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팔라비 왕실의 세 여인

영욕의 순간을 지켜본 화라 왕비

정준극 2010. 1. 2. 12:22

샤 레자 팔라비의 세 번째 부인 화라 디바(Farah Diba)

여권신장과 문화예술 진흥에 주력한 황비

이란 혁명의 와중에서 영욕의 순간들을 지켜본 여인

 

1967년 황비로서 대관식을 갖는 화라 디바. 나폴레옹의 예를 따라 샤 팔레비가 직접 대관하였다.

 

샤 레자 팔라비 황제의 세 번째 부인이며 이란제국의 마지막 왕비인 화라 디바(Farah Diba)는 현대 이란에서 최초로 황비 또는 황후(Empress: Shahbanu)라는 타이틀로 불린 여인이다. 화라 디바는 샤 레자 팔라비의 두 번째 부인인 소라야 왕비가 아이를 낳지 못하여 이혼하게 되자 후속 왕비로서 샤 레자 팔라비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2녀를 두어 후사를 잇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하였다. 그러나 이란혁명으로 남편과 함께 추방되어 방랑의 생활을 해야 했고 그런 중에 남편 샤 레자 팔라비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이제 평범한 여인으로 돌아간 화라 디바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화라는 2010년으로서 72세를 기록한다. 현재 미국 워싱턴 부근의 메릴랜드 주 포토맥(Potomac)에 살고 있으며 주로 워싱턴, 뉴욕, 파리, 카이로를 잠시잠시 방문하면서 사회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화라 디바는 1938년 10월 14일 이란 북부 타브리즈(Tabriz)에서 태어났다. 타브리즈는 고고학자들이 에덴동산이 있던 곳이라고 주장하는 지역이다. 화라의 할아버지는 제정러시아 시절 모스크바주재 이란대사였다. 화라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군사학교를 졸업하고 이란제국군에서 고급장교로 복무하면서 군의 현대화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었다. 화라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행복도 한순간! 화라가 10살 때에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화라는 어린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워졌다. 커다란 저택을 팔고 테헤란 교외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할 정도였다. 화라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이슬람 국가에서 여자로서 현대교육을 받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훌륭한 가문이어서 그런 기회를 가질수 있었다. 화라는 문화와 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이 뛰어났다. 특히 언어에 뛰어난 재능이 있어서 영어, 프랑스어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어를 능숙하게 사용할수 있었다. 1972년 이란 왕비로서 아제르바이잔을 방문하였을 때에는 아자리(Azari)어로 인터뷰를 하여 찬사를 받았다.

 

집무실에서의 화라 황비. 1970년.

 

화라는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테헤란의 이탈리아학교를 다녔다. 그후에는 프랑스 계열의 잔다크학교를 다녔고 이어 리체 라지(Lycee Razi)학교에 다녔다. 화라는 학교 다닐 때 체육에 특히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학교 농구팀의 주장이었다. 키가 큰 화라는 건강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화라는 파리에 있는 건축학교(Ecole Speciale d'Architecture)에 다녔다. 당시 이란의 젊은 학생들은 정부장학금을 받아 유학을 가는 일이 많았다. 외국 순방에 나선 국왕은 그런 국비장학생들을 만나 격려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화라가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처음 만난 것도 1959년 파리주재 이란대사관에서의 유학생 모임에서였다. 그때 샤는 화라의 시원시원하고 매력적인 모습에 완전 감동을 받았다. 화라는 1959년 여름에 공부를 마치고 테헤란으로 돌아왔다. 그때부터 화라와 샤는 은근한 교제를 하였다. 샤의 딸인 샤나즈(Chanaz)공주가 다리 역할을 했다. 당시 샤는 소라야 왕비와 이혼하고 홀로 있을 때였다. 화라와 샤는 1959년 11월 23일 약혼을 발표하였다.

 

결혼식은 1959년 12월 21일에 거행되었다. 신부인 화라가 21세, 신랑인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40세였다. 전세계의 언론은 소라야 왕비에 대한 뉴스가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이젠 화라에 대한 뉴스에 초점을 맞추어야 했다. 결혼후 화라는 우선 아들을 낳아 왕실을 안심시켰다. 샤는 비록 두 번에 걸쳐 결혼하였지만 첫 번째 부인으로부터 딸 하나를 두었을 뿐이었다. 왕위 계승에 있어서 여자는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팔라비 왕가로서는 아들이 있어야 했다. 오래 동안 기다리던 왕자는 샤와 화라가 결혼한지 다음 해인 1960년 10월 30일 태어났다. 온 나라가 경축 일색이었다. 왕자의 이름은 복잡하게 새로 지을 필요가 없이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레자(Reza) 팔라비라고 했다. 이어 화라는 1963년에 딸 화라나즈(Farahnaz)를 낳았고 1966년에는 아들 알리 레자(Ali Reza)를 낳았으며 2001년에는 딸 레일라(Leila)를 낳았다. 이로써 임무완수! 왕비의 제일가는 임무는 후손 생산인데 화라는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타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젊은 왕비는 다른 활동에 집중할 시간적인 여유를 갖게 되었다.

