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공동묘지 문화

슈테판성당 카타콤(Katakomben)

정준극 2008. 6. 14. 06:17
 

슈테판성당 카타콤(Katakomben)


비엔나의 시내 중심에 있는 옛 교회에는 거의 대부분 지하에 묘지가 있다. 슈테판성당도 예외는 아니다. 비엔나의 교회들은 예전에는 교회 주변이 묘지였으나 여러 형편으로 야외 묘지를 철거하고 그곳에 있던 유해들을 교회 지하의 카타콤으로 옮긴 경우가 많다. 슈테판성당도 그러하다. 예전에는 슈테판성당 주변이 공동묘지였으나 모두 철거하게 되어 그곳에 있던 수많은 유해들을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슈테판성당의 벽면에 부착된 옛 묘비들

 

슈테판성당은 비엔나 제1의 랜드마크이다. 성당 안에 들어서면 그 웅장하고 화려한 모습에 찬사를 금치 못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서 있는 발아래에 엄청난 규모의 지하묘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별로 실감하지 않는 것 같다. 밝은 빛을 바라보는 거룩한 성당과 죽음으로 가득한 어둠의 지하세계! 슈테판성당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무수한 옛 사람들의 유골들을 밟고 서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 그런 대단한 지하묘지가 있었다는 것인가? 1486년경으로부터 있었다고 보면 된다. 그러므로 5백년 이상을 그렇게 있었던 셈이다. 카타콤이라고 하면 무조건 어둡고 음산한 곳으로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슈테판성당 왼편 회랑의 카타콤 입구를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우선 현대식 설비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된다. 우선 보이는 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곳이다. 네온램프가 지하의 방을 밝게 비춰주고 있다. 작은 채플(예배처)가 있다. 채플에는 피에타(Pieta) 조각상이 성스럽게 설치되어 있다.

 

카타콤의 유골들. 누가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다.

 

채플(예배처)을 지나면 마치 속세를 버린 듯한 조용한 장소에 이른다. 이곳에는 구리 또는 청동으로 만든 관(棺)들과 어떻게 보면 작은 콘테이너처럼 보이는 구리함이 정돈되어 있다. 구리로 만든 관들은 단단히 밀봉되어 있다. 주교들의 시신을 보관한 관들이다. 단단히 밀봉했기 때문에 공기가 통하지 않아 나중에 열어보니 시신들이 거의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미이라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편 구리함의 뚜껑에는 대체로 십자가가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또 어떤 함에는 죽은 사람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는 경우고 있다. 마치 데스마스크(Death Mask)와 같다. 또 다른 관의 뚜껑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 사람들의 내장을 담은 상자들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관습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내장을 모두 꺼내어 따로 작은 함에 넣어 알코올과 함께 보관한다.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트(씨씨)의 내장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내장을 비운 시신은 관에 넣어 카푸치너키르헤(Kapuzinerkirche) 지하의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 황실 영묘)에 안치했다. 한편 심장은 따로 떼어 내어 아우구스티너키르헤(Augustinerkirche)의 지하 영묘에 안치했다.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사람이 죽은후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므로 그 때에 대비하여 심장과 내장을 육체와 분리하여 보관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이는 비단 합스부르크 사람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비엔나의 오랜 관습이다.

 

슈테판스돔의 합스부르크 묘지

 

다음으로 방문하는 장소는 슈테판성당의 자체 영묘(Gruft)이다. 주교를 비롯한 성당의 신부들의 시신을 안치한 곳이다. 붉은 대리석 석판의 뒤편에 벽감(Niche)을 만들고 잘 정리하여 안치하였다. 다음에 들어올 사람의 장소까지 이미 벽감으로 마련되어 있다. 이렇듯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의 일부는 잘 정돈되어 있지만 만일 우리가 이렇게 정리되기 전에 카타콤을 내려가 보았다면 음산한 어둠과 납골당 특유의 냄새 등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로 그런 장소가 슈테판성당의 지하 카타콤에 있다. 진짜 카타콤이다. 격자로 된 창문의 뒤편에는 그야말로 해골을 비롯한 유골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 군데군데에는 낡은 관들도 보인다. 오래된 관들은 뚜껑이 떨어져나가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주인공들의 유골들을 그대로 볼수 있다. 사실, 지하로 내려가서 우선 볼수 있는 현대식 방들에도 예전에는 유골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것을 치우고 주교들과 합스부르크 왕가를 위한 별도의 영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슈테판스돔의 합스부르크 코너


