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f Franz Karl Lanner(요셉 프란츠 칼 란너)
비엔나 왈츠의 개척자
비엔나음악을 언급함에 있어서 요한 슈트라우스를 제외할수 없듯 요셉 란너(1801-1843)라는 사람도 제외할수 없다. 요셉 란너는 우리가 보통 왈츠의 황제라고 부르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관계가 있다. 란너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파트너이자 친구이며 라이벌이었다. 그래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를 얘기할 때에는 항상 요셉 란너의 얘기가 뒤따른다. 두 사람은 비엔나 왈츠의 개척에 있어서 떼려야 뗄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비엔나 시청(라트하우스) 공원에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요셉 란너가 함께 서 있는 기념상이 있다. 두 사람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말해주는 기념상이다. 사실상 요셉 란너는 왈츠에 있어서 요한 슈트라우스 1세보다 선배이다. 요셉 란너가 먼저 농부들의 단순한 무곡인 란들러를 왈츠의 형태로 변경하여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란너야 말로 농부들의 음악을 상류사회에서도 즐길수 있는 격조 높은 무곡으로 승화시킨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전까지는 란들러와 같은 춤곡을 춤을 출 때에만 연주하였으나 란너 시대로부터 별도의 콘서트 곡목으로도 연주하게 되었다. 그러한 란너이지만 파트너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보다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아들을 잘 둔 덕분에 자동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프랑스와 영국 등 외국 연주여행을 빈번하게 다니는 바람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란너는 비엔나에만 있었기 때문에 이름이 덜 알려졌던 것이다.
란너는 바이올린을 들고 란들러와 왈츠를 연주했다. 뛰어난 솜씨였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운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한 바이올린 실력이었다. 란너가 란들러에 관심을 갖고 연주하기 시작한 것은 청년시절 미하엘 파머(Michael Pamer) 현악 오케스트라에 가입하고부터였다. 얼마후 란너는 자신의 현악4중주단을 구성하여 연주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는 소규모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게 되었다. 란너의 오케스트라는 주로 비엔나 댄스음악을 연주하였다. 란너는 점점 인기를 끌게 되어 부활절 이전의 카니발(화싱: Fasching)에는 의례 란너의 오케스트라가 초청을 받아 연주했다. 1832년, 란너는 그때까지만 해도 단원 겸 친구였던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게 부지휘자의 역할을 맡겼다. 얼마후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란너 오케스트라와는 별도로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떨어져 나갔다. 이를 두고 비엔나의 신문들은 슈트라우스 1세가 란너 오케스트라의 핵심 멤버들을 빼내어 나갔다고 주장하고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이 크게 반목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 증거로는 슈트라우스 1세가 분가하겠다고 하자 란너는 사업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이별의 왈츠’(Trennungs-Walzer)를 작곡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란너와 슈트라우스 1세는 비록 헤어졌지만 마음을 합하여 간혹 함께 연주회를 가진 일도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의 후원자였던 미하엘 파머가 병석에 눕자 그를 위한 자선연주회를 함께 연 것이다. 자선연주회는 ‘검은 사슴’(Zum Schwarzen Bock)이라는 여관에서 열렸다. 이곳은 슈트라우스 1세가 란너와 헤어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란너의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곳이기도 했다. 란너와 슈트라우스는 1836년 비엔나 시가 수여하는 자유상을 받았으며 두 사람이 함께 시민선서를 했다.
슈트라우스 1세가 란너 오케스트라에서 떨어져 나와 별도의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연주회를 갖기 시작하자 남에 대한 말하기를 좋아하는 비엔나 시민들은 은근히 두 사람이 경쟁하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비엔나 시민들은 란너 팬(Lannerianer)과 슈트라우스 팬(Straussianer)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한편, 당시 합스부르크 왕실은 시민들이 정치에 깊이 관여하여 인기가 없는 황제를 몰아내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처럼 공화제를 선호할것 같아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합스부르크는 시민들의 관심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음악과 유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란너와 슈트라우스 1세의 음악활동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다. 합스부르크는 란너에게 호프부르크 궁전 레도우텐홀(Redoutensäle)의 음악감독을 임명하였다. 란너의 임무는 귀족들을 위한 콘서트를 개최하는 것과 궁정오케스트라를 위한 새로운 무곡들을 쓰는 것이었다.
한편, 슈트라우스 1세는 란너가 호프부르크에서 귀족들을 위한 음악활동에 전념하는 동안 일반 시민들을 위한 콘서트에 보다 치중하였다. 따라서 슈트라우스 1세에 대한 인기는 날로 높아갔다. 슈트라우스 1세는 비엔나를 벗어나 외국에 가서도 콘서트를 갖고 싶었다. 슈트라우스 1세는 영국 공연을 결정했다. 하지만 란너는 혹시 영국 사람들이 비엔나의 왈츠를 좋아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으로 외국 공연을 주저하였다. 란너는 1843년 4월 14일 성금요일에 비엔나를 강타한 장질부사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란너의 죽음으로 슈트라우스 1세와의 선의의 라이벌 관계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후 슈트라우스 가문에 의한 반세기에 걸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란너에게는 아우구스트(August)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음악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슈트라우스 가문의 그늘에 가려 아무런 빛도 보지 못하였다. 란너의 딸 카타리나(Katharina)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발레리나가 되었다. 카타리나는 런던에서 살면서 영향력 있는 안무가 겸 발레 교사로서 활동했다. 란너는 10여곡의 왈츠와 랜들러를 작곡했다. 그중에서 아직도 비엔나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곡은 ‘페스터 왈츠’(Pesther Walzer), ‘궁정무도회 왈츠’(Hofballtänze Walzer), ‘청혼 왈츠’(Die Werber Walz), ‘로맨틱 왈츠’(Die Romantiker Walz) 등이다. 특히 ‘쇤브룬 왈츠’(Die Schönbrunner Walzer)는 1860년대 중반에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도나우 왈츠’가 나오기 전까지 가장 인기를 끌던 왈츠였다. 란너의 왈츠중 대부분은 귀족들에게 헌정된 것이다. 호프부르크 음악감독을 맡았기 때문에 귀족들과의 접촉이 많아서였다. 란너의 ‘슈티리아 댄스’(Steyrische Tänze)는 비엔나 필의 신년음악회에서 간혹 연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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