 

대관식후 가족과 함께. 1967년.

 

화라는 여권신장문제와 문화예술의 증진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화라는 24개 교육, 보건, 분화 기구의 후원자로서 관여하고 있다. 날이 갈수록 화라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화라는 시골 곳곳을 찾아가기를 좋아했다. 시골구석에 왕비가 찾아가는 일은 이란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백성들은 너나 할것 없이 화라를 좋아하고 존경했다. 화라의 업무가 점점 확대됨에 따라 스태프도 더 두게 되었다. 약 40명의 직원을 두고 일을 보았다. 이란제국의 정부는 왕비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을 보고 남의 일처럼 방관할수는 없었다. 정부는 1967년에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를 황제로, 화라 디바 왕비를 황비(황후)로 대관하는 행사를 가지기로 했다. 이때부터 화라 왕비는 샤바누(황비 또는 황후: Empress)라는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또한 만일 샤에게 무슨 일이 생기고 황태자가 21세가 되지 않았으면 황비가 황제의 업무를 대신 맡는 섭정(Regent)이 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 여자를 섭정으로 삼을수 있다는 법은 중동지역의 이슬람 왕국들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화라가 많은 일을 하면 할수록, 그리고 정치에 간여하면 할수록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도 높아갔다. 특히 보수적인 이슬람종교 지도자들은 화라에 대하여 일종의 증오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이 화라를 미워하는 것은 정확히 말해서 팔라비 정권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방안이었다. 화라야말로 편리한 공격대상이기 때문이었다. 화라는 이슬람종교 지도자들과 차이가 나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의 율법에 의하면 남자는 4명까지의 부인을 둘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화라는 이를 반대하고 일부일처제를 강력히 주장했다. 여성의 복식에 있어서도 차도르를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슬람 세계에서 여성의 지위가 하루아침에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화라는 구태를 타파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으며 샤도 이에 동조하였다. 이것이 종교 지도자들의 심경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화라가 재야 단체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직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된 경우는 대표적으로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1967년의 대관식이었다. 지나치게 호화판이었다는 지적이었다. 또 하나는 1971년 고도 페르세폴리스(Persepolis)에서 가진 이란 왕국 건설 2천5백주년 기념 행사였다. 이란의 영광을 만방에 들어내 보이도록 기획되었다. 행사를 위해 수백만불의 예산이 투입되었다. 재야단체와 종교지도자들은 황실에서 국가예산을 물쓰듯 하고 있다면서 비난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라는 소신 있게 하고 싶은 일을 추진해 나갔다. 화라는 이란 전통예술의 보전과 발전을 위해 많은 지원을 하였다. 화라는 양탄자를 만드는 공예로부터 시를 읊는 전통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업적은 1967년부터 쉬라즈 아츠 페스티벌(Shiraz Arts Festival)을 개최한 것이다. 이란과 서구가 문화예술을 함께 경험하는 무대를 마련하는 축제였다. 이 축제는 1977까지 계속되었다.

 

1980년 이집트에 다시 정착한 샤와 화라 황비. 샤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모습.

 

화라는 문화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문화재를 발굴하고 보전하는 일에 앞장 섰다. 외국에 팔려갔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란 내에서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문화재들을 다시 사들여서 국가가 보관토록 하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나가레스탄(Nagarestan) 문화센터, 레자 아바시(Reza Abbasi)박물관, 코라마바드(Khorramabad)박물관 등은 모두 화라가 설립한 박물관들이다. 화라는 이란 현대미술관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경매를 통해 유럽 유명작가들의 작품을 사들이는 일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피카소, 모네, 조지 그로츠(George Grosz), 앤디 워홀(Andy Warhol), 잭슨 폴락(Jackson Pollack),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등의 작품을 매입하여 국가소장품으로 만들었다. 오늘날 화라의 노력으로 테헤란현대미술관은 세계에서도 20세기 현대미술의 보고(寶庫)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화라가 이들 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하자 재야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국가예산을 지나치게 사용한다면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오늘날 화라가 몇백만불을 투자하여 매입한 작품들은 그 가치가 한없이 높아져서 무려 28억 달러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국가에 기여한 셈이었다.