종전의 슈테판성당 카타콤은 구역으로 되어 있어서 한 구역이 시신들로 넘치게 되면 마감하고 다른 구역의 사용토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1732년 성당 주변의 공동묘지를 정리했을 때 그곳에 있던 유골들을 거의 모두 카타콤으로 옮겨 카타콤은 때 아닌 유골 홍수를 이룬 일이 있다. 그 전인 1679년 비엔나에 대역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을 때 슈테판성당의 카타콤도 시체 처치에 한몫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특히 성당 식구들이 역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면 성당이 우선 처리에 대한 책임이 있으므로 손쉬운 대로 카타콤을 이용하였다. 일반 시민들의 시신을 비엔나 성곽 밖의 화장터까지 옮기지 못한 것들도 많았다. 이들중 성당 근처에 있는 것들은 성당이 우선 처리할 수밖에 없다. 역병에 걸린 시신들을 성당 지하의 카타콤에 넣기 위해 성당 바닥에 우물과 같은 작은 구멍을 만들고 그 구멍을 통하여 시체들을 아래 공간으로 떨어트려 넣었다. 역병은 전염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슈테판스돔의 지하 묘지의 잔해

                

지하 카타콤에 넣은 시체들이 너무 많아 더 이상 넣을수 없게 되자 성당은 어쩔수 없이 건물 밖의 공터에 구덩이를 파고 시체들을 한꺼번에 묻기도 했다. 구덩이는 입구를 작게 만들고 아래쪽은 넓게 만들었다. 현재 피아커 마차들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가 바로 그런 구덩이가 있던 곳이다. 그러한 시체 구덩이를 카르너(Karner)라고 불렀다. 카르너라는 말은 원래 교회 옆에 있는 별당을 말한다. 카타콤에 시체들이 산처럼 쌓이고 성당 밖의 구덩이에도 더 이상 시체들을 넣을수 없을 만큼 만원사례에 이르게 되자 시체들의 부패 때문에 성당 안은 악취가 대단했다. 그 때문에 슈테판성당은 상당기간 문을 열지 못하고 미사를 드리지 못했다. 이후, 지하 카타콤은 폐쇄하였다. 카타콤에 대한 탐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19세기초였다. 성당의 어떤 젊은 신부가 자진하여 지하 카타콤을 탐사하였다. 카타콤에 내려간 그 신부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너무나 많은 유골이 쌓여 있어서 기절할 정도였다. 그 신부는 온갖 악조건을 극복하고 시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해골만 있고 팔다리의 뼈가 없는 것들은 비슷한 뼈들을 찾아 맞추는 일을 주로 했다. 결국 너무 힘들어서 중도에 하차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영국의 탐험가인 프란시스 트롤로프(Frances Trollope)라는 사람이 슈테판성당의 카타콤을 시찰하고 기행문을 쓴 것이 나왔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카타콤의 실태가 너무 생생하게 소개되어 있어서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이후 성당측은 1960년대 초에 카타콤을 오늘날과 같은 형태로 새 단장하여 일반에게 돈 받고 공개하기 시작했다. 무수히 쌓여 있는 해골들을 보고 싶은 사람, 인생무상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싶은 사람은 슈테판성당 카타콤을 방문할 것을 권고한다. 로마에서도 그렇지만 비엔나에서도 선조들의 유골이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았다.

 

 슈테판성당 지하에 쌓여있는 유골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