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명인들/시인과 작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정준극 2009. 7. 3. 06:23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20세기의 위대한 픽션 작가

 

 

카프카를 오스트리아 작가로 보는 데에는 이견이 있다. 체코공화국 출신의 작가가 정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한 보헤미아에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제국의 작가라고 볼수도 있다. 카프카는 1883년 보헤미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중산층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오늘날 그의 작품은 서구문학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Der Process(심판: 1925), Das Schloss(성: 1926), Amerika(아메리카: Der Verschollene: 1927)이며 이밖에도 In der Strafkolonie(유형지에서: 1914), Die Verwandlung(The Metamorphosis: 변신: 1912)라는 저서가 있다. 카프카의 사상과 작품 세계에 대하여는 감히 논설하기가 어려우므로 대체로 생략키로 하고 생애에 대하여만 잠시 일고코자 한다.

 

카프카의 할아버지는 보헤미아 남부 유태인 마을인 오세크(Osek)에서 코셔 짐승을 도살하던 사람이었다. 유태인 사회에서 제사용 짐승을 도살하는 직업은 존경을 받는 것이었다. 카프카의 아버지인 허만 카프카(Hermann Kafka)는 ‘덩치가 크고 이기적이며 거만하기까지 한 기업가’였다. 원래 카프카의 아버지는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장사꾼이었다. 그러다가 돈을 벌어 오세크 마을에 커다란 상점을 차리고 옷과 장신구와 같은 양품을 팔았다. 장사는 번창하여서 점원을 15명이나 둘 정도였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상점의 로고(Logo)로 갈가마귀를 사용하였다. 체코어의 카프카(Kavka)는 갈가마귀이기 때문이었다. 카프카의 어머니 율리(Julie)는 부유한 유태인 양조업자의 딸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공부를 많이 하여 어린 카프카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카프카는 6형제중의 장남이었다. 남동생들인 게오르그는 태어난후 15개월만에 죽었고 하인리히 불과 6개월만에 죽었다. 그러나 여자 동생들인 가브리엘레(일리), 발레리(발리), 오틸레(오틀라)는 모두 비교적 오래 살았지만 나치의 유태인 청소정책 때문에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였다. 어린 카프카와 동생들은 어머니가 상점에 나가서 하루에 12시간 이상씩 일하는 바람에 주로 집에서 가정교사와 하인들에 의해 양육되었다. 어린 카프카와 아버지 허만과의 관계는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았다. 카프카는 나중에 발간된 어떤 책에서 자기는 아버지로부터 감성적으로 학대를 받았다고 불만을 털어 놓은 것을 보면 알수 있다.

 

프라하의 킨스키 궁전. 카프카가 다녔던 고등학교(김나지움)가 있던 건물이며 나중에 카프카의 아버지가 한 부분에서 상점을 경영한 건물이다.

 

카프카의 누이동생들은 모두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엘리는 전쟁 중인 1941년에, 발리는 이듬해인 1942년에, 막내 여동생 오틀라는 1943년에 죽임을 당했다. 엘리와 발리는 로드즈 게토(Lodz Ghetto)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오틀라는 악명 높은 테레지엔슈타트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이어 1943년 10월 7일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도착하자마자 가스실에서 1267명의 어린이와 여자어른 51명과 함께 생을 마감하였다.

 

카프카는 어릴 때부터 독일어를 사용하였으며 나중에는 체코어도 아무런 문제없이 사용하였다. 그는 프랑스어도 배웠는데 플로베르(Flaubert)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였다. 카프카는 성년이 되는 13세까지 유태교육을 받았지만 그 후에는 1년에 겨우 네 번만 아버지와 함께 유태교 회당에 다녔을 뿐이었다. 카프카는 유태교 회당에 다니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고 한다. 카프카는 고향에서 독일어 초등학교를 거쳐 독일어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1901년 프라하의 샤를르-페르디낭대학교(Charles-Ferdinand University)에 입학하여 처음에는 화학을 공부하려다가 잠시 후에 법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카프카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자연히 독일역사와 독일문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칠 즈음에 그는 막스 브로드(Max Brod)와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카프카는 1906년 법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모든 법대 졸업생이 그랬던 것처럼 의무적으로 1년동안 민사 및 형사 재판소의 서기로 일했다. 의무봉사가 끝난후에는 이탈리아보험회사에서 1년동안 직장생활을 했다. 그러나 아침 6시에 출근하여 저녁 8시까지 근무해야 하는 힘든 직장이어서 도저히 글을 쓸 여유가 없으므로 1년후에 그만두었다. 얼마후 그는 보헤미아왕국의 보험사고연구소에서 일할수 있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만족해했지만 카프카는 별로 만족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프카는 매우 근면하고 능력 있는 직원이었다. 그는 연차보고서를 만드는 책임을 맡았다. 그는 자기가 만든 연차보고서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그래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도 보험연구소의 연차보고서를 나누어주며 자랑했다.

