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음악가

브리기테나우의 안톤 카라스 기념 명판

정준극 2008. 12. 6. 15:22

브리기테나우의 안톤 카라스(Anton Karas) 기념 명판 

 

20구 브리기테나우의 라이슈트라쎄(Leystrasse) 46 번지에 있는 안톤 카라스를 기념하는 명판.

 

나이 지긋한 사람치고 영화 ‘제3의 사나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49년 영국의 카롤 리드(Carol Reed)가 감독한 영화 ‘제3의 사나이’(The Third Man: Der dritte Mann)’는 ‘해리 라임 테마’(The Harry Lime Theme)라는 주제곡으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 민속악기인 지터(Zither)로 연주하는 선율이 마음을 파고드는 곡이다. 이 곡을 만들고 직접 사운드트랙으로 연주한 사람이 안톤 카라스(Anton Karas)이다. 안톤 카라스는 1906년 비엔나에서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안톤은 어릴 때부터 음악에 재주가 많았다. 하지만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해 음악공부를 할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음악에 대하여 관대하여서 자녀들이 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것을 나무라지 않았다. 안톤은 12세 때에 할머니 집의 다락방에서 낡은 지터를 발견하고 그때부터 지터 연주에 몰두했다. 안톤은 14세 때에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공작기계 만드는 공장과 염색공장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안톤은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개인음악학원에 다니면서 지터와 피아노를 배웠다. 견습생활을 마친 안톤은 다행히 어떤 자동차 수리공장에 취직할수 있었다. 안톤은 자동차 수리공장에 다니면서 밤에는 비엔나음악예술대학교에 다녔다. 1920년대에 밀어닥친 공황으로 인하여 안톤은 직장을 잃게 되었다. 대신 그동안 공부한 지터 연주 솜씨를 바탕으로 그린칭(Grinzing)의 호이리게(Heurige)에서 지터를 연주하며 생활할수 있었다. 안톤에 대한 인기는 점차 높아갔다. 얼마후에는 아버지의 수입보다도 더 많은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안톤 카라스의 치타 연주장면


1939년에 그는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이 끝나는 1945년까지 고사포부대원으로 복무했다. 안톤은 몇 년동안 러시아 전선에서 고생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는 전선을 가더라도 지터를떼어 놓고 가지는 않았다. 전쟁이 끝난지 몇 년후인 1948년, 영국의 영화감독인 카롤 리드(Carol Reed)는 비엔나를 배경으로 ‘제3의 사나이’를 촬영키로 하고 주제음악을 연주할 사람을 찾다가 모두들 안톤을 추천하여 안톤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카롤 리드는 안톤의 겸손함과 지터음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보고 감동했다고 한다.사실 안톤은 영화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는 것을 내키지 않아했다. 그저 그린칭에서 비엔나 사람들과 함께 아름다운 지터 음악을 연주하며 지내는 것이 행복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인 카롤 리드는 안톤을 런던으로 초청하여 음악을 완성할 때까지 숙식을 함께 하며 지냈다. 그때 안톤은 주급 30파운드라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매주 용돈으로 20파운드를 더 받았다. 그렇지만 안톤은 주제곡을 만들기 위해 하루 14시간씩 스튜디오에 얽매여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유명한 ‘제3의 사나이’의 주제곡은 런던의 코르다(Korad)영화 촬영소에서 완성되었다. 안톤은 음악을 작곡한 경험이 없었다. 다만 훌륭한 연주자였을 뿐이다. 안톤은 생전 처음 해보는 영화음악 작곡을 위해 무던히도 고생을 했다. 나중에 그는 ‘감독인 리드가 나를 마치 노예처럼 부려 먹었다’고 털어 놓았다. 안톤의 비엔나 사랑은 대단했다. 런던에 몇주동안 머물 때에는 비엔나에 대한 향수병에 걸려 마음고생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영화음악을 때려 치고 비엔나에 돌아가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럴때마다 감독인 리드가 거의 강압적으로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영화 '제3의 사나이'에서 조셉 코튼(Joseph Cotten)과 알리다 발리(Alida Valli). 장소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

