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ann Strauss I(요한 슈트라우스 1세)
음악의 라데츠키 장군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낭만주의 작곡가로 요셉 란너(Josef Lanner)와 함께 왈츠를 널리 보급한 인물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04년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라데츠키(Radetzky) 행진곡과 로렐라이(Lorelei) 왈츠일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버지이며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아들은 요한 슈트라우스 3세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게는 요셉 슈트라우스와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라는 아들들이 더 있었다. 모두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아들들이었다. 그리고 두 딸이 있었다. 안나(Anna)는 1829년에 태어났으며 둘째 딸 테레제(Therese)는 1831년에 태어났다. 왈츠의 황제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들보다는 훨씬 후인 1866년에 태어났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는 형이 하나 있었다. 페르디난트였다. 1834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1년도 되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딸 자매와 아들 3형제가 남게 된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부모는 여관을 운영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아버지 프란츠 보르지아스는 원래 유태인이었으나 뜻한바 있어서 일찌감치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별다른 문제없이 조용히 지내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정에 어려움이 닥친 것은 그가 불과 일곱 살 때였다. 어머니가 성홍렬에 걸려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할아버지)는 얼마후 계모를 맞아 들였다. 그러던 중,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열두살 때에 그의 아버지 프란츠 보르지아스(Franz Borgias)가 다뉴브강에 빠져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생활이 궁핍해지자 계모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책제본소에 견습공으로 보내려고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어쩔수 없이 제본소에 나가서 견습공으로 일했지만 틈틈이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익혔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지겨운 견습공 생활에서 탈출하여 멀리 사라질수도 있었지만 그는 무려 6년 동안의 견습공 생활을 아무런 불평도 없이 마쳤다. 견습공 시절에 바이올린을 익힌 그는 이미 그때에 자기가 할 일을 마련해 놓았다.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란너 4중주단(Lanner Quartet)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란너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란너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나중에 서로 라이발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란너쿼텟은 농부들의 무곡인 랜들러를 왈츠로 편곡하여 연주했다. 반응이 무척 좋았다. 그리하여 비엔나 왈츠가 서서히 막을 올리게 되었다. 란너쿼텟은 점점 멤버를 늘려 소규모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슈튜벤링에 있는 라데츠키 장군의 기마상 요셉 라데츠키 장군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란너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가 되었다. 란너 오케스트라는 1824년 부활절 이전에 여린 비엔나 카니발(Fasching)에서 연주하여 최고의 인기를 끌었다. 그후 너무나 연주 요청이 많아지자 란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게 제2의 란너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여 서로 다른 곳에서 연주토록 했다. 얼마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자기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고 자기가 음악을 작곡하기로 결심했다. 란너와의 결별이었고 그렇게 하여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라이발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처럼 심각한 라이발은 아니었다. 비엔나에서 왈츠에 대한 요구가 너무 많아져서 서로 악단을 나누어 연주해도 부족할 지경이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이제 비엔나에서 가장 유명한 왈츠 작곡가 겸 연주자가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내친김에 악단을 데리고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영국, 스코틀랜드 등지를 순회연주하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손을 거치면서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되었다. 그러다가 1901년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가 해체하는 바람에 명맥을 잇지 못하게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37년 프랑스 여행에서 콰드리유(Quadrille)라는 네사람이 한 조가 되어 추는 춤을 접하자 흥미를 느껴 콰드리유 무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으며 1840년의 비엔나 카니발(화싱)에 소개하였다. 비엔나 시민들은 콰드리유의 매력에 빠져 들어갔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이번 프랑스여행에서 음악이란 계층을 상관하지 않고 모두에게 기쁨을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일반 대중들을 위한 왈츠의 보급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1838년에는 런던의 빅토리아 여왕의 대관식에에서 평민들이 즐겨하는 왈츠를 선보였던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당시 대중들이 좋아하는 노래들을 왈츠에 적용하는 시도를 했다. 예를 들면 오베론(Oberon)의 서곡을 그의 초기 왈츠인 ‘비엔나 카니발’(Wiener Karneval)에 사용하였으며 심지어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이유를 작품 101의 왈츠에 인용하기도 했다.