 

다섯살 때의 프란츠 카프카 

 

카프카는 보험연구소에 다니면서 시간을 내어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카프카는 친구인 막스 브로드와 펠릭스 벨츄(Felix Weltsch)와 함께 자기들을 스스로 ‘Der enge Prager Kreis'(친밀한 프라하 서클)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실상 1880년대부터 1차대전이 끝나는 기간까지 프라하에서 활동한 유태계 독일인 그룹의 일부라고 볼수 있다. 프라하의 유태계 독일인문인들은 문학적으로 불모인 보헤미아의 땅에 비료를 뿌려준 인물들이었다. 1911년 여동생 엘리의 남편인 칼 허만(Karl Hermann)이 카프카에게 석면(아스베스토)공장을 함께 운영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리하여 허만프라하석면회사가 설립되었다. 카프카는 처음에 회사 일에 흥미를 가지고 열중했다. 그러면서 이디쉬(Yiddish)극장의 공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디쉬는 동구 유태인들이 사용하는 독일어와 히브리어의 혼성어를 말한다. 친구인 막스 브로드는 ‘왜 그런데 관심을 갖느냐’면서 걱정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유태인들의 문학에 대하여 관심을 버리지 못하였다. 훗날 카프카가 유태주의(Judaism)에 관심을 갖게 된 연유가 되었다.

 

프라하 시내의 카프카 기념상

 

1912년 카프카는 친구 막스 브로드의 집에서 펠리체 바우어(Felice Bauer)라는 여인을 만났다. 펠리체는 베를린에 살았지만 속기용구술녹음기(딕타폰)회사의 업무 때문에 프라하에 자주 왔었다. 카프카와 펠리체는 5년동안 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제했다. 두 사람은 결혼을 약속하고 약혼까지 했다. 그러나 여러 사유로 1917년 두 사람의 관계는 막을 내렸다. 그해에 카프카는 폐병으로 고생하기 시작했다. 카프카는 요양을 위해 식구들과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막내 여동생인 오틀라가 특별히 정성을 들여 간호했다. 카프카는 식구들의 보살핌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카프카는 언제 병이 재발될지 몰라 걱정 속에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식구들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처럼 느꼈다. 그런 걱정이 그를 ‘사람기피증’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그의 소년과 같은 모습, 깔끔한 외모, 비교적 차분하고 냉정한 자세, 지성적인 대화, 간혹 산뜻한 유머로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었다.

 

   

소설 '성'(Das Schloss) 초판 책자 표지                     소설 '심판'(Der Prozess) 표지

 

1912년 카프카는 체코 저널리스트이며 작가인 밀레나 예센스카(Milena Jesenska)와 깊은 친분을 유지했지만 그것도 얼마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는 1923년 발트해 연안의 어느 여름휴가지에서 도라 디아만트(Dora Diamant)라는 베를린의 유치원선생을 만났다. 그 즈음에 카프카는 되도록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싶어 했다. 카프카는 디아만트와 함께 베를린으로 가서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25세의 디아만트는 정통 유태인 가정 출신이었다. 디아만트는 스스로 독립하여 생활할수 있다고 믿어서 게토를 떠나베를린으로 와서 유치원선생이 된 여인이었다. 디아만트는 카프카의 연인이 되었고 카프카가 탈무드에 대하여 흥미를 갖도록 만들었다.

 

막스 브로드가 출판한 카프카 선집 표지

 

일반적으로 카프카 평생을 통하여 사회불안감과 병적일 정도의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편두통, 불면증, 변비, 종기로도 시달림을 받았다. 참 대단하다. 게다가 유태인이라는 스트레스, 자기의 일에 대한 긴장감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카프카는 자연요법으로 병세들을 다스리고자 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러던중 폐렴이 악화되었다. 그는 베를린에서 프라하로 돌아왔다가 비엔나 부근의 키얼링(Kierling)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당시 유명한 호프만박사의 정신병원에 입원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1924년 6월 3일 병마와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망원인은 굶주림이었다. 카프카는 폐렴과 함께 목에 이상이 있어서 음식물을 삼키는데 대단한 고통을 겪었다. 당시에는 입을 통하지 않고 직접 장으로 음식물을 투여하는 이른바 장관외(비경구) 기술이 개발되지 않았었다. 그가 음식물을 섭취할 방법은 없었다. 카프카의 시신은 프라하로 옮겨져 1924년 6월 11일 프라하-치츠코프(Prague-Zizkov)에 있는 신유태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카프카의 마지막 연인인 도라 디아만트의 신비스런 사랑을 그린 캐티 디아만트(Kathie Diamant)의 저서 '카프카의 마지막 사랑(Le dernier amour de Kafka: La Vie De Dora Diamant)의 표지. 캐티 디아만트는 미국 작가로서 현재 산 디에고 주립대학교 교수로 재직중. 가운데 사진은 도라 디아만트와 그의 딸 프란치스카 마리안느 라스크(1938년 베를린에서). 오른편 사진은 카프카의 딸 마리안느 라스크(1958년)

