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팔라비 왕실의 세 여인

슬픔의 소라야 왕비

정준극 2010. 1. 2. 12:03

슬픔의 소라야 왕비

사랑하지만 헤어져야 했던 석녀의 비애

후계자를 생산하지 못하여 이혼

 

소라야왕비. 1956년.

 

[세기의 결혼식]

1951년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이 원수의 북한 공산당이 남침하는 바람에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해 1월 느닷없이 모택동에 의한 중공군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혹한의 겨울에 비참한 1.4 후퇴를 해야 했다. 바로 그러한 싯점에 지구의 한쪽인 중동의 이란(페르시아)에서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란 왕인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 아름다운 신부 소라야의 결혼식이었다. 결혼식은 2월 12일 테헤란의 역사적인 골레스탄(Golestan) 궁전에서 거행되었다. 결혼식장은 난초, 튤립, 카네이션으로 장식되었다. 이날 사용된 꽃만 해도 1.5톤에 이른다고 했다. 그야말로 꽃의 궁전이었다. 모두 네덜란드에서 공수해온 것이다. 결혼식의 여흥을 위해서는 로마의 곡마단이 초청되었다. 신부인 소라야는 은사(銀絲)로 짜고 진주로 누빈 드레스를 입었다. 드레스의 가장자리는 아프리카 무수리(marabou stork: 황새의 한 종류)의 깃털로 장식하였다. 세계적인 패션 디아이너인 프랑스의 크리스챤 디오르가 이날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드레스였다. 어찌나 화려한 드레스였던지 보는 사람들은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소라야는 드레스 위에 하얀 밍크 만토를 걸쳤다.

 

테레한의 골레스탄 궁전의 일부. 이곳에서 팔라비 왕과 소라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팔라비 왕은 결혼식에서 축의금을 받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정히 축하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가난한 이란 백성들을 위해 특별 자선금으로 기부할 것을 당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귀한 선물이 답지하였다. 예를 들어 소련의 요셉 스탈린은 밍크코트, 그리고 검은 다이아몬드가 박힌 데스크 세트를 선물로 보냈으며 미국의 해리 트루만 대통령 부부는 유명한 디자이너인 시드니 워흐(Sydney Waugh)가 제작한 그릇 세트를 보냈다. 영국의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왕비는 조지왕조풍의 은제 촛대를 선물로 보냈으며 이밖에도 수많은 국가 원수들이 결혼 예물을 보냈다. 이날 초청된 하객은 2천명이었다. 세계 각국의 왕족들과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국제연맹초대 의장을 지낸 시아파 무슬림의 이맘(Imam)인 아가 칸 3세(Aga Khan III: 1877-1957)도 하객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날은 이란의 국경일이었다. 거리마다 이란제국의 깃발이 휘날렸고 팔라비 국왕과 소라야 왕비의 초상화가 높이 설치되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날인 2월 12일에는 테헤란에 많은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길조라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사람들은 소라야 왕비를 신데렐라라고 부르며 부러워했다.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 소라야의 결혼식. 가운을 보시라! 1951년. 우리나라는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쟁 중이었다.

 

[운명적인 이혼]

행복하게만 보이던 이란 왕실의 세기적인 결혼은 7년 후 파탄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왕비 소라야가 아기를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소라야는 불임을 치료하기 위해 그동안 무던히도 애를 썼다. 스위스와 프랑스의 명의들을 찾아다니며 돈은 아무리 들어도 좋으니 임신할수 있게 해 달라고 매달렸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험관 아기는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다. 세월이 점점 흐르자 왕실과 정부는 샤 레자 팔라비 왕에게 다른 부인을 얻어 후사를 잇도록 권고했다. 소라야 왕비는 남편인 샤 레자 팔라비를 극진히 사랑하였고 샤 레자 팔라비도 아내인 소라야 왕비를 극진히 사랑하였다. 하지만 후사를 잇지 못하면 팔라비 왕조의 대가 끊어지게 되므로 그것이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샤 레자 팔라비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사랑하는 아내를 버린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기를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번민의 밤은 깊어만 갔다. 이제 용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었다. 마침내 소라야 왕비가 마음을 굳혔다. 남편의 곁을 영원히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소라야 왕비는 1958년 2월, 결혼식을 올린지 꼭 7년 만에 테헤란왕궁의 문을 빠져 나와 독일로 향하였다. 독일의 쾰른에는 소라야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있었다.

