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의 개혁자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리터 폰 글룩(Christoph Willibald Ritter von Gluck: 1714-1787)은 독일 오페라의 창시자라는 찬사를 받고 있지만 실은 근대 오페라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인물이다. 오페라의 역사에서 글룩은 위대한 개혁자라고 불리고 있다. 그는 과거의 단순한 오페라 형태를 벗어나서 오페라를 이상적인 음악극(Music drama)으로 발전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글룩은 독일(당시는 보헤미아)에서 태어났으나 30대 말에 비엔나로 옮겨 와서 세상 떠날 때까지 30년 이상을 살았다. 글룩의 아버지는 현재의 독일과 체코 국경에 가까운 마을인 에라스바흐(Erasbach)에서 삼림관을 지냈다. 그래서 글룩에게 있어서 체코어는 모국어나 마찬가지였다. 글룩은 14세의 청소년으로서 프라하로 가서 음악 공부를 시작했으며 이와 함께 그 때에 이미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다. 이어 음악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비엔나에 갔다가 내친김에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는 당대의 작곡가들로부터 작곡기법을 배웠다. 밀라노에 있을 때인 1741년 첫 오페라 Artaxerxes(아르타세르세스)를 밀라노 두칼레(Ducale)극장에서 초연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남아있지 않다. 비엔나에 있을 때 친구들이 그를 놀리느라고 가운데 이름인 빌리발트를 비너발트(Wienerwald: 비엔나 숲)라고 불렀던 것도 나중에 비엔나에서 일생을 마치게된 인연의 시작이 아닌가 싶다.
1745년부터 1752년까지 글룩은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였다. 런던에서는 헤이마켓(Haymarket)극장의 재개관을 기념하여 La caduta dei giganti라는 파스타치오(pastaccio)를 작곡하였다. 하지만 완벽한 오페라는 아니었다. 글룩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비엔나, 함부르크, 코펜하겐, 파리, 프라하 순회공연을 위해 여러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리고 1752년부터 비엔나에 정착했다.
글룩은 순수파였으며 개혁주의자였다. 물론 초창기 글룩의 오페라는 과거 이탈리아 오페라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글룩은 ‘무릇 오페라라면 전달코자 하는 메시지가 단순해야 청중에게 효과적으로 다가 갈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온갖 치장의 맨너리즘을 싫어하였다. 맨너리즘(Mannerism)이란 문학․예술의 표현 수단이 틀에 박혀 진부한 느낌을 주는 것을 말한다. 글룩은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하여 ‘좋은 작품들이다. 하지만 고통이 수반하지 않았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그의 개혁적인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글룩의 이같은 생각을 담은 오페라를 개혁 오페라(Reform Opera)라고 부른다. 1762년 작곡한 ‘오르페오와 유리디체’는 첫 개혁 오페라였다. 글룩은 자신의 새로운 이상을 프랑스 오페라에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1774년 발표한 Iphigénie en Aulide(얼리드의 이피게니)는 지나친 무대 장치, 과대한 연기를 지양하고 순수하게 음악과 스토리를 전달하려는 작품이었다. 공연은 성공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글룩과 이탈리아 음악과의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기도 했다. 이탈리아 측 대표는 피치니(Piccini)였다. 몇 년후 발표한 Iphigenie in Tauride(터리드의 이피게니)는 오페라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성공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 발표한 Echo et Narcisse(에코와 나르시스)는 대실패였다. 글룩은 이제 자기의 시대가 지나간 것을 느꼈다. 개혁오페라에 대하여 조금 더 부연하자면, 18세기 유럽을 풍미하던 오페라 장르는 opera seria(오페라 세리아)였다. 헨델의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당시의 오페라는 주인공인 프리마 돈나 또는 카스트라티가 오페라의 성공여부를 좌지우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곡가들은 이들 프리마 돈나 또는 카스트라티의 입맛에 맞는 아리아를 작곡해야 했으며 만일 이들이 이런 부분은 이렇게 고쳐 달라고 하면 그대로 해주어야 했다. 그래야 작곡가로서 이름을 유지할수 있었으며 먹고 살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글룩은 달랐다. 프리마 돈나 또는 카스트라티를 위해 작곡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 자체를 위해 작곡을 한 것이다. 이 점이 개혁적인 것이다.
