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러시아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정준극 2008. 3. 18. 09:57

보리스 고두노프의 수호자

모데스트 무소르그시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작곡가중에서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oussorgsky: 1839-1881)만큼 힘들고 거친 생활을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는 거의 평생을 알콜 중독에 시달려야 했으며 간질까지 겹쳐서 끝내는 걸인처럼 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역사와 함께 찬란한 빛을 더해가고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원래 부유한 지주집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어머니로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어릴 때부터 놀라운 재능을 보여 이미 9살 때에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였다. 시골의 농원에서 어머니의 따듯한 사랑을 받으며 유년 시절을 보낸 그는 13세 때에 아버지의 권유로 생페테르부르그에 있는 제정 러시아 소년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사관생도의 생활을 하면서도 음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예를 들면 17세 때에 오페라 작곡에 도전했던 일이다. 하지만 화성법이나 작곡법을 배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사관학교 시절의 무소르그스키


청년 무소르그스키는 18세 되던 해에 당대의 작곡가 다르고미츠스키와 쿠이를 만나게 되었고 이어 발라키레프(Balakirev)와 스타소프(Stasov)를 만났다. 이로부터 무소르그스키는 작곡가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음악에 대한 열정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발라키에프에게 간청하여 작곡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얼마후 무소르그스키는 가곡과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하는 실력을 보여 주었다.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놀라움과 함께 높이 평가했다. 바야흐로 무소르그스키의 음악인생이 화려하게 개화될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불행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19세 되던 해부터 그는 정신질환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군복무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861년에는 저 유명한 러시아농노해방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지주였던 무소르그스키의 집안은 극심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시골로 돌아가 피폐된 농장과 씨름을 해야 했다. 교향곡을 작곡하겠다고 큰소리를 친 무소르그스키가 몇 년동안 아무런 작품도 내놓지 않자 주위 사람들은 조롱하였지만 동료 겸 스승인 발라키레프와 스타소프는 무소르그스키가 언젠가는 놀라운 작품을 내놓을 것으로 믿고 위로하였다.


'결혼'


무소르그스키는 시골에서 농장 일에만 매달려 시간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첫 오페라인 Salammbo(살람보)의 작곡에 착수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이 오페라를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얼마 남지 않은 농장을 정리하고 생페테르부르그로 돌아와 정부의 통신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콜 중독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음악을 성취하지 못했다는 좌절감을 술과 함께 씻고자 했다. 마침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도 큰 충격이었다. 결국 공무원을 그만 두었다. 잠시 요양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그 기간에 저 유명한 Night on the Bold Mountain(민둥산의 하룻밤)을 완성했다. 요양을 마치고 생페테르부르그로 돌아온 무소르그스키는 다른 5인조 멤버들과 함께 다르고미츠스키의 실험적 오페라인 자연주의(Naturalism)에 관심을 기울였다.


 '코반스키나'



30세 되던 해에 다시 정부공무원으로 복귀한 그는 비교적 안정적인 상태에서 Boris Godunov(보리스 고두노프)의 작곡에 착수하여 초본을 완성했다. 당시에는 누구든지 오페라를 작곡하면 공연 전에 정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고 문제가 있으면 몇 번이나 고쳐 써야 했다. 그래서 우선 완성하는 것이 초본이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1874년 생페테르부르그에서 초연될수 있었다. 이어 그는 또 하나의 야심작인 Khovanshchina(코반치나)의 작곡에 들어갔다. 그 즈음에 그는 공무원으로서 승진하기 까지 했다. 하지만 코반치나도 그의 고약한 술버릇 때문에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 시기에 그는 저 유명한 Pictures at an Exhibition(전람회의 그림)을 완성했다. 친구 빅토르 하르트만(Victor Hartmann)의 전시회에 감명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1881년, 40대 초반의 무소르그스키는 알콜 중독증이 간질로 확대되어 거리에 나가 구걸을 할 정도의 딱한 형편에 놓이게 되었다. 그를 도와준 사람은 콘트랄토 레오노바(Loenova)였다. 이 부인과 친구들의 배려로 그는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한달후 세상을 떠났다. 42세였다. 무소르그스키의 상당수 작품은 미완성이었다. 주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마지막 손질을 하여 빛을 보게 되었다. 특히 ‘보리스 고두노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거의 전면 보수를 했다. 새로운 음악을 추가하기도 했고 장면을 바꾸기도 했다.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가적 오페라로 칭송받고 있다. 무엇이 ‘보리스 고두노프’를 특별하게 만든 것일까? 대답은 간단하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 방식을 창문 밖으로 과감하게 던져 버리고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이 오페라에서는 듣기 좋고 세련된 아리아가 나오지 않는다. 대신 거칠고 탁 터진 듯한 스타일의 아리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흠뻑 받게 된 것 같다. 무대 장치도 전통적인 드라마틱한 것이 아니다. 대신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 각각의 독립적인 장치들이 무대를 형성하고 있을 뿐이다.


 '보리스 고두노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수첩

● Salammbo(1863-66. 밀라노에서 1980년) ● Die Heirat(결혼: 1868) ● Boris Gonunov(보리스 고두노프: 1874 생페테르부르그) ●Khovanstschina(호반시치나: Kovanshchina: The Khovansky Rising: 코반스키의 봉기).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1872-80. 생페테르부르그에서 1886년) ● Der Jahrmarkt von Sorotschinzy(1874-80. 생페테르부르그에서 19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