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도덕성과 윤리성 강조
파울 데싸우
파울 데싸우(Paul Dessau: 1894-1979)의 작품은 전후 독일에서 도덕성과 윤리성을 강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현대음악의 기법과 전통적인 구조를 연합하였다. 아버지가 함부르크 유태교 회당의 캔터(Cantor: 성가의 주창자)였던 데싸우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음악수업을 받았다. 어린 파울은 바이올린에 놀라운 재능을 보여주었다. 이미 11세 때에 연주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본격적인 음악 공부는 베를린의 클린트보르트-샤르벤카(Klindworth-Scharwenka)음악원에서였다. 이후 그는 음악감독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25년부터 1933년까지 약10년 동안은 베를린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아했다. 그러다가 나치가 득세를 하자 유태인에 대한 핍박을 피하여 파리로 이민을 갔다. 이곳에서 파울은 르네 라이보비츠(Rene Leibowitz)와 교분을 쌓게 되어 많은 자문을 받았고 이후 12음기법에 시각을 돌리게 되었다. 파리가 나치의 수중에 들어가자 그는 천신만고 끝에 미국으로 이민 갈수 있었다. 처음에는 뉴욕에서 지냈으나 후에는 할리우드에서 영화음악에 관계하며 비교적 여유 있게 지냈다.
전쟁이 끝나자 데싸우는 미국에 남지 않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베를린에서 그는 베르톨트 브레헤트(Bertolt Brecht)와 합동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브레헤트는 뛰어난 대본가 겸 작사자로서 쿠르트 봐일(Kurt Weil), 한스 아이슬러(Hans Eisler)등의 작품을 위해서도 대본을 제공한 사람이다. 베를린에서의 생활이 비교적 넉넉했던 데싸우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인 부인 루트 베르크하우스(Ruth Berghaus)와 함께 자기의 집을 예술가들의 모임장소로 제공하여 전후 동독의 예술을 주도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파울과 루트의 응접실에 자주 모였던 예술가로서는 작가 하이너 뮐러(Heiner Muller)와 칼 미켈(Karl Mickel), 작곡가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와 루이지 노노(Luigi Nono) 등이 있었다. 데싸우는 전후 동독에서 가장 뛰어난 작곡가였으며 많은 젊은 음악도들의 파울을 모델로 하여 작품을 개발하였다. 그가 동독에 머무르게 된 것은 아마 나치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다. 이밖에 여러 편의 성악곡, 관현악곡, 실내악을 남겼다. 그는 1979년 베를린 근교의 쾨니히스부르스터하우젠(왕의 소시지집)이라는 마을에서 세상을 떠났다.
'루쿨루스의 심판'
데싸우의 오페라 수첩
● Der Verurteiling des Lukullus(루쿨루스 판결. 1951 베를린) ● Puntila(푼틸라. 1966 베를린) ● Lanzelot(렌슬롯. 1969 베를린) ● Einstein(아인슈타인. 1974 베를린) ● Leonce unde Lena(레온체와 레나. 1979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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