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궁 일화/오궁소고

5궁 좀더 알기

정준극 2009. 3. 23. 11:37

경복궁(景福宮) 

사적 117호. 종로구 세종로 1번지. 태조 이성계가 1395년(태조 4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긴후 건립한 궁전이다. 경복(景福)이란 말은 임금에 대한 큰 복을 빈다는 뜻으로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한 것이다. 그후 태종은 궐내에 인공연못을 만들고 경회루를 세워 외국 사신들을 접대하는 등의 목적으로 사용했다. 세종대왕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두어 여러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복궁은 1592년 임진왜란 중에 불에 탔다. 그후 빈 궁궐로 지내다가 고종이 즉위하자 1868년 흥선대원군이 원납전을 거두어 중건했다. 1895년에는 경복궁 안의 건청궁(乾淸宮)에서 일본 놈들이 명성황후를 비참하게 시해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하였다. 그후 한일합방까지 또다시 빈 궁궐로 남아 있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이 1926년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앞을 가렸다. 최근 경복궁 복원 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건청궁, 동궁(東宮) 등이 완전히 복원되었고 광화문 복원 사업도 쉬엄쉬엄 진행중이다.

 

경복궁의 경회루. 구 만원권 지폐의 뒷면에 등장했던 곳이다.

 

창덕궁(昌德宮)

사적 122호. 종로구 와룡동 2-71번지. 1405년 태종이 이궁(별궁)으로 조성한 궁궐. 1592년 임진왜란때 불에 탄 것을 선조가 1607년 재건하기 시작하여 광해군이 완공했다. 얼마후인 1623년 인조반정 때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 전각들이 불에 탔다. 이후에도 계속 크고 작은 화재가 일어났으며 1833년 순조 때에 대화재가 일어나 대조전(大造殿)과 희정당(熙政堂)이 불에 탔다. 그러다가 1917년 일제 강점중에 또 대화재가 발생했다. 일제는 창덕궁의 전각들을 복구한다는 명분아래 경복궁에 있는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내고 그 가운데 일부의 재목을 사용하였다. 그때 복원했다는 것이 현재의 대조전과 희정당으로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과 강녕전(康寧殿)을 옮겨왔다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정전은 경복궁이지만 임진왜란 때에 소실된후 빈 궁궐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광해군 이후 거의 3백년동안 창덕궁이 정전의 역할을 했다. 창덕궁은 1997년 UNESCO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세계가 보존해야할 책임이 있는 유산이 되었다.

 

창덕궁의 부용정과 부용지. 천지인의 조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창경궁(昌慶宮)

사적 123호. 종로구 와룡동 2-1번지. 태종이 아들 세종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자신이 거처할 궁궐로 지은 수강궁(壽康宮)이 창경궁의 전신이다. 그후 1484년 성종이 수강궁 자리에 별궁을 건립하고 창경궁이라고 불렀다. 창경궁은 서울의 다른 궁궐과 마찬가지로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으나 1616년 광해군이 복원하였다. 창경궁에서는 장조(사도세자), 정조, 순조, 헌종 등 여러 왕이 태어났다. 5궁중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인데 창경궁만이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이다. 효종은 창경궁에 네 전각을 세워 자기의 네 공주가 머물러 살게 했다. 네 개의 전각은 이름도 아름다운 요화당(瑤華堂), 난향각(蘭香閣), 취요헌(翠耀軒), 계월각(桂月閣)이다. 일제는 순종과 왕자들을 위로한답시고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고 이름도 창경원이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벚나무를 많이 심었다. 봄날이 창경원 벚꽃(사쿠라) 구경은 원숭이와 코끼리를 볼수 있는 동물원과 함께 서울의 명물이었다. 창경원의 대형식물원(온실)은 국내 최초로 목재를 사용하여 지은 온실이다.

 

창경궁의 대온실. 기화요초를 볼수 있다.