 

샤 레자 팔라비 왕은 며칠 후에 소라야의 삼촌인 사르다르 아싸드 바크티아리(Sardar Assad Bakhtiari)를 급히 쾰른으로 보내어 왕비를 설득하여 데려오도록 당부했다. 소라야의 삼촌인 사르다르 아싸드는 이란정부의 명망 있는 인사로서 이란이 입헌군주국이 될 때에 헌법을 기초한 인물이었다. 결론적으로 사르다르 아싸드는 소라야를 설득하는데 실패하였다. 소라야는 남편 샤 레자 팔라비 왕이 왕조의 후사를 위해 새로운 여인과 결혼하는 것이 도리라고 주장했다. 다음 달인 3월, 샤 레자 팔라비 왕의 자문위원들은 후사를 위해 7년이나 기다려왔음을 상기하고 설령 소라야 왕비가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이제는 회임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므로 이혼하고 새로운 왕비를 맞아 들여야 한다고 정식으로 주청했다. 자문원들과의 회의가 열린지 나흘 후, 왕궁에서는 왕과 왕비가 이혼할 것이라는 공식 발표가 있었다. 독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당시 25세의 소라야 왕비는 ‘나의 행복이 희생되더라도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어쩔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떨구었다고 한다. 소라야는 사랑하는 남편과의 이혼을 운명으로 알고 순순히 받아 들였다. 소라야는 식음을 전폐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은채 며칠을 지냈다. 그로부터 며칠후인 3월 21일은 이슬람력에 의한 이란의 신년 초하루였다. 샤 레자 팔라비 왕이 백성들에게 공식적으로 이혼을 발표하는 날이었다. 샤 레자 팔라비 왕은 흐느끼면서 전국에 중계된 라디오 및 TV 방송을 통해 나라와 국민들을 위해 소라야 왕비와 이혼키로 결정하였음을 발표했다. 국민들은 그러한 왕의 심경을 충분히 헤아리며 제국을 위해 새로운 왕비를 맞아 들이지 않을수 없는 처지를 크게 동정했다.

 

상당수 국민들은 아름답고 지성적인 소라야 왕비에 대하여 한없는 연민의 정을 느끼고 동정했다. 어떤 여성은 ‘아니, 아들이 뭐 길래 이혼까지 해야 한단 말인가?’라면서 남아 선호 사상에 대하여 분을 참지 못하는 듯했다. 샤 레자 팔라비 왕은 방송 발표를 통해 재혼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백성들은 혹시나 소라야와 재결합하는 것이 아닌지 하는 한가닥 희망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백성들은 인샬라(Inshallah: 알라신의 뜻에 따라)라고만 조용히 읊조렸을 뿐이었다. 샤 레자 팔라비 왕과 소라야 왕비의 이혼 소식은 전세계의 중요 뉴스가 되었다. 프랑스의 대중가요 작곡가인 프랑수아 마예-조리스(Francois Mallet-Jorris)는 Je veux pleurer comme Soraya(소라야처럼 흐느껴 울겠네)라는 노래를 만들었다. 전유럽에서 대유행이었다.

 

영화 '여인의 세 얼굴'을 홍보하기 위한 포스터

 

이혼이 성립된지 얼마후 어떤 기자가 샤 레자 팔라비 왕을 만나 이혼 후의 심경이 어떠하냐고 물어보았다. 샤 레자 팔라비 왕은 ‘그 누구도 나보다 더 긴 횃불을 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자세히 분석하면 ‘어찌하여 나만이 긴 횃불을 들고 다녀야 하는가?’라는 푸념으로 볼수 있다. 즉, 후사를 잇기 위해 이혼을 하였으니 곧 재혼을 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당시 샤 레자 팔라비 왕은 이탈리아에서 폐위된 움베르토 2세의 딸인 사보이의 마리아 가브리엘라(Maria Gabriella) 공주에게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자 바티칸 신문인 L'Osservatore Romano는 ‘무슬림 군주와 가톨릭 공주’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두 사람이 결혼한다면 이는 ‘중대한 위기’가 될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탈리아 공주와의 결혼설은 그야말로 유야무야되었다.

