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을 표현한 쇤브룬 궁전의 글로리에타
비엔나의 연혁은 크게 다섯 시기로 나눌수 있다. 첫째 시기는 대략 BC 4세기에 이곳에 사람들이 정착하여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AD 10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민족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할거하던 1천4백여년의 기간이다. 두번째 시기는 바벤버그(Babenberg) 왕조가 오스트리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시기로서 비엔나가 바벤버그의 수도로서 면모를 갖춘 시기이다. 바벤버그 왕조에서 야소미어고트라는 별명의 하인리히 2세의 치적은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세번째 시기는 합스부르크 시기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합스부르크의 루돌프1세가 1278년 오스트리아에 대한 합스부르크의 통치권을 확보한 이후부터 1804년 나폴레옹 때문에 공국에 불과했던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였으며 이어 신성로마제국이 막을 내린 기간까지이다. 네번째 시기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시기이다. 1804년부터 1차대전이 끝난 해인 1918년, 오스트리아 제국(나중에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깃발이 내려진 때까지이다. 마지막 시기는 1918년 이후의 공화국 시기에 이어 나치와 합병되었다가 2차 대전이 끝나자 강대국의 신탁통치를 받았고 그후 중립국으로 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시기이다.
호프부르크 궁전의 미하엘러쿠폴라(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화를 보여주고 있다.
I. 초기: BC 4세기-AD 10세기 경
- BC 4세기경 켈트(Celt)족이 현재의 비엔나 1구 호에르 마르크트(Hoher Markt) 일대에 몰려와서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물론 비엔나 1구의 사방이 숲으로 덮혀 있는 지역이었다.
- BC 15년경 알프스 일대와 다뉴브 지역을 정복한 로마제국이 다뉴브 강을 따라 여러 곳에 수비대를 설치하고 파노니아(Pannonia)지방을 로마제국의 서북쪽 경계로 삼았다. 파노니아는 현재의 비엔나 동쪽,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중간 지역이다. 로마수비대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부대는 비엔나에서 동쪽으로 멀지 않은 카르눈툼(Carnuntum) 요새에 주둔하였다. 카르눈툼은 파노니아의 중심지였다. 당시 비엔나는 빈도보나(Vindobona)라고 불렀다. '살기 좋은 마을'이란 뜻이다. 어떤 학자들은 '아름다운 땅'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고 또 다른 학자들은 '숲에 있는 냇물'이라는 뜻이라고 보았다. 로마는 빈도보나에도 약 6천명의 군대를 주둔시켜 일대의 주민들을 보호하고 국경을 방어토록 했다. 나중에는 로미군이 카르눈툼 보다는 주로 빈도보나에 주둔했다. 심지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황제도 카르눈툼에서 지낸 일이 있었다. 얼마후 군인들만 있던 빈도보나에 일반 사람들도 이주하여 살기 시작하여 빈도보나의 주민은 약2만명이나 되었다. 오늘날 1구 호에르 마르크트 일대와 미하엘러플라츠, 슈베덴플라츠, 슈테판스플라츠, 유덴플라츠 일대가 로마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 AD 4세기경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으로 현재의 비엔나 일대는 이들의 통과지대가 되어 어수선하였다. 그러는 와중에 비스고트(Visgoths)족이 빈도보나를 공략하여 파괴하였다. 로마제국은 빈도보나를 빼앗겼다. 433년 로마제국은 아틸라(Atilla)가 이끄는 훈족의 침공으로 파노니아 전지역을 빼앗기고 물러나야 했다. 아틸라는 북부 이탈리아까지 점령하고 세력을 과시하였다.
- 955년 독일왕 오토(Otto: 오토대제)1세가 다뉴브 지역의 레흐펠트(Lechfeld)에서 마쟈르족과 훈족을 동쪽으로 몰아내고 빈도보나를 회복하였다.
서기 955년 헝가리의 마쟈르군대가 서유럽을 침공하자 독일나라들의 왕인 오토대제가 아우구스부르크 남쪽 레흐펠트 평야에서 마쟈르군대를 격퇴하였다. 이는 헝가리의 서진을 저지한 중요한 사건이었다.
II. 바벤버그 시기(976-1246)
- 976년 빈도보나를 비롯한 다뉴브 일대를 장악한 독일의 오토대제는 이 지역을 바벤버그 가문이 통치하도록 위임하였다. 오토대제는 이 지역을 동부접경지역(Ostermark: Eastern mark)라고 불렀다. 이 지역의 통치자는 마르크그라프(Markgraf)라고 불렀다. 굳이 번역하면 태수 또는 지방총독이다.