 

덕수궁(德壽宮)

사적 124호. 중구 정동 5-1번지. 현재 덕수궁 자리에는 원래 선조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성종은 궁궐들이 모두 잿더미가 되어 거처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저택을 거처로 정하고 1593년부터 궁궐로 사용했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인 1611년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4년동안 지내다가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그후 광해군은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아내어 지내도록 하고 명칭도 경운궁이 아닌 서궁(西宮)으로 낮추어 부르도록 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인조는 경운궁의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옛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그후 사저로 사용되던 경운궁은 고종이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궁궐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고종이 거주하던 1904년에 경운궁에 대화재가 일어났다. 대부분 건물들이 잿더미가 되었다. 일제는 경운궁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을 건축하여 옛 궁궐의 모습을 말살코자 했다. 특히 석조전 앞에는 물개가 물을 뿜는 서양식 분수를 만들어 놓았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대화재 때에 잿더미가 되었다. 고종은 경운궁을 복원하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보수하여 정문으로 삼고 이름도 대한문(大漢門)이라고 고쳐 불렀다. 고종은 1907년 순종에게 황제를 물려준 뒤에도 경운궁에서 계속 머물렀다. 순종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에서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변경했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1919년 세상을 떠났다. 일본놈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대한문 앞에서는 수많은 백성들이 고종이 승하를 애통해하며 문상했다. 삼일독립만세 사건을 재촉하는 문상이었다.

 

덕수궁의 석조전. 지금은 덕수궁 관리사무소가 쓰고 있다. 이곳의 공무원들은 그야말로 대궐생활이다.

 

경희궁(慶熙宮)

사적 271호. 종로구 신문로 2가 1-126번지. 5궁중 서쪽에 있기 때문에 서궐이라고 불렀다. 원래 이곳에는 나중에 임금이 되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定遠君)이 살았다.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 부근에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말을 듣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수백호의 여염집을 강제로 이주시킨 후 1620년 궁궐을 세웠으니 그것이 경덕궁이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아버지가 살던 집터였으므로 이를 기념하여 이곳에서 정사를 보았다. 그후 효종으로부터 철종에 이르는 10여명의 임금이 경덕궁에서 살았다. 현종과 숙종은 경덕궁에서 거의 평생을 보냈다. 특히 숙종은 경덕궁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숙종이 뒤를 이은 영조는 경덕이라는 이름이 정원군 원종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영조는 경희궁에서 즉위했으나 몇 달후 창덕궁으로 이전하였다. 순조는 1810년 창덕궁에서 경희궁으로 옮겨와 지내다가 이곳에서 승하했다. 헌종도 이곳에서 즉위했으나 반년동안 지내다가 창덕궁으로 옮겼다. 1860년 철종은 창덕궁보다는 경희궁에서 지내고자 경희궁을 수리하고 옮겨 왔지만 7개월간 머물다가 다시 창덕궁으로 돌아갔다. 이후 경희궁은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빈궁궐로 남아 있게 되었다. 경희궁은 동쪽의 흥화문(興化門)이 정문이다. 정전은 숭정전(崇政殿)이라고 불렀는데 1926년 조계사에 매각되었고 현재는 동국대학교 구내에 복원되어 있다. 일제는 다른 건물들도 이전하거나 매각하여 경희궁을 거의 공지(空地)로 남아 있게 했다. 이에 일제는 이곳에 1910년 일본인과 친일파 자제들을 위한 경성중학교(현 서울고등학교)를 세웠다. 1974년 서울고등학교가 강남으로 이전하자 정부는 1988년부터 복원을 시작하여 현재 자정전과 숭정전, 숭정문 등을 복원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별로 볼것이 없다. 얼마 전에는 경희궁의 숭정전 앞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공연하여 관심을 끌었다. 마치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를 공연한 것처럼! ㅋㅋ

 

경희궁의 숭정문 일대. 새로 지어서인지 말끔하다. 안에 들어가면 안내원이 심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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