 

1978년에 들어서서 왕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샤 레자 팔라비 황제가 이슬람 근본주의를 망각하고 서구 문화에 종속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불만의 원천이었다. 그해 말에 거리에서는 연일 왕정반대 시위가 격렬하게 일어났다. 화라의 활동도 크게 위축되었다. 시위는 폭동으로 변해갔다. 이란 정부는 1979년 초에 테헤란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계엄령의 선포는 결과적으로 혁명의 문을 열어 놓은 셈이었다. 샤와 화라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이란을 떠나 망명의 길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1979년 1월 16일 샤와 화라와 가족들은 은밀한 중에 이란을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샤가 국외로 탈출하는데 성공함과 동시에 민중들의 혁명도 성공했다.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았다. 이란을 떠난 샤와 화라는 어디로 향할 것인가? 샤는 평소에 이집트 대통령인 안와르 엘 사다트(Anwar El Sadat)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라도 사다트 대통령의 영부인인 즈한 알 사다트(Jehan Al Sadat)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샤와 화라는 사다트 대통령 내외의 초청을 받아들여 이집트로 기수(機首)를 향하였다. 이란의 혁명정부는 샤를 반역자로 낙인찍고 체포령을 내렸다. 샤에 대한 압박이 점점 조여들고 있었다. 샤는 이집트에 누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샤는 이집트를 떠나기로 했다. 그로부터 샤는 14개월동안 세계의 이곳저곳을 유랑하며 정치적 망명지를 모색하였으나 마땅하지 못했다.

 

미국에 도착하여 환영을 받는 샤와 화라. 1980년.

  

이집트를 떠난 샤 일행은 먼저 모로코로 향하였다. 잠시 동안 하싼 2세 국왕의 손님으로 머물렀다. 그후 샤 일행은 영국으로부터 바하마의 파라다이스 아일랜드에 거처를 정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섬의 이름은 파라다이스이지만 화라 왕비는 이곳에서의 생활이 전생애중 가장 어두웠던 기간이라고 말했다. 바하마에서의 체류비자가 만료되었지만 샤 일행은 비자연장을 받지 못했다. 샤 일행은 겨우 멕시코 비자를 받아 멕시코시티 부근의 쿠에르나바카(Cuernavaca)에 빌라를 빌려 지낼수 있었다. 샤는 이집트를 떠난 이후 비록 양성이지만 호지킨스 병에 시달렸다. 멕시코에 겨우 정착한 샤는 임파종이 악화되어 긴급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리하여 잠시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샤와 화라의 미국 체류는 이미 긴장에 넘쳐 있는 워싱턴과 이란혁명정부간의 관계를 더욱 불지르는 것이 되었다. 이란은 미국을 전보다 더 적대시하게 되었다. 결국 저 유명한 테헤란주재 미국대사관이 공격을 받아 완전 파괴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이란인질사건이 발생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샤와 화라는 더 이상 미국에 머물기가 어렵게 되었다. 샤는 기본적인 치료만 받은후 미국을 떠나야 했다. 샤와 화라는 이번에는 파나마의 콘타도라 섬(Contadora Island)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파나마도 처음에는 와서 머물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오히려 샤를 체포하여 이란으로 송환할 기미를 보였다. 샤와 화라는 이제 정말 갈 곳이 없었다. 결국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이집트의 사다트에게 매달렸다. 사다트의 부인이 화라의 사정을 이해하고 피난처를 제공하였다. 샤와 화라는 1980년 3월 이집트에 도착했다. 샤는 4개월 후인 1980년 7월 27일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되었다.

 

샤가 세상을 떠난후 화라는 계속 이집트에 머물러 있었다. 사다트 대통령은 화라와 가족들에게 카이로의 쿠베(Koubbeh)궁에 머물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샤가 세상을 떠난지 1년이 겨우 지난 1981년 10월 사다트 대통령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화라는 이집트를 떠나야 했다.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추방생활을 하고 있는 화라에게 미국에 와서 지내도 좋다고 연락했다. 화라는 처음에 매사추세츠 주의 윌리엄스타운에 머물렀으나 얼마후 코네티커트 주의 그린위치에 집을 사서 정착했다. 2001년 딸인 레일라 공주가 세상을 떠났다. 화라는 너무 큰 집이 필요 없어서 아들 레자 부부와 손자들이 살고 있는 워싱턴 부근의 메릴랜드 주 포토막에 작은 집을 사서 지냈다. 2003년에 화라는 자서전인 An Enduring Love: My Life With the Shad(오래 참는 사랑: 샤와의 삶)을 펴냈다. 유럽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카이로의 쿠베궁. 샤와 화라가 이집트의 호의로 잠시 체류했던 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