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Josef Strauss(요셉 슈트라우스)

정준극 2009. 5. 29. 22:45

Josef Strauss(요셉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2세의 동생

 

 

애칭으로 페피(Pepi)라고 불리는 요셉 슈트라우스(1827-1870)는 왈츠의 황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동생이다. 비엔나에서 태어난 요셉 슈트라우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엔지니어가 되어 활동하다가 1850년대부터 가족 오케스트라에 합류하였으며 작곡도 하기 시작했다. 요셉 슈트라우스는 실제로 엔지니어로서 재능이 있었다. 비엔나시 위원회에 거리청소기구를 개발하여 활용하는 계획을 보고하기까지 했다. 1853년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병에 걸려 요양소에 들어가게 되자 요셉 슈트라우스가 슈트라우스 악단을 맡을 사람으로서 당연히 제안되었다. 처음에 그는 적극 사양하며 거절했으나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맡지 않을수가 없었다. 비엔나 시민들은 요셉 슈트라우스가 초기에 작곡한 왈츠를 기억하고 있었다.

 

요셉 슈트라우스는 1857년 6월 8일 비엔나의 성요한 네포무크 교회에서 카롤리네 프루크마이어(Caroline Pruckmayer)와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딸 카롤리네 안나(Karoline Anna) 하나를 두었다. 요셉 슈트라우스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1870년 폴란드 연주 때에는 지휘자의 단상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져 급히 비엔나로 돌아와야 했다. 다행히 그에게는 헌신적인 부인 카롤리네가 있어서 폴란드에서 중요한 고비는 넘길수 있었지만 비엔나의 집에 돌아온 그해에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요셉 슈트라우스의 사인에 대하여는 아직 정확히 모른다. 일설에 따르면 폴란드에서의 그날 밤 요셉 슈트라우스는 식사와 한잔을 위해 어떤 식당에 들어갔는데 어떤 술에 취한 러시아 군인이 요셉에게 왈츠를 연주하라고 강요하였지만 이를 거절하자 러시안 군인이 요셉을 구타하여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가 얼마후에 비엔나 와서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가 있다. 요셉을 아끼는 사람들은 정확한 사인을 알아내어 러시아측에 항의하자고 하였으나 부인이 부검을 반대하는 바람에 그대로 장례를 치루게 되었다. 요셉 슈트라우스는 처음에 생맑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1901년 중앙공동묘지에 예술가 묘역이 완성되지 슈트라우스의 가족들이 모두 그곳으로 이장되었다.

 

요셉 슈트라우스는 많은 왈츠를 작곡했다. 대표적인 것은 ‘오스트리아의 마을 제비’(Dorfschwalben aus Osterreich)이다. 폴카로는 ‘피치카토 폴카’등이 있다. 요셉의 작품은 다른 형제들(요한, 에두아르드)의 작품에 비하여 좀 더 신중하다. 그러한 면모는 예를 들어 왈츠 Dynamiden(자석의 신비한 힘: Geheimne Anziehungskrafte)에서 볼수 있다. 작품 중에는 형과 동생들이 합작하여 만든 것들도 더러 있다. 예를 들어 Hinter den Coulissen quadrille(배후에서)는 요셉이 형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합작하여 만든 것이며 Trifoilen Waltz(하찮은 왈츠)는 요셉이 형 요한과 동생 에두아르드 합심하여 만든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