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 Michael Ziehrer(칼 미하엘 지레르)
슈트라우스 가족과 라이벌
프라터의 칼 미하엘 리제르 기념상(배경에는 왈츠를 추는 남녀들)
칼 미하엘 지레르(Carl M. Ziehrer라고도 씀: 1843-1922)는 작곡가이면서 오스트리아 군악대장이었다. 지레르는 생전에 요한 슈트라우스 가문과 극심한 라이벌 관계에 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특히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와 라이벌이었다. 지레르는 비엔나에서 유명한 모자 장인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부유한 이 모자 장인은 스스로 음악을 공부하여 상당한 실력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후 지레르는 유명한 음악출판가인 칼 하슬링거(Carl Haslinger)와 친분을 쌓게 되었다. 당시 하슬링거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의견이 맞지 않아 크게 다투고 원수처럼 지내고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돈 때문이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하슬링거가 주선하여 러시아 연주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받을 수익금의 배분문제를 놓고 다투게 되었던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첫 번째 부인인 헨리에타 크레프즈(Henrietta Treffz)에 따르면 하슬링거는 지레르의 후견인으로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를 비방하는 일이 있으면 언제나 지레르를 앞장세웠다는 것이다. 지레르의 왈츠는 활달하고 기분을 돋우는 것으로서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의 왈츠에 대한 인기에는 경쟁하기가 어려웠다. 지레르가 요한 슈트라우스와 같은 시대에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 불운이었다.
지레르의 후견인인 하슬링거는 젊은 지레르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결과 지레르는 1863년, 20세의 젊은 나이로 하슬링거가 조직한 새로운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하슬링거가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에게 대항키 위해 조직한 것이었다. 그후 지레르는 역시 하슬링거의 도움을 받아 비엔나의 군악대에 자리를 잡을수 있었다. 당시에는 지휘자로서 제국의 군악대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였고 관례였다. 1873년 지레르는 비엔나에서도 상당한 규모의 민간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독일 음악잡지’(Deutsche Musikzeitung)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는 1870년대 후반기의 음악경향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레르는 음악잡지를 발간한지 얼마되지 않아 출판사를 되블링거(Döblinger)로 바꾸었다. 말하자면 하슬링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후 그는 몇 년 동안이나 유럽의 여러 나라, 특히 독일을 방문하여 연주회를 가져 지휘자와 작곡가로서 인기를 끌었다. 부인이 될 마리안느 에델만(Marianne Edelmann)을 만난 것은 베를린에서였다. 마리안느는 오페레타 성악가였다. 1893년, 지레르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여 시카고만국박람회에 초청을 받았다. 대성공이었다. 이후 지레르에 대한 초청이 봇물을 이룰 정도였다. 지레르는 41개 독일 도시를 순회연주한후 비엔나로 돌아왔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지레르에게 최고훈장을 주었다. 비엔나에 돌아온 지레르는 슈트라우스의 오케스트라보다 더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주로 무곡을 연주하였다. 지레르에 대한 인기는 점점 높아갔다. 그의 작품 중에서 ‘비엔나 아가씨’(Wiener Mad'ln)와 ‘비엔나 시민’(Wiener Bürger)는 사람들이 특히 좋아했다. ‘비엔나 시민’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보더 더 인기를 끌기도 했다. 지레르는 슈트라우스 왕조에 대하여 열심히 도전해 보았지만 결국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슈트라우스의 그림자에 가려 지내야 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지레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 닮은 모습이 되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수염도 비슷하게 기르고 헤어 스타일도 닮게 했다. 요한 슈트라우스의 수염과 같이 생긴 것을 슈누르바르트(Schnurrbart)라고 부른다.
오페레타 '관광안내원'의 한 장면
지레르는 오페레타 작곡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대표적인 성공작은 Fremdenfuhrer(관광안내원)이다. 지레르는 비엔나 오페레타의 황금시대를 레하르 등 앞으로 다가올 백은시대의 사람들에게 연결해준 사람이었다. 1909년 지레르는 마침내 KK궁정무도회음악감독(Hofballmusikdirektor)라는 직위에 임명되었다. 이 직위를 처음 맡은 사람은 요셉 란너였으며 그후에는 슈트라우스 왕조가 계속하여 맡았고 최근까지는 애두아르드 슈트라우스가 맡고 있었다. 궁정무도회음악감독이라는 직위는 지레르가 마지막으로 폐지되었다. 1차 대전의 여파로 합스부르크가 막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지레르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프란츠 레하르, 오스카 슈트라우스, 레오 팔(Leo Fall) 등과 함께 일했으며 그들이 작품을 지휘하기도 했다. 지레르는 1922년 11월 14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말년에는 수입이 없어서 가난한 형편이었다. 지레르는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안장되었다. 부인인 마리안느도 그의 옆에 안장되었다. 지레르는 거의 6백곡에 이르는 왈츠, 폴카, 행진곡을 작곡했다. 오늘날에도 많은 곡들이 연주되고 있다. 그의 작품은 활발하고 힘에 넘쳐 있다. 멜로디는 유쾌하며 흥겹다. 합스부르크가 어려웠던 시절에 지레르의 음악은 그나마 용기를 불어넣어 준 것이었다.
'비엔나와 음악 > 오스트리아 작곡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Karlheinz Essl(칼하인츠 에쓸) (0) | 2009.06.10 |
---|---|
Karl Joseph Millöcker(칼 요셉 밀뢰커) (0) | 2009.06.06 |
Karl Ditters von Dittersdorf(칼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 (0) | 2009.06.06 |
Josef Franz Wagner(요셉 프란츠 바그너) (0) | 2009.06.06 |
Josef Lanner(요셉 란너) (0) | 2009.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