해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여성 소프라노의 중요성이 급격히 부각되기 시작했다. 관객들을 소프라노에 집중케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필요한가? 청순가련형으로 만들어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면 되었다. 눈물 없이는 볼수 없는 청순가련의 소프라노는 뜨거운 박수갈채와 눈물 젖은 손수건의 목표였다. 그런 주인공이 등장하는 오페라는 당연히 비극으로 끝나기가 십상이었다. 비극도 아닌데 손수건을 꺼낼 필요는 없지 않은가? Norma(벨리니), Lucia di Lammermoor(도니제티)는 대표적이었다. 한편 도니제티는 L'Elisir d'Amor(사랑의 묘약)에서 새로운 형태인 전원주의(田園主義: Pastoralism)를 창조했다. 사랑스럽고 인정미가 넘치는 인생을 표현하는 장르이다.
도니제티의 '사랑의 묘약'(아디나 역은 소프라노 안나 네트레브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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