'오르페오와 유리디체'
글룩의 대표작 Orfeo ed Euridice(오르페오와 유리디체)를 장 자크 루쏘가 보았다면 사상의 동지를 찾았다고 생각해서 빙그레 웃었을 것이다. ‘오르페오...’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를 적극 권장한 오페라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주인공 오르페오 역을 카스트라토가 맡는 것으로 작곡했다. 하지만 나중에 테너로 바꾸었다. 제목도 프랑스식으로 Orphée로 바꾸었다. 저승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데려 오는 감동적인 장면에 여자 목소리를 내는 남성 카스트라토를 쓴다는 것은 어색하다고 생각해서 오리지널 남성테너를 기용했던 것이다. 훨씬 실감이 있었다. 이같은 작곡에 대한 실질성, 즉 쓸모없는 멋을 잔뜩 부리는 데에만 치중하지 않고 현실감 있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믿음은 훗날 모차르트와 베버에게도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터리드의 이피게니'(마리아 칼라스)
Iphigénie en Tauride(터리드의 이피게니)에 대하여는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 주인공 오레스테스가 ‘내 마음은 평온을 되찾았네!’(My heart becomes calm again!)라는 아리아를 부르는 장면의 연습이 있었다. 아리아의 내용으로 보면 아주 평온한 곡이어야 한다. 그런데 오케스트라 반주는 거칠고 고조되어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반주를 멈추고 글룩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글룩은 ‘상관없어! 오레스테스가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기 때문에 과격한 음악이 나와도 괜찮아! 나중에 자기 어머니까지 죽이는 녀석이란 말야! 걱정 말고 어서 계속해요!’ 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터리드의 이피게니’에 대하여는 좀처럼 남의 작품을 칭찬하지 않던 베를리오즈도 ‘불멸의 위대한 작품’이라고 찬사를 보냈을 정도로 대단한 작품이다. 지금부터 거의 3백년전의 작품이지만 보컬, 오케스트라에 있어서 완전무결한 형식과 표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오페라에 대하여는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글룩이 한창 활동할 때에 선의의 의미에서 라이벌이 있었다. 바로 저 유명한 니콜로 피치니(Nicoló Piccini)였다. 물론 이름이 그렇다고 해서 성격이 잘 삐치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아무튼 글룩의 팬클럽과 피치니의 팬클럽은 두 사람의 작품을 놓고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른바 Querreles des Bouffons(부퐁논쟁)였다. 그 내용에 대하여는 자세히 설명할 여유가 없어서 생략하겠거니와 다만 결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그 논쟁이 있은후 이탈리아는 물론, 영국, 프랑스에서도 음악계가 Gluckists(글루주의자)와 Piccinists(피치니주의자)로 갈라져 서로의 발전을 위해 괴상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퐁논쟁'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오페라 발전 연혁을 보시기 바람.)
글룩의 대표작인 Orfeo ed Euridice(오르페와 유리디체)는 그리스신화에서 내용을 따온 것이다. 아마 역사상 오페라 작품중 ‘로미오와 줄리엣’을 제외하고서 오페라로 만들어진 작품은 ‘오르페오’가 가장 많을 것이다. 하프를 기가 막히게 잘 타고 노래도 세상에서 가장 잘 부르는 오르페오(아마 음악을 사랑하는 작곡가를 의미한것 같음)가 사랑하는 아내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저승에 찾아가서 노래를 기가 막히게 불러서 아내를 찾아오는데 이 세상으로 나오는 도중 아내가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그만 돌로 변했다는 신화가 줄거리이다. 이같은 플롯(줄거리)은 나중에 푸치니가 토스카를 통해 ‘노래에 살아야 하는가? 사랑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문제의식을 던져 놓은 것과 일맥상통이다.
글룩의 오페라 수첩
[오페라 세리아] ● Artaxerxes(Artaserse: 1741) ● Demofoonte(Deemofoon: 1742) ● Il Re Poro(포로스왕: 1743) ● Impermestra(하이퍼메스트라: 1744) ● Ezio(에지오: 1750) ● La Clemenza Di Tito(티토의 자비: 1752) ● Le Chinoises(중국아가씨: 1756)
● 오페라 코미크(OCs) ● Le Chinois(중국인: 1756) ● L'ile de Merlin 또는 Le monde renverse(멀린의 섬 또는 거꾸로 된 세상: 1758) ● L'ivronge corrige(술주정꾼의 개혁: 1760) ● Le cadi dupe(속은 카디: 1761) ● La rencontre imprevue(예상치 않은 만남 또는 메카 순례자: 1761)
[개혁 오페라 (Reform opera)] ● Orfeo ed Euridice(오르페오와 유리디체: 1762) 및 Orphee et Eurydice(비극적 오페라: 1774) ● Alceste(알체스테: 1776) ● Paride ed Elena(파리스왕자와 트로이의 헬렌: 1770) ● Iphigénie en Aulide(얼리드의 이피게니: 1774) ● Armida (아르미다: 1777) ● Iphigénie en Tauride(터리드의 이피게니: 1779) ● Echo et Narcisse(에코와 나르시스: 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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