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Leopold Mozart(레오폴드 모차르트)

정준극 2009. 6. 10. 23:27

Leopold Mozart(레오폴드 모차르트)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의 풀 네임은 요한 게오르그 레오폴드 모차르트(Johann Georg Leopold Mozart: 1719-1787)이다. 보통 레오폴드라고 부른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모차르트의 아버지는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아우그스부르크(Augsburg)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출신이라기보다는 독일 출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는 바이올리니스트이면서 작곡가였다. 그가 남긴 작품은 의외로 많다. 하지만 아들 볼프강의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장난감교향곡(Cassation in G for Orchestra and Toys)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이 교향곡은 요제프 하이든이 작곡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작품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이밖에도 레오폴드의 교향곡, 트럼펫 협주곡 등은 아직까지도 연주회의 레퍼토리가 되고 있다. 레오폴드의 작품은 자연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사냥교향곡(Jagdsinfonie: Sinfonia da Caccia for 4 horns and string)에는 사냥개를 부르는 소리, 총소리가 들리는 작품이다. ‘농부들의 결혼’(Bauernhochzeit)라는 작품에서는 백파이프, 허디-거디(Hurdy-gurdy: 손잡이를 돌리는 오르간의 일종), 둘씨머(Dulcimer: 금속현을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악기), 채찍, 휘파람, 권총 쏘는 소리 등이 나온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의 고향인 독일 아우그스부르크의 성미하엘 조각

 

레오폴드의 아버지는 요한 게오르그 모차르트(Johann Georg Mozart: 1679-1736)로 책의 제본기술자였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할머니, 즉 레오폴드의 어머니는 안나 마리아 줄처(Anna Maria Sulzer: 1696-1766)로서 바바리아 여자였다. 레오폴드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러서 교회의 성가대원으로 활동했다. 레오폴드의 학력은 아우그스부르크 예수회학교를 거쳐 성살바토르 고등학교(김나지움)를 졸업하고 더 공부를 하기 위해 성살바토르 리체움(Lyceum)에 들어갔다. 리체움(라이세움)은 고등학교와 같지만 더 상급학교였다. 레오폴드는 아우그스부르크에서 학생일 때에 이미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 겸 오르가니스트였다. 그는 베이스로서 학교 오페라에 출연했다. 그는 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망원경과 현미경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다. 한미디로 재능이 많았다. 레오폴드의 아버지는 레오폴드를 성직자로 만들고 싶어 했다. 레오폴드는 신부가 되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너무 주장하므로 한번 공부나 해보자고 생각했다. 당시 레오폴드는 리체움의 성살바토르 학교를 1년 다니고 있었다. 그는 곧 학교를 그만두고 잘츠부르크로 가서 베네딕트 대학교에 등록했다. 레오폴드는 대학교에서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당시 잘츠부르크는 대주교가 관할하는 독립국가나 마찬가지였다. 레오폴드는 1737년 베네딕트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음악에 대한 관심은 끊어지지 않았다. 레오폴드는 여행을 다닐 때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생애를 잘츠부르크에서 보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가 지은 바이올린 교본의 표지 

 

레오폴드는 21세 때인 1740년부터 직업적인 음악가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그러면서 투른-발사씨나(Thurn-Valsassina) 백작의 시종 겸 비서역할도 했다. 이때에 그는 이미 작곡을 하였다. 1740년에 처음으로 출판한 작품은 Sonate sei da chiesa e da camera라는 소나타곡이었다. 레오폴드는 이 작품의 동판을 직접 각인하여 제작하였다. 이어 그는 독일 수난곡 칸타타 시리즈를 내놓았다. 1747년, 레오폴드는 안나 마리아 페르틀(Anna Maria Pertl)이라는 여자와 결혼했다. 자녀는 일곱 명을 낳았지만 그중에서 두 명만 살아남았다. 난네를(Nannerl)이라고 부르는 딸 마리아 안나 발부르가 이그나티아(Maria Anna Wallburga Ignatia)와 볼피(Wolfi)라는 애칭의 아들 볼프강 아마데우스(Wolfgang Amadeus)였다.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부인 안나 마리아 페르틀    딸 난네를 1763년경

 

레오폴드가 작곡가로서 성공한 사람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어떤 평론가는 성공했다고 말한다. 레오폴드의 작품들은 이미 1756년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럽 국가에서 잘 알려진 것이었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평론가는 레오폴드가 작곡가로서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음악교육자로서는 이름을 남겼다고 말했다. 레오폴드는 Versuch einer grundlichen Violoinschule(바이올린 기초학교 방문)라는 저서를 출판했따. 바이올린 연주의 교과서이다. 이 책자는 1756년 볼프강이 태어나던 해에 잘츠부르크에서 출판되어 독일에서 재판, 삼판이 되었고 화란어와 프랑스어로도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레오폴드는 자기의 두 자녀가 음악적으로 대단한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레오폴드는 일곱 살 된 딸 난네를에게 키보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겨우 걸음마를 하던 볼프강은 누나 난네를의 키보드 공부를 옆에서 보고 따라 하기 시작했다. 1762년, 여섯 살인 볼프강과 아홉 살인 난네를은 콘서트에 나가도 충분할만한 실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레오폴드는 난네를과 볼프강을 데리고 콘서트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아이들의 천재적인 재능은 레오폴드의 인생을 바꾸어 놓는 것이 되었다. 이제 레오폴드는 더 이상 다른 일은 하지 않고 오로지 아이들과 함께 연주회를 가짐으로서 삶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언젠가 레오폴드는 ‘볼프강이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난 것은 신의 기적’이라고 말했다. 때문에 그는 신의 섭리를 충실히 실행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볼프강을 위해 투입해야 한다고 믿었다. 레오폴드는 아이들과 함께 연주여행을 다니며 아이들을 보살펴 주기 위해 바이올린 연주도 줄이고 작곡에도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762년 이후에는 이미 작곡해 놓은 작품들을 수정하는 일만 했고 1771년 이후에는 전혀 작곡을 하지 않았다.