화싱 퍼레이드. (Credit: Kyoboshinmun)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결혼을 21세 때인 1825년에 했다. 비엔나 근교 리히텐탈(Liechtenthal)의 교구교회에서 조용한 결혼식을 올렸다. 실은 그 해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태어났다. 상당한 속도위반! 결혼후 10년 남짓이 되자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원만하지 못하게 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가 연주 여행을 자주 다녔다. 때문에 가족들과 떨어지는 시간이 많았다. 결국 바람기가 상당했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34년부터 에밀리 타람푸슈(Emilie Trampusch)라는 아가씨와 연주 여행을 함께 다니며 동거하기 시작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에밀리는 오랫동안 함께 지내면서 자녀를 6명이나 두었다. 모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이복동생들이었다. 그러므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가 서먹하지 않을수 없었다. 누구나 다 아는 얘기이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음악을 하겠다고 나서자 어머니인 마리아 안나 슈트라우스는 지지했지만 아버지는 엄하게 반대하였다. 아버지의 온당치 못한 생활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아들과 어머니가 합작으로 아버지의 뜻에 저항하는 기치를 내건 것이었다. 마침 그러한 시점에서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정부인 에밀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정식 자녀로 인정하겠다고 나섰다. 이에 어머니 마리아 안나는 참을수 없다고 선언하고 1844년 이혼소송을 냈다. 하지만 아들의 음악공부를 반대했던 아버지의 주장은 계속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럴수록 어머니는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에게 하고 싶어하는 음악을 하라고 응원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이혼 소송으로 사태는 달라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가장으로서 집안에서 큰 소리를 냈다. 사람들은 그런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집안을 ‘사슴하우스’ 또는 ‘황금 사슴의 집’이라고 불렀다. 숫사슴은 가장으로서 명령 한마디로 가족들을 인솔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었다. 그러한 영향 때문에 큰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법학을 공부했고 둘째 아들 요셉은 군대에 들어갔다가 엔지니어가 되었고 셋째는 공무원이 되려는 준비를 하였다.
좌로부터 요셉, 요한,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
가정문제가 복잡했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영국을 계속 방문하고 그때마다 새로운 곡으로서 자선음악회를 열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아버지의 재능은 아들에 비하여 낮았다. 그러므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비엔나에서 왈츠의 문을 연 인물로서 기억될 뿐이며 실제로 왈츠의 황제로서 등극한 것은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이다. 또한 아버지는 연주회 입장료 수입에 상당히 집착하였다. 종전 같으면 무도회나 연주회를 끝내고 접시를 돌려 자발적인 후원금을 받는 것이 통례였지만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예 입구에 매표소를 두어 누구든지 표를 사서 들어오도록 했다.
아들에 대한 대중들의 인기가 높이지면 높아질수록 아버지는 초조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본의 아니게 라이발이 되었다. 그럴 때에 신문이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신문은 아버지와 아들이 마치 치고 받는 싸움이라도 벌인 것처럼 매일 떠들어댔다. 문제는 대중들이 아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더 속이 상했다. 아버지는 돔마이어(Dommayer) 카지노가 아무리 간청해도 연주를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왜냐하면 돔마이어가 아들의 데뷔 연주회 장소를 주선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1846년, 페르디난트 1세 황제는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궁정무도회음악감독(K.K. Hofballmusikdirektor)으로 임명하였다. 아버지는 이제 아들과 라이발 상대를 할 필요가 없어졌다. 자기의 허락이 없이는 누구도 궁중 무도회에서 지휘할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 아버지는 그런대로 편하게 지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1849년 성홍열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는 되블링거 공동묘지에 친구인 요셉 란나의 곁에 묻혔다. 1904년 비엔나시는 중앙공동묘지를 새롭게 조성하고 되블링거에 있던 요셉 란너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음악가묘역으로 이장하였다. 되블링거 공동묘지는 슈트라우스-란너 공원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베를리오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업적을 치하하면서 ‘슈트라우스가 없는 비엔나는 도나우가 없는 오스트리아와 같다’고 말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왈츠 10여곡, 폴카 10여곡, 행진곡 2곡을 남겼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궁정무도회음악감독으로 임명한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1세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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