 

 

이혼직후의 소라야 왕비 모습. 어딘가 우수에 넘친 모습. 오른쪽은 샤 팔라비와 혼담이 있었던 이탈리아 움베르트 2세의 딸인 마리아 가브리엘라 공주.

 

[샤 레자 팔라비 왕과의 만남]

여기에서 소라야 왕비와 샤 레자 팔라비 왕이 어떻게 알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 간단히 알아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소라야의 풀 네임은 소라야 에스판디아리-바크티아리(Soraya Esfandiary-Bakhtiari)이다. 1932년 6월 22일 테헤란 남부의 고도(古都) 이스파한에서 태어났다. 소라야는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명문 귀족인 바크티아리 가문의 규수였다. 아버지는 칼릴 에스판디아리(Khalil Esfandiary)로서 1950년대에 독일주재 이란대사를 역임한 직업 외교관이었다. 어머니 에바 칼(Eva Karl)은 이름에서 볼수 있듯이 독일계통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났으며 전쟁후 다시 독일에 와서 지낼 때에 아버지 칼릴을 만나 결혼하였다. 소라야는 이들의 큰 딸이며 그 아래로 남동생 비잔(Bijan)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라야의 삼촌인 사르다르 아싸드는 정치가로서 20세기 초 이란 헌정운동의 지도자였다.

 

소라야는 스위스의 기숙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소라야는 1948년 여름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잠시 파리를 방문하였다. 그때 소라야의 친척인 자파르 바크티아리라는 사람이 마침 파리를 방문한 샤 레자 팔라비 왕을 소라야에게 소개하였다. 당시 샤 레자 팔라비 왕은 이집트의 화우지아 공주와 결혼하였다가 이혼한 상태였다. 소라야가 파리에서 샤 레자 팔라비 왕을 만났을 때 소라야는 겨우 16세였다. 샤 레자 팔라비 왕은 소라야의 아름다움과 지성을 높이 인정하여 청혼하였다. 두 사람은 며칠후 약혼하였다. 약혼 때에 샤 레자 팔라비 왕은 소라야에게 22.37 카라트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다. 약혼한지 3년 후인 1951년 2월 테헤란에서 두 사람의 세기적인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1965년도 영화 '여인의 세 얼굴'(I tre volti)의 한장면. 상대역은 알베르토 소르디.

 

[영화배우로 진출]

소라야는 이혼한후 먹고 살 것이야 충분하지만 그렇다고 밤낮 먹기나 하고 잠만 잘수는 없는 문제이므로 무슨 일이든지 하고자 했다. 소라야는 전부터 관심이 있었던 영화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주위에서는 소라야 정도의 미모이면 잉그릿드 버그만과도 경쟁할수 있다고 하면서 격려하였다. 소라야는 영화배우로 데뷔하면서 풀 네임을 사용하지 않고 소라야라는 이름만 사용했다. 처음 맡은 역할은 제정러시아의 ‘캐서린 대제’에서 타이틀 롤이었다. 소라야가 캐서린 대제의 역할을 맡는다는 뉴스가 나가자 세계는 다시 한번 소라야의 이름을 상기하며 주목하였다. 하지만 영화 ‘캐서린 대제’는 제작상의 어려움이 있어서 불발되었다. 대신에 소라야는 1965년에 I tre volti(세개의 얼굴)에 출연하였다. 그때 감독인 프랑코 인도비나(Franco Indovina: 1932-1972)와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렇다고 동거하며 난리를 치는 로맨스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소라야는 안드레아 우르술라가 주연을 맡은 She(그녀)에서 소라야라는 이름의 역할을 맡기도 했다. 1972년 자기를 인정해 주던 영화감독 인도비나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소라야는 영화배우고 무어고 만사 일장춘몽이라고 생각하여 여생을 파리와 독일 등지에서 지냈다.

