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정준극 2009. 7. 1. 23:28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대본가

 

 

오페라 애호가들로서 휴고 폰 호프만슈탈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휴고 폰 호프만슈탈(1874-1929)은 여러편에 이르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의 대본을 작성한 인물이다. 그는 오페라 대본 이외에도 소설, 시, 수필, 연극작품 등을 쓴 재능있는 문인이었다. 호프만슈탈은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엔나에 있는 이탈리아 은행의 지점장이었다. 호프만슈탈의 이름에 귀족을 뜻하는 폰(von)이 들어간 것은 그의 증조부가 황제로부터 귀족의 타이틀을 받았기 때문에 그 명칭을 상속받아서였다. 유태인 상인이었던 그의 증조부의 원래 이름은 이삭 뢰브 호프만(Issak Loew Hofmann)이었으나 귀족의 타이틀을 받고나서는 이름을 에들러 폰 호프만슈탈(Edler von Hofmannsthal)로 바꾸었다. 호프만슈탈는 일찍부터 문학적 소질이 풍부하여 어린 시절에 이미 시와 희곡을 썼다. 그는 비엔나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나 1901년 졸업한 후부터는 문인으로서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여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호프만슈탈는 페터 알텐버그,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등과 함께 ‘융 빈’(Jung Wine: Young Vienna)의 멤버였다.

 

호프만슈탈는 아직도 대학생 때인 1900년 저 유명한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처음 만났다. 그로부터 두 사람은 친분을 맺고 지냈으며 호프만슈탈은 훗날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Elektra(엘렉트라: 1909), Der Rosenkavalier(장미의 기사: 1911), Ariadne auf Naxos(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1912), Die Frau ohne Schatten(그림자 없는 여인: 1919), De agyptische Helena(이집트의 헬렌: 1927), Arabella(아라벨라: 1933)의 대본을 썼다. 호프만슈탈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01년 게르트루트(Gertrud)라는 유태인 은행가의 딸과 결혼하였다. 게르트루트는 결혼하기 직전에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멀리 떨어진 로다운(Rodaun)이라는 도시에 정착했으며 그후 슬하에 세 자녀를 두었다. 1912년 호프만슈탈은 15세기 영국의 도덕적 희곡인 Everyman(에브리맨)을 Jedermann(예더만)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발간하였다. 핀란드의 유명한 작곡가인 얀 시벨리우스(Jan Sibelius)가 ‘예더만’의 극중음악을 작곡하였다. 연극 ‘예더만’은 잘츠부르크축제의 단골 메뉴가 되었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의 한 장면                             젊은 시절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1차대전 중에 호프만슈탈은 공무원으로 정부의 부서에서 일하였다. 그는 수상의 연설문을 썼으며 전쟁의 당위성에 대한 글,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글을 써서 신문이나 잡지에 기고하였다. 1차대전이 끝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와해되었다. 제국에 대하여 애국적이며 보수적 위치에 있던 호프만슈탈은 깊은 타격을 받았다. 그는 평생 동안 제국에 대한 연민과 애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후에 호프만슈탈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1920년, 호프만슈탈은 동료인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설립하였다. 호프만슈탈의 작품은 로마 가톨릭을 주제로 삼은 종교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장미의 기사’를 위해 썼던 오페라 대본을 영화 대본으로 고쳐서 썼다. 호프만슈탈의 대본에 의한 영화 ‘장미의 기사’는 로베르트 비네(Robert Wiene)의 감독으로 1925년 제작되었다. 1929년 7월, 그의 아들 프란츠가 자살을 했다. 프란츠는 자살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몰랐던 모양이다. 자살이란 자기만은 청렴하다고 떠들던 사람이 몰래 막대한 뇌물을 먹고 탄로되어 감방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자 모든 죄를 없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그러나 저러나 아들이 자살한지 이틀후 호프만슈탈도 심장마비로 로다운에서 세상을 떠났다. 호프만슈탈의 증손자로서 로돌프 폰 호프만슈탈(Rodolphoe von Hoffmannsthal)은 영국의 레이디 프란시스(Lady Frances)라는 귀족과 결혼하였다. 마가렛공주의 전 남편인 스노우던 경(Earl of Snowdon)이 재혼하여 낳은 딸이다.

 

호프만슈탈의 작품중 희곡은 다음과 같다.

- Der Tod und der Tod(죽음과 죽음: 1891)

- Der Tod des Tizian(티치안의 죽음: 1901)

- Elektra(엘렉트라: 1904)

- Ödipus und die Sphinx(외디푸스와 스핑크스: 1906)

- Die Frau im Fenster(창가의 여인: 1909)

- Jedermann(예더만: 누구든지: 1911)

- Der Schwierige(말없는 여인: 1921)

- Das Salzburger grosse Welttheater(잘츠부르크대극장: 1922)

- Der Turm(탑: 1925)

 

비엔나의 23구 리징의 칼크스부르크 공동묘지에 있는 휴고 폰 호프만슈탈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