 

레오폴드 모차르트와 볼프강, 난네를의 연주

 

레오폴드와 자녀들은 1773년에 마지막 연주여행을 가졌다. 첫 연주여행을 떠난 것이 1762년이었으므로 10년 이상이나 연주여행을 다녔던 것이다. 물론 간간이 잘츠부르크의 집에 돌아와 휴식을 가지기도 했지만 볼프강을 앞장세운 연주여행은 모차르트 집안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1773년, 이탈리아로부터 돌아온 레오폴드는 이후 몇 년동안 볼프강의 직장을 구하느라고 노심초사했지만 별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볼프강의 어머니인 안나 마리아는 레오폴드와 볼프강이 직업을 구하기 위해 파리에 있을 때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는 지나칠 정도로 자녀들에게 집착하였다. 그는 난네를과 볼프강이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예를 들어서 레오폴드는 딸 난네를에게 혼처가 생기면 마땅치 않다고 하면서 여러번 거절했다. 결과, 난네를은 33세의 노처녀로서 겨우 결혼할수 있었다. 레오폴드는 아들 볼프강이 잘츠부르크에서 자리를 잡게 되기를 바랬다. 하지만 볼프강은 아버지의 뜻에 거슬려 비엔나에서 직장을 구하기 위해 1781년 비엔나로 무조건 떠났다. 레오폴드는 또한 볼프강이 비엔나로 간 이듬해인 1782년 콘스탄체 베버(Constanze Weber)와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프강은 콘스탄체와 결혼하였다. 결혼 이듬해인 1783년 여름, 볼프강과 콘스탄체는 잘츠부르크를 방문하였다. 마음 편한 방문이 아니었다.

 

레오폴드는 1784년부터 가족이 없이 혼자 살았다. 아내 안나 마리아는 거의 10년전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고 딸 난네를은 1784년 여름에 결혼하여 따로 나가 살게 되었고 아들 볼프강은 비엔나로 가서 결혼해서 살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난네를이 잘츠부르크에서 멀지 않은 산크트 길겐(St Gilgen)에서 살았기 때문에 한달에 한번 정도는 만날 수 있었다. 아들 볼프강을 간절히 생각하는 레오폴드는 1784년 비엔나의 아들을 찾아갔다. 그때 볼프강은 성공의 정상에 있었다. 연주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고 작곡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레오폴드는 만족했다. 더구나 레오폴드는 고명하신 요셉 하이든이 자기에게 볼프강에 대하여 직접 한없는 찬사의 말을 하자 그만 감격하지 않을수 없었다. 볼프강은 얼마전 하이든에게 현악4중주곡을 헌정한 일이 있다. 하이든은 레오폴드에게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말씀드리지만 당신의 아들 볼프강은 참으로 위대한 작곡가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1785년 여름, 난네를은 첫 아이를 낳기 위해 잘츠부르크에 왔다. 아들이었다. 레오폴드는 난네를이 일이 있어서 자기 집에 돌아가서 있을 때에 난네를의 아들, 즉 자기의 외손자를 자기 손으로 직접 키웠다. 레오폴드는 난네를의 아들을 1787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 데리고 살았다. 레오폴드는 1주일에 한번 이상씩 난네를에게 편지를 보내어 어린 손자가 어떻게 자라는지 자세히 보고하였다. 레오폴드의 편지는 ‘작은 레오폴드는 건강하다’(Klein Leopold is gesund)로서 시작하였다. 레오폴드는 외손자를 작은 레오폴드라고 불렀다. 아마 레오폴드는 난네를의 아들을 자기 집에서 키우면서 또 다른 신동을 교육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네를의 아들은 그다지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이제 레오폴드의 건강도 나빠지기 시작했다. 레오폴드는 1787년 4월에 심하게 앓았다. 그리고 5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의 죽음은 볼프강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볼프강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지는 않았다. 당시 비엔나에서 잘츠부르크까지의 여행은 며칠이나 걸리는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가지 않았다고 볼수 있다. 항간에서는 레오폴드와 볼프강의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서로 거리를 두고 살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모차르트 학자들의 한결같은 견해이다. 레오폴드는 자녀들을 대단히 아끼고 사랑했으며 볼프강과 난네를도 아버지 레오폴드를 존경하였다는 것이다.

 

잘츠부르크의 성세바스티안공동묘지에 있는 모차르트 가족묘지

왼쪽 자네트 베르흐톨트 폰 존넨부르크(난네를의 딸)의 묘비와 네노베파 베버는 (며느리 콘스탄체의 숙모)의 공동 묘비, 가운데 큰 묘비는 며느리 콘스탄체 모차르트 니쎈의 묘비, 오른쪽은 레오폴드 모차르트 및 유프로시나 베르틀(레오폴드의 장모) 공동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