 

뮌헨 서부공동묘지에 있는 바크티아리 가족 묘지의 소라야 합동 묘비

 

[뜻하지 아니한 죽음]

소라야 왕비는 2001년 10월 26일 파리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향년 69세였다. 사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식은 열흘 후인 11월 6일 파리의 미국인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이란 왕실에서는 왕자들을 조문객으로 보내 위로하였다. 소라야의 시신은 뮌헨으로 옮겨져 베스트프리드호프(서부공동묘지: Westfriedhof)에 안장되었다. 그의 부모가 안장되어 있는 곳이며 나중에 소라야의 남동생도 묻힌 곳이다. 소라야의 남동생인 바진은 소라야가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지 1주일 후에 역시 파리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바진은 소라야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아, 나는 이제 누구와 얘기를 나눈단 말인가?’라면서 애석해 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후 소라야의 장례식이 공식적으로 거행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쓸데없는 에피소드들]

소라야가 세상을 떠난 이후 몇몇 여자들이 나타나서 자기가 소라야의 딸(사생아)이라고 주장했다. 그 중 한 여자는 자기가 1962년에 태어났으며 어머니인 소라야 왕비가 준 보석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보석을 어디 한번 보자고 하니까 도둑맞았다고 말했다. 도대체 그렇게도 아기를 낳지 못하던 석녀 소라야가 어떻게 하여 딸을 둘수 있다는 말인가? 여자들은 소라야가 남긴 재산이 탐이 나서 무턱대고 딸이라고 주장했던 것 같았다. 소라야가 낳았다고 하는 자녀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당시 세계적 뉴스였다. 하지만 아무도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한편, 2001년에 어떤 신문은 소라야와 그의 남동생 바진이 모두 이란 당국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란은 혁명으로 정권을 바꾼 이후 샤 레자 팔라비 왕조의 사람들을 모두 제거코자 기도한 일이 있다. 이와 함께 팔라비 왕족들이 가지고 떠난 재산들을 회수코자 했다.

 

소라야의 유산은 파리에서 경매에 붙여졌다. 모두 830만불 정도가 되었다. 결혼식때 입었던 유명한 디오르의 드레스는 1백20만불에 팔렸다. 소라야는 두 권의 비망록을 썼다. 첫 번째는 1964년 미국에서 출판한 것으로 Princess Soraya: Autography of Her Imperial Highness(소라야왕비: 그의 자서전)이라는 타이틀이며 다른 하나는 아마도 1992년에 완성한 것으로 보이는 프랑스어판 La Palais des Solitudes(고독한 왕궁)이었다. 프랑스의 장미전문가인 프랑수아 메일랑(Francois Meilland)은 새로 개발한 장미 품종에 Empress Soraya(소라야 황비)라는 명칭을 붙였다. 소라야 왕비를 기념하여서였다. 2003년에 방영된 이탈리아/독일 TV영화인 Sad Princess(슬픔의 왕비)에서는 1995년도 미스 이탈리아인 안나 발레(Anna Valle)가 소라야 역을 맡았으며 프랑스 여배우인 마틸다 메이(Mathilda May)가 샤 레자 팔라비의 여동생인 샴스 팔라비(Shans Pahlavi)역을 맡았다.

 

영화 '슬픔의 왕비'에서 소라야 역을 맡은 이탈리아의 여배우 안나 발레

 

샤와 이혼한 소라야는 연예계에 진출하면서 여러 사람과 데이트하였다. 1958년에는 프랑크 시나트라와, 1958-59년에는 배우 휴 오브라이언(Hugh O'Brian)과, 1958년에는 또한 프란치스코 파냐타리(Francisco Pignatari)와, 1959-60년에는 프린스 오르시니(Prince Orsini)와, 1962-64년에는 배우 막시밀리안 셀과, 1964-70년에는 배우 리챠드 해리스(Richard Harris)와, 그리고 1964년부터 1972년까지는 영화감독 프랑코 인도비나와 데이트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데이트는 당사자들만 아는 사항이므로 깊이를 알기는 어렵다.

 

이란에서 왕비에 대한 타이틀인 샤바누(Shahbanu)는 1967년 이후부터 비로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란에서는 왕을 샤한샤(Shahanshah)라고 부르는데 이는 ‘왕중왕’이라는 뜻으로 유럽의 황제(Emperor)와 같은 의미이다. 임금인 샤는 그렇게 높여서 부르는데 왕비는 1967년 이전까지만 해도 말라케(Malake)라고 불렀다. 말라케는 그냥 귀족부인에 대한 호칭이었다. 샤바누라는 타이틀은 샤 레자 팔라비의 세 번째 부인인 화라 디바(Farah Diba)를 위해 특별히 법으로 정한 명칭이다. 소라야는 샤 레자 팔라비와 이혼하고 나서도 영어로 Princess Soraya라는 타이틀로 불렸다. 샤 레자 팔라비는 팔레비라고도 발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