- 1155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2세 (일명 Jasomirgott)는 오스터마르크를 통치하는 바벤버그의 본거지를 비엔나로 삼았다. 당시 비엔나는 다뉴브와 알프스를 연결하는 무역의 요충지였다. 이 무역로를 베른슈타인슈트라쎄(Bernsteinstrasse)라고 불렀다. 하인리히2세는 빈도보나 도시를 확충하고 성슈테판성당을 비롯하여 여러 교회를 건설했다. 바벤버그 왕조의 궁전도 그때 세웠으니 오늘날 암 호프(Am Hof)의 궁전이다.
- 12-13세기의 제2차 십자군 전쟁 때 바벤버그 왕조의 레오폴드5세 대공이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를 인질로 잡아서 뒤른슈타인 성에 감금하였다. 레오폴드5세는 막대한 액수의 몸값을 받고 사자왕 리챠드를 석방하였으며 받은 돈으로 비엔나를 확장하였고 요새를 증축하였다. 비너노이슈타트의 건설도 이 때에 시작되었다.
- 1221년 비엔나는 도시로서의 권한을 갖게 되었고 다른 지역(외국)과의 무역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 1246년 바벤버거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프레데릭2세가 서거하여 오스트마르크에 대한 바벤버그 왕조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프라이융에 있는 아일랜드수도원과 교회. 바벤버그의 하인리히 2세가 세운 수도원과 교회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분수는 오스트리아 분수. 오스트리아의 4대강을 상징한 분수이다. 페르디난트 황제가 30년전쟁 중에 하나님이 비엔나를 포위한 스웨덴 군대를 물리쳐 준 것을 감사하여 건립한 것이다.
III. 합스부르크 시기(오스트리아 제국 이전 시기): 1278-1804
- 1278년 , 5년전인 1273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1세는 여러 제후들과의 투쟁끝에 현재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보하였다.
- 1358-65년 '설립자'(Founder)라는 별명의 루돌프4세가 비엔나에 고틱건물인 새로운 성슈테판성당의 건설을 착수했으며 이와 함께 비엔나대학교를 설립했다.
- 1421년 이른바 '비엔나 게세라'(Geserah) 사건이 일어났다. 비엔나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거의 모두 추방당했으며 약 2백명 이상의 유태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 1493-1519년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1세는 교묘한 외교정책과 결혼정책으로 네덜란드, 부르군디(Burgundy), 스페인까지 통치력을 행사하였다. 막시밀리안1세는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이로서 변방의 요새도시에 불과했던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 1529년 오토만 터키가 비엔나를 공성하여 거의 함락될 뻔 했으나 터키군은 겨울이 일찍 다가오는 바람에 철수하였다. 비엔나는 성벽과 망루등 요새를 강화하였다.
- 1551년 마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여파로 비엔나에 개신교가 물밀듯이 들어와 전체 시민의 4분의 3정도가 개신교를 믿을 정도였다. 이에 위기를 느낀 로마 가톨릭의 합스부르크는 바티칸의 후원을 받고 있는 예수회를 불러와서 반종교개혁운동을 펼치도록 했다. 예수회교회등은 이 때에 설립된 것이다. 골수 가톨릭인 루돌프2세 때에는 비엔나의 개신교도들이 체계적으로 박해를 받고 추방 당했다.
루돌프2세(1552-1612). 개신교의 박해에 앞장섰다.
- 1618-48년 비엔나는 신구교간의 갈등인 '30년 전쟁'이 일어났고 비엔나도 그 여파로 극심한 경제 공황을 경험해야 했다. 비엔나는 개신교인 스웨덴 군의 포위로 위기에 처해 있었으나 어느날 스웨덴 군은 거짓말처럼 돌연히 철수하여 위기에서 벗어났다.
- 1679년 페스트(흑사병)가 엄습하여 비엔나의 시민중 무려 7만5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 1683년 오토만 터키군이 다시 비엔나에 당도하였다. 오토만 터키군은 25만의 대군이었으며 비엔나를 수비하는 병력은 고작 1만8천이었다. 바야흐로 비엔나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에 폴란드의 얀 조비에스키 왕이 이끄는 폴란드 병사와 신성로마제국의 구원병력이 달려와 오토만 터키군을 극적으로 몰아냈다. 또한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가 터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비엔나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고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비엔나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바로크 건물들이 들어섰으며 각처로부터 저명한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찾아 오기 시작했다. 비엔나의 르네상스 시기였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을 도나우강 건너편 지금의 레오폴드슈타트로 몰아서 살게 했던 레오폴드1세. 2구 레오폴드슈타트는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명이다.