 

카프카는 다른 정통 유태인들처럼 종교에 빠져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유태 문화와 정신세계에 대하여는 깊은 관심을 가졌다. 카프카는 어느 누구보다도 이디쉬 문학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이디쉬 연극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일기를 보면 이디쉬 작가들의 글을 참조하는 내용으로 꽉차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는 동유럽 유태인들이 정신적으로 유태교의 생활에 집착하고 있는데 대하여 매력을 느꼈다. 그는 서유럽 유태인의 생활에서는 그런 면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디쉬 문학에 심취하였고 동유럽의 유태인 생활에 대하여도 매혹당하였지만 유태주의 또는 유태인의 사회에서 이방인과 같았다. 그는 항상 ‘내가 다른 유태인들과 같은 점이 무엇인가? 나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쪽 구석에 그저 조용히 서 있어야 한다. 나는 숨쉴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한편, 카프카는 한때 연인이었던 펠리체 바우어와 함께 팔레스타인에 가서 살 생각까지 했었다. 그러나 바우어와의 관계가 끝나자 그후에 연인이 된 도라 디아만트와 이스라엘에 가서 살 계획을 세웠다. 그는 베를린에 머물 때에 히브리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집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온 학생을 고용하여 함께 살면서 히브리어를 배웠다. 하지만 웬일인지 히브리어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막스 브로드(체코 표기로는 Maxe Broda)

 

카프카의 작품은 평소에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생전에 몇편의 단편만을 발간했을 뿐이며 소설은 거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만, ‘변신’을 단편소설로 본다면 그것이 생전에 발간된 유일한 소설이다. 카프카는 죽기 전에 가장 친한 친구인 막스 브로드에게 유언장을 남겼다. ‘나의 친구 막스, 마지막 부탁이 있네. 내가 남기고 가는 모든 것을, 일기장이든, 원고뭉치든, 편지이든, 무엇이든지 불태워서 없애주게. 다른 사람들이 읽을 필요가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네.’라고 썼다. 브로드는 카프카의 소망을 들어주지 않았다. 브로드는 카프카가 자기에게만 이런 특별한 부탁을 했던 것은 자기가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랬다고 믿었다. 훗날 브로드는 그가 간직하고 있던 카프카의 작품을 출판하는 일을 책임 맡았다. 카프카의 연인이었던 도라 디아만트도 카프카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디아만트는 카프카가 남긴 20권에 이르는 비망록과 35통의 편지를 몰래 간직하고 있었으나 1933년 나치에게 모두 압수당했다. 현재 카프카의 잃어버린 원고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국제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대부분 카프카의 작품은 미완성이라고 할수 있다. ‘성’(城)은 문장이 중간에서 끊어진 부분들이 있으며 내용이 모호한 부분도 있었다. ‘심판’은 번호가 매겨져 있지 않았으며 어떤 부분은 미완성이었다. ‘아메리카’의 원래 타이틀은 ‘사라진 사람’(The Man who Disappeared)이었으나 친구 브로드가 출판하면서 제목을 바꾸었다. 브로드는 편의상 책의 순서를 바꾸기도 했고 독일어 표현을 가다듬기도 했으며 구두점과 같은 부호를 정리하였다. 일반적으로 브로드가 수정한 원고를 오리지널로 간주하고 있다.

 

오늘날 문학평론가들은 카프카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여러 유형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예를 들면 현대주의(Modernism), 신비적 사실주의(Magical Realism) 등이라는 것이다. 한편, 카프카가 보여준 절망과 낙심은 상징적 현실주의(Existentialism)라고 보고 있다. 어떤 평론가들은 In the Penal Colony, The Trial, The Castle에서 맑시스트의 영향을 볼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관료주의적인 것을 풍자하는 내용 때문이다. 또한 카프카의 작품에는 신(神)에 대한 형이상학적 탐색이 비유로 표현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 토마스 만(Thomas Mann)은 이같은 이론의 주창자였다.

 

카프카의 묘소. 아버지 허만, 어머니 율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