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방랑하는 유태인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

정준극 2009. 11. 21. 16:38

방랑하는 유태인 -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님을 조롱하던 자

The Wandering Jew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작품 '방랑하는 유태인'. 그는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 그리스도를 조롱한 유태인이라고 한다. 직업은 로마총독 빌라도 저택의 문지기라는 설이 있다.

 

‘방랑하는 네덜란드인’(The Flying Dutchman)은 바그너가 작곡한 유명한 오페라여서 잘 알려져 있지만 ‘방랑하는 유태인’이라는 타이틀은 생소하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중세 때부터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전설이 심심찮게 나돌았고 특히 13세기에는 널리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전설은 20세기에 들어서서도 끊이지 않고 등장하여 세계 각국에서 시, 소설, 연극, 영화 등으로 계속 모습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요셉 로트(Jospeh Roth)의 소설 '방랑하는 유태인'은 전후 대단한 관심을 끈 작품이다. 프로멘탈 알레비(Frommental Halevy)의 오페라 '유태여인'(La Juive)은 공연예술 속의 '방랑하는 유태인'을 다룬 것이다. ‘방랑하는 유태인’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던 예수를 조롱하고 비웃었던 어떤 유태인을 말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경솔한 유태인이었다. 그 유태인은 예수를 조롱하였기 때문에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세상을 한없이 방황하며 살아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


지나가던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하였다.


그 유태인이 예수를 어떻게 조롱하였는지에 대한 내용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로 예수께서 무거운 십자가 때문에 제대로 걸음을 옮기지 못하자 ‘왜 게으름을 피느냐?’면서 조롱하였다고 한다. 그 유태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내용도 차이가 있다. 어떤 나라에서는 신발장이로 나오며 다른 나라에서는 장사꾼으로 나온다. 그런가하면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Pontius Pilate) 저택의 문지기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가하면, 예수께서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매달려 있을 때에 이곳을 지나가던 유태인들 몇명이 예수를 조롱한 일이 있다. 그 사실은 신약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27장 39-40에 보면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며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기를 '그나 남은 구원하였으나 자기는 구월할 수 없다'라고 했다. (마가복음 15: 31). 이들은 모두 유태인들이었고 훗날 방랑하는 유태인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안토니오 시세리(Antonio Ciseri) 작품.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의 아내는 예수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 빌라도 집의 문지기가 '방랑하는 유태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유태인들의 나라는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유태인들은 이스라엘보다는 다른 나라에 더 많이 살고 있다. 세계 곳곳에 유태인들이 살지 않는 나라가 없을 정도이다. 유태민족은 기원전부터 나라를 잃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져 살았다. 역사적으로는 이스라엘민족(유태인)이 바빌론(현재의 이락 일대에 있었던 제국)에 포로로 잡혀간 이후부터 나라를 잃고 각지에 흩어져 살기 시작했다. 어떤 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것이 '방랑하는 유태인'의 시초라고 보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해당이 안된다는 설명도 있다. 아무튼 유태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이 '방랑하는 유태인'의 시초라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유태민족들이 다른 나라로 흩어져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을 디아스포라(Diaspor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흩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하여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은 현지인으로부터 ‘왜 남의 나라에 와서 사느냐?’며 구박과 멸시도 많이 받았다. 유태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었으며 자녀들이 나중에 사회에서 천대받지 않고 살수 있도록 죽어라고 공부를 시켰다. 그 결과 유태인들은 각국의 경제에서 무시 못 할 존재가 되었으며 사회적으로도 훌륭한 문화예술인, 과학자, 변호사, 의사, 교수 등을 배출하여 그나마 덜 구박을 받고 살았다. 지금까지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민족이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유태인들이 경제에 영향을 끼치고 사회적으로도 크게 활동하게 되자 시기하고 질투하는 백성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히틀러의 나치가 대표적이었다. 히틀러의 나치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태인 6백만 명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저주 때문에 박해를 받았다고 생각했다.

 

로마 '티도의 문'(Arch of Titus)에 있는 부조. 로마가 유태인을 노예로 잡아 왔고 유태교의 제물을 약탈해 온 장면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전설의 오리진에 대하여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창세기(Genesis)까지 들먹이는 사람들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은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의 당부 사항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여서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였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 창세기 3:16-19에 기록된 저주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 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결국 아담과 이브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것들을 먹고 편안하게 살수 있었는데 하나님의 지시사항을 어겨서 추방당하게 되었고 평생을 방랑하며 힘들게 일해서 먹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의 국적에 대하여는 논란이 심심찮다. 에덴동산이 이란에 있었다면 아담과 이브를 이란인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만일 에덴동산에 터키에 있었다면 아담과 이브는 터키인이라고 할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연고권을 따지고 나오면 이스라엘 국적이라고 말 할수 있다. '그때는 국적을 따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는 아담과 이브. 이들은 최초의 '방랑하는 유태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피터 폴 루벤스 작.

   

아담과 이브가 받은 저주를 근거로 하여 예수께서 다시 강조하여 말씀하신 내용이 있다. 마태복음 16:28 이다. 중세 기독교의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전설은 바로 예수의 이 말씀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록하였으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이다. 다시 말하여 예수를 따라 다니던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재림의 광경을 보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 사람은 누군가? 성경에는 누구라고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예수가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20-23 에 기록되어 있다.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 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아담과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고 있다. 천사(그룹: 케럽)들이 칼을 들고 에덴 동산의 문을 지키고 있다.

 

성경의 문장이 구식으로 되어 있어서 얼른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간단히 말하면 예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제자(요한이라고 함)는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초대기독교 신자들은 예수께서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늦어도 2-3년 안에는 다시 오실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예수가 다시 오실 때까지 몇 년 동안 더 산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수는 없었다. 그러나 2-3년이 아니라 10년이 지나도 예수께서 약속하신대로 다시 오시지 않자 상당수의 사람들은 기왕에 기다리는 마당에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며 끈질기게 기다리기로 했으나 어떤 이들은 은근히 원망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요한이 죽지 않고 무드셀라처럼 오래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요한은 오늘날 터키의 에베소 인근에 가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요한은 오늘날 그리스 영토인 파트모스(Patmos: 밧모)섬에 살면서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아 유명한 요한계시록을 썼다. 요한의 무덤은 에베소 인근의 작은 마을인 셀추크(Selcuk)에 있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요한이 아주 오래 살았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성화에서는 요한을 백발이 성성한 노인으로 그리고 있다.

                     

터키의 에베소 인근에 있는 사도 요한의 무덤

 

요한이 재림에 대한 계시를 받은 것을 재림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신학적으로 해석할 일이지 함부로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대로 예수께서 '요한이 오래 살던 말던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을 진심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갑자기 요한에 대한 얘기가 장황하게 나온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하지만 얘기의 초점은 요한이야말로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지낸 바로 그 ‘방랑하는 유태인’이 아니겠느냐는 생각 때문이다. 아무튼 예수의 열두제자 중에서 요한이 가장 오래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갈 때 조롱했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느니 하는 얘기는 그야말로 ‘전설 따라 삼천리’이며 요한이 오래 살았다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Second Coming) 장면. 과연 언제 오신다는 것인가?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 방랑하는 유태인에 대한 저주도 막을 내린다고 한다.

'오스트리아와 유태인 > 방랑하는 유태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많은 문학작품의 소재  (0) 2009.11.21
아리마대의 요셉?  (0) 2009.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