- 1698년 당시에는 현재의 1구(인네레 슈타트)만이 사실상의 비엔나였다. 그러다가 레오폴드 황제 때에 당시 교외였던 현재의 제2구(레오폴드슈타트)로부터 제4구(뷔덴), 그리고 제20구(브리기테나우)가 비엔나로 편입되어 비엔나는 명실 공히 대도시로 변모하였다. 1704년에는 현재의 링슈트라쎄(Ring Strasse)가 모습을 들어내 보였다. 현재의 링슈트라쎄에는 당시에 비엔나를 둘러쌌던 성벽과 보루들이 있었다.
- 1703-1711 레오폴드1세 시절에 헝가리왕국의 귀족들이 합스부르크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8년에 걸쳐 전쟁이 있었다. 이를 라코치 독립전쟁(Rakoczi's War for Independence)이라고 부른다. 라코치는 반란군 지도자의 이름이다. 이들 헝가리 반란군은 스스로를 쿠루츠(Kuruc)라고 불렀다. '십자군'이라는 의미이다. 레오폴드1세는 헝가리 쿠루츠의 침공을 막기 위해 비엔나성 외곽에 새로 성벽을 쌓고 요새를 건축했다. 요새들은 오늘날 외곽 귀어르텔이 있는 자리에 건축되었다.
- 174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실질적인 제국의 군주로 올라섰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들 요셉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함께 비엔나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작업을 착수하였으며 문화, 교육, 국방, 과학의 여러분야에서 혁신적인 개혁을 이룩하였다.
- 178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세상을 떠남으로 요셉2세가 제국을 단독 통치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는 요셉2세는 여러가지 개혁정책을 내놓았다. 예를 들면 막강한 권력과 재산을 보유하고 있던 수도원의 통폐합이었다. 그중 일부는 비엔나 시민들의 반대로 추진이 무산되었다. 모차르트는 요젭2세 시대에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 1792년 프란츠2세(프란시스2세)는 공화제를 열망하는 시민들을 비밀 경찰을 이용하여 탄압했다. 프란츠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제후들과 동맹을 맺어 프랑스 혁명세력에 대항하는 전쟁을 치루었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이며 오스트리아제국의 첫 황제인 프란츠1세(프란시스 1세) 기념상. 호프부르크
IV.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오스트로-헝가리 제국: 1804-1918
- 1804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츠2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에 오르자 이에 위기감을 느끼고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자신을 프란츠1세 황제로 명명했다. 2년후인 1806년 프란츠2세는 나폴레옹의 압박에 못이겨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은 역사의 막을 내렸다.
- 1814-15년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제국의 수상인 메테르니히가 열국의 군주와 정치지도자들을 불러 이른바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를 개최하였다. 나폴레옹 이후 유럽의 지도를 새롭게 그리기 위해서였다. 메테르니히는 자유주의 또는 국수주의적 사상을 방지하기 위해 싹부터 자르는 정책을 펼쳤다. 오스트리아는 자유주의(공화주의)가 되려는 꿈을 한동안 접어 두어야 했다.
- 1848년 비엔나 3월 혁명. 과격 학생, 노동자, 시민들은 검열 철폐와 정책 결정에의 참여를 요구하여 시위하였으나 제국 군대가 소요를 봉쇄하였다. 그 해에 18세의 프란츠 요셉이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로 등극하였다.
- 1857년 비엔나 중심지대의 성곽과 요새를 이전하고 도심을 중심으로 새로운 링(Ring)을 건설하였다. 링슈트라쎄에는 새로운 시청, 의사당, 미술관, 과학관, 비엔나대학교, 궁정극장, 궁정오페라극장 등 아름답고 장엄한 바로크 건물들이 들어섰다. 비엔나는 근교의 마을까지 통합하여 대도시가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제국내에서 거의 독립적인 자치 행정권을 갖게 되었다.
- 1873년 비엔나 세계 박람회가 열렸다. 이해에 비엔나의 상수도를 슈티리아의 산으로부터 끌어오는 공사가 완료되었다. 그 기념으로 현재의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호흐슈트랄브룬넨 분수를 설치하였다.
- 1895년 비엔나 시장인 칼 루에거(Karl Lueger)박사에 의해 비엔나는 대형 병원, 가스, 전기, 전차를 도입하는 등 새로운 현대식 도시로 발전하였다.