 

영화 ‘제3의 사나이’는 대성공이었다. 반드시 주제곡 때문에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주제곡에 대한 인기는 놀랄만큼 대단했다. 안톤 카라스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성공이었다. 결과, 안톤은 세계 각지를 순방하면서 수많은 저명인사들 앞에서 지터 연주회를 가졌다. 런던에서는 엘리자베트 여왕과 왕실가족들을 위한 연주회를 가졌다. 마가레트 공주는 안톤을 엠프레스 클럽(Empress Club)에 초청하여 안톤이 런던에 머무는 동안 여러번 연주회를 열도록 주선해 주었다. 안톤은 네덜란드의 율리아나 여왕 앞에서 연주했고 스웨덴 구스타프 국왕 앞에서 연주했으며 바티칸에서는 교황 비오12세를 위해 연주했다. 영화가 나온지 1년후에 ‘해리 라임 테마’ 음반은 50만장이나 팔렸다. 당시로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판매기록이었다. 이와함께 세계 각국에서 지터를 배우겠다는 사람이 늘어나 지터가 날개 돋힌듯 팔렸다.

 

안톤 카라스의 '해리 라임 테마'가 포함되어 있는 음반 표지. 사진은 비엔나 시청 앞의 가로등


오스트리아에서는 ‘제3의 사나이’가 1950년 3월 10일 비엔나의 아폴로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비엔나 시민들의 첫 반응은 영화의 배경이 전쟁으로 파괴된 비엔나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비엔나의 신문들은 ‘제3의 사나이’가 형편없는 영화라고 비판을 멈추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안톤이 첫 번째 세계순회 연주여행을 마치고 비엔나에 돌아오자 사정은 달라졌다. 당시 오스트리아 수상이던 레오폴드 휘글(Leopold Figl)과 장관들이 안톤을 영접했다. 시민들은 ‘안톤 카라스’의 이름을 외치며 환영했다. 안톤이 태어난 브리기테나우(Brigittenau)에서는 ‘제3의 사나이’를 보기위해 사람들이 극장 앞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렸다. 사람들은 8일 후의 입장권을 겨우 살수있었다. 안톤이 거리에 나서면 사람들이 줄을 지어 사인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안톤은 그런 인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안톤은 ‘나는 스타가 아닙니다. 인기인이라고 생각해본 일도 없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했을 뿐입니다. 그린칭에 돌아가 호이리게에서 지터를 연주하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겸손히 말했다. 안톤은 1951년 캐나다와 미국에서 순회연주회를 가졌다. 그리고 1962, 1969, 1972년에는 일본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일본에서는 히로히토 천황이 연주회에 참석했다. 일본 사람들은 안톤의 지터 음악에 열광했다.

 

버링 공동묘지(Sieveringer Friedhof)에 있는 안톤 카라스의 묘지. 역시 해리 라임 테마의 첫 소절이 그려져 있다.


1954년 안톤은 그린칭에 호이리게 주점을 열었다. 유명 인사들이 안톤의 호이리게를 찾아왔다. 오손 웰스, 지나 롤로브리지다, 쿠르트 위르겐스, 한스 모저, 파울 회르비거, 마리카 뢰크, 요한네스 헤스터스 등이 찾아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톤은 무언가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희망은 소박한 시골 사람들을 위해 연주하는 것이었다. 안톤은 그들이야말로 자기의 음악과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라고 믿었다. 안톤은 세상의 무대로부터 사라지기로 결심했다. 1966년 안톤은 ‘나는 관광안내원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해왔던 일은 비엔나 호이리게와 별로 관계없는 일이었다’고 말하고 은퇴하였다. 안톤 카라스는 1985년 1월 10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안톤 카라스 기념명판을 설치하던 날 관련자들의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