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기념상/저명 인사

오페른링의 괴테 기념상

정준극 2008. 12. 26. 14:32

오페른링의 괴테 기념상

 

오페른링의 괴테기념상. 부르크가르텐과 팔레 셰이 사이에 있다.

                            

링슈트라쎄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 앞에서부터 호프부르크까지의 대로가 오페른링(Opernring)이다. 오페른링에서 부르크가르텐(Burggarten)이 시작되는 길가에 요한네스 괴테(Johannes Goethe)의 기념상이 의연히 자리 잡고 있다. 부르크가르텐(궁정정원)과 팔레 셰이(Palais Schey) 사이에 있다. 1890년대 말에 조각가 에드문트 헬머(Edmund Hellmer)가 완성한 작품이다. 괴테 기념상의 뒤편에서 아우구스티너바슈타이 까지의 짧은 길은 괴테가쎄(Goethegasse)이다. 괴테는 생전에 비엔나를 방문하여 상당기간 체류한 일이 있다. 괴테는 현재의 오페른링에서 부르크링(Burgring)까지 마로니에가 우거진 길을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렇게 산책하면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과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개중에는 지체 높은 왕족이나 귀족들도 있었기 때문에 괴테는 산책을 통하여 이들과도 자연스럽게 교분을 쌓을수 있었다. 괴테의 기념상을 비엔나 중심가의 중요한 지점에 건립하고 그를 기리는 거리이름까지 붙인 것은 비엔나 사람들의 괴테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비엔나에서는 귀족들 사이에서 한때 이탈리아어가 판을 치더니 나중에는 프랑스어가 마치 신분의 척도처럼 사용되었다. 그러자 일각에서는 독일어의 자존심을 찾자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계몽주의 군주인 요셉2세는 독일어의 사용을 널리 권장하여 심지어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대본의 오페라를 작곡토록 의뢰하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나온 것이 오페라 ‘후궁에서의 도주’였다. 아무튼 독일어에 대한 자아를 찾자는 생각이 점차 높아지고 있는 때에 셰익스피어를 충분히 능가하는 요한네스(요한) 볼프강 괴테가 독일어로 된 작품들을 내놓아 만인을 감동케 하였으니 같은 독일어를 사용하는 비엔나 사람들로서 괴테에게 한없는 존경을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오페른링의 괴테 기념상


요한 볼프강 괴테는 1749년 신성로마제국 치하의 자유도시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태어났다. 주지하는 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점하고 있었다. 괴테는 1832년, 향년 82세로 당시 작세-봐이마르-아이제나흐(Saxe-Weimar-Eisenach) 공국에 속한 봐이마르에서 세상을 떠났다.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괴테의 직업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 철학자, 외교관이었다. 그의 작품은 독일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것들로서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이른바 ‘봐이마르 고전주의’(Wiemar Classicism) 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 운동은 계몽주의, 감성주의(Empfindsamkeit), 질풍노도(Sturm und Drang), 낭만주의(Romanticism)와 시기를 함께하는 것이다. 괴테의 주요 작품은 ‘파우스트’,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Wilhelm Meister's Apprenticeship), 그리고 서한체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을 들수 있다. 자연과학자로서의 괴테는 ‘색의 이론’(Theory of Colors)을 썼으며 ‘식물 행태론’(Plant Morphology)은 훗날 다윈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이었다. 괴테가 독일 철학에 끼친 영향은 다대하였다. 특히 헤겔(Hegel)과 쉘링(Schelling)에게 끼친 영향은 컸다. 괴테의 영향력은 음악, 연극, 시, 철학, 자연과학의 모든 면에서 실로 유럽 전역을 누볐다.

 

오페른 링에 있는 괴테 기념상

                          

쉴러와 괴테의 교분은 1794년부터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1788년 잠시 만난 일이 있지만 그때에는 그저 인사만 나눈 정도였다. 쉴러와 괴테의 우정은 쉴러가 1805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비엔나의 링슈트라쎄에서 괴테의 기념상과 마주보고 있다시피한 곳에 쉴러의 기념상이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쉴러의 기념상은 쉴러파르크에 있다. 괴테의 시작품(詩作品)은 ‘인너리히트카이트’(Innerlichtkeit: 내향성)라고 하는 독일 시 운동의 전체 모델이 되었다.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시는 괴테가 주도한 ‘인너리히카이트’의 산물이라고 할수 있다. 괴테의 문학작품은 여러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예를 들면,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베를리오즈, 볼프, 말러, 토마, 리스트 등이다. 가장 잘 알려진 노래는 토마(Thomas)의 오페라 ‘미뇽’(Mignon)에 나오는 ‘그대는 아는가, 저 남쪽 나라를’(Kennst du das Land, wo die Zitrone blühn?'이다. ‘저 남쪽 나라’는 이탈리아를 말한다. '미뇽'은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기간'을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괴테의 대표작인 파우스트(Faust)에 대하여는 많은 작곡가들이 교향곡, 오페라 등으로 파우스트의 스토리와 철학을 소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프랑스 작곡가인 샤를르 구노(Charles Gounod)의 ‘파우스트’, 이탈리아의 부소니(Busoni)의 ‘독토르 파우스트’는 대표적인 오페라이다. 리스트와 말러는 파우스트의 상당부분에 영감을 받아 교향적 작품을 만들었다. 베토벤은 파우스트를 모든 예술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베토벤은 파우스트를 테마로 한 어떠한 작품도 작곡하지 않았다. 파우스트의 위대성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일은 너무나 벅찬 일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괴테가쎄


파우스트가 나온 이래 파우스트박사를 숭배하는 모임까지 생겨났다. 대부분 비교(秘敎)의 추종자들이었다. 그중의 한 사람인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라는 사람은 괴테를 기려서 ‘괴테아눔’(Goetheanum)이라는 극장을 건립했다. 아직도 이 극장에서는 파우스트가 고정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독일연방정부가 설립한 기구로서 외국에서 독일어와 독일문화를 증진하는 기구의 명칭은 ‘괴테 인스티튜트’(Goethe Institut)이다. 괴테를 기념하여서 붙인 명칭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루돌프 슈타이너가 스위스 도른바흐에 건설한 괴테아눔(두번째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