- 1896년 프라터에 자이언트 페리(리젠라트: 대회전관람차)가 설치되었다. 1996년에 리젠라트 100주년 행사가 있었다.
- 1914년 사라예보에서 황제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피살되었다. 이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 1916년, 68년동안 오스트리아 제국을 통치했던 프란츠 요셉 황제가 서거했다. 한 시대의 종말을 고하는 일이었다.
프란츠 요셉 1세 황제. 68년이란 기간동안 제국을 통치하였다.
V. 오스트리아 공화국: 1918-
- 1918년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합스부르크의 칼(Karl)은 추방되었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은 세계의 역사에서 종말을 고하였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는 오스트로-헝가리제국에 비하여 12분의 1로 줄어 들었다. 보헤미아(체코슬로바키아)도 독립하였다.
- 1922년 비엔나는 오스트리아 연방공화국의 1개 주와 같은 성격의 도시가 되었다.
- 1934년 사회민주당과 보수 기독교정부간에 유혈적인 충돌이 있었다. 명분은 오스트리아의 공산화를 방지하는 것이었다. 당시 수상이던 돌푸스(Dolfuss)가 나치주의자들에게 피살되었다.
- 1938년 히틀러는 안슐르쓰(Anschluss: 합병)라는 명분아래 오스트리아를 독일 제3제국에 합병하였다. 히틀러가 헬덴플라츠(Heldenplatz)에서 독일-오스트리아의 합병을 선포하면서 이제 오스트리아가 모국으로 통합되었다고 주장하는 순간에도 나치의 비밀경찰과 친위대는 유태인 사냥에 몰두하였다.
- 1944-45년 제2차 세계대전중 연합군의 포격으로 비엔나의 30%가 파괴되었다.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과 슈테판성당도 크게 손상되었다. 비엔나는 소련 적군(赤軍)에게 점령당했으며 이후 미,영,불,소의 4개국이 분할 관리하였다.
- 1955년 전승국들이 벨베데레 궁전에서 오스트리아 국가조약(Staatsvertrag)에 서명함으로서 오스트리아는 4대국 신탁통치에서 벗어나 중립국이 되었다. 비엔나는 동-서 냉전시대에 외교와 첩보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 1972년 쿠르트 봘트하임(Kurt Waldheim)이 UN 사무총장이 되었다. 그는 나중에 오스트리아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나 전쟁중 나치에 동조하여 잔혹행위를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 1979년 비엔나는 뉴욕, 제네바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규모가 큰 UN기구의 본거지가 되었다. 비엔나에 유치된 대표적인 유엔기구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이다. 비엔나 인터내셔날 센터(UNO-City)가 오픈되었다.
- 1989년 동-서 냉전이 종식되고 구소련이 붕괴됨으로서 국제외교와 무역에 있어서 비엔나의 위치는 더욱 확장되었다.
- 1995년 오스트리아가 EU에 가입하였다.
- 2000년 EU는 오스트리아 정부가 좌익 자유당과 연정을 구성하자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경제 제재를 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얼마후 철회되었다.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 노이에마르크트 한쪽, 카푸친 교회 지하에 있는 합스부르크 황실 인물들의 영묘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주요 사건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선사시대: 신석기 시대, 구리, 청동, 철기시대
- 할슈타트(Hallstatt)와 라테네(Latene) 문화: 최초의 왕국 노리쿰(Noricum), 로마의 정복시대
- 바바리아와 슬라브 민족의 유입 시대
- 바벤버거 왕조(967-1245): 오스트리아 공국의 시작
- 공위시대(Interregnum), 합스부르크의 등장, 중세시대와 독일황제(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등장
- 합스부르크의 전성시대: 결혼으로 인한 영토의 확장
- 종교개혁의 여파와 30년 전쟁, 그리고 터키의 침범
- 바로크 시대: 프랑스 혁명의 여파, 나폴레옹과 비엔나 회의
- 1848년 혁명: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20세기 문화와 과학의 발전시기
- 세계 1차 대전, 제국의 붕괴, 공화국의 출범
- 정치적 변혁기: 오스트로 파치슴의 등장과 1938년의 안슐르쓰(Anschluss)
- 세계 2차 대전, 홀로코스트, 전후 1955년까지 4대 강대국의 점령 통치
- 중립국으로의 재출범, 1970년부터 사회주의 정부
1955년 전승국들이 벨베데레 궁전에서 오스트리아 국가조약(Staatsvertrag)에 서명함으로서 오스트리아는 4대국 신탁통치에서 벗어나 중립국이 되었다. <비엔나 시내에 있는 벨베데레 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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