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팔라비 왕실의 세 여인

아시아의 비너스: 화우지아 왕비

정준극 2010. 1. 2. 12:12

샤 레자 팔레비의 첫 왕비 화우지아(Fawzia)

이집트 파루크 국왕의 여동생

결혼 9년후 샤 레자 팔라비와 이혼

 

이란 샤 레자 팔라비의 첫번째 왕비 화우지아

 

소라야가 샤 모하메드 레자 팔라비(Sha Mohammed Reza Pahlavi)와 결혼하게 된 것은 샤 팔라비가 첫 번째 왕비인 이집트의 화우지아(Fawzia)와 이혼하였기 때문이었다. 화우지아는 1921년 11월 5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남편이 된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는 두 살 차이였다. 화우지아의 아버지는 이집트 국왕인 후아드 1세(Fuad I)이었고 오빠는 나중에 이집트의 국왕이 된 화루크(Farouk)였다. 화우지아는 2010년 현재 아직도 생존하여 있다. 2010년으로 89세가 된다. 샤 레자 팔라비 이란 왕과 이혼한 화우지아는 이혼한 이듬해에 아스마일 후싸인 쉬린(Ismail Hussain Shirin)이라는 친척과 재혼하였다. 그래서 현재 화우지아의 이름은 화우지아 쉬린으로 불리고 있다. 화우지아 쉬린은 1952년 이집트가 혁명으로 공화국이 되자 왕족으로서의 모든 타이틀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나 외국, 특히 유럽에서는 아직도 그를 왕족으로 예우하여 Princess(공주)라고 호칭한다. 현재 화우지아는 이집트에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축출된 무하마드 알리 왕조의 사람 중에서는 가장 연로하다. 그의 사촌으로서 이집트와 수단의 후아드 2세라고 선포한 후아드가 있지만 그는 혁명 이후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얘기가 조금 빗나갔음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이제 화우지아에 대한 얘기로 되돌아 가보면 다음과 같다.

 

1942년 9월 21일자 라이프지 표지. '이란왕비'라는 타이틀이 적혀 있다.

 

화우지아는 이집트와 수단의 술탄(국왕)인 후아드 1세의 큰 딸로서 알렉산드리아의 라스 엘 틴(Ras el-Tin)궁에서 태어났다. 화우지아의 증조부 쯤 되는 사람은 술레이만 파샤라는 사람으로서 나폴레옹의 휘하에서 프랑스군 장교로 근무했었다. 술레이만 파샤는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였을 때 함께 온 후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살게 되었다. 그는 이집트군의 전면적인 개혁을 주도하였으며 그후 점점 정권을 잡게 되었다. 화우지아에게는 화이자, 화이카, 화티야의 세 여동생이 있으며 남동생으로서는 화루크가 있지만 아버지의 전처의 소생으로도 2명의 형제가 있었다. 동생이 몇 명이 있느냐는 것은 사실상 중요하지 않으므로 생략키로 하고 다시 샤 팔라비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화우지아 공주와 이란 황태자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와의 결혼식. 1939년 카이로에서. 왼쪽으로부터 화리다 왕비, 화루크 1세 국왕, 화우지아 공주, 샤푸르 모하메드 라자 팔라비 황태자, 나즐리 황후

 

이란의 황태자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1919-1980)에게 이집트 왕실에서 청혼이 들어왔다. 화우지아 공주가 주인공이었다. 화우지아 공주는 제2의 클레오파트라라고 할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그러므로 이란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왕자로서는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식은 1939년 3월 16일에 카이로에서 있었다. 신랑이 20세, 신부가 18세였다. 신혼여행을 마친 신혼부부는 테헤란에 돌아와서 이번에는 진짜 결혼식을 올렸다. 말할수 없이 화려한 결혼식이었다. 그로부터 2년후인 1941년, 황태자였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추방된 선왕의 뒤를 이어 이란의 샤(Shah: 국왕)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젊은 이란왕 부부에 대하여 선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수 없었다. 1942년 라이프 잡지는 화우지아를 9월 21일자 커버에 실었다. 라이프지는 화우지아를 ‘아시아의 비너스’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하트 모양의 얼굴과 창백한듯 하면서도 꿰뚫는 듯한 푸른 눈을 마치 하나의 조각과 같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화우지아는 미인이었으며 세계의 사랑을 받았다.

 

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왕과 화우지아 왕비, 그리고 딸 샤나즈 공주. 2차 대전기간 중에 테헤란에서


결혼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딸 샤나즈(Shahnaz)가 태어난 이후 화우지아는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이집트에서 이혼소송을 제기하였다. 화우지아는 결혼한지 6년만인 1945년에 테헤란의 왕궁을 떠나 카이로에 가서 살았다. 이란은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혼을 하려는지 자세히 모르므로 이혼을 수락할수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집트 변호사들의 놀라운 능력으로 결국 화우지아는 이란 법원으로부터 이혼허락을 정식으로 받아냈다. 1948년 11월이었다. 이와 함께 화우지아는 종전의 이집트와 수단 왕실에서 사용하던 타이틀을 다시 얻게 되었다. 이혼의 조건 중 하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이란에서 양육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그 시기에 화우지아의 남동생인 화루크도 왕비인 화리다(Farida)와 이혼하였다. 무슨 영문이 있나? 그나저나 이란 법원이 밝힌 화우지아의 이혼사유는 무엇이었나? 이란의 법원은 화우지아의 이혼을 공식적으로 발표할 때에 ‘페르시아의 기후가 척박하여 화우지아 왕비의 건강을 위태롭게 할수도 있으므로 이에 이혼을 승낙한다’고 사유를 밝혔지만 누구도 그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우지아가 조금 바람기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추측을 했다. 화우지아는 샤 레자 팔레비와 정식으로 이혼한지 1년 후인 1949년 카이로에서 아스마일 후사인 쉬린(Ismail Hussain Chirine: 1919-1994) 대령과 재혼하였다. 쉬린은 화우지아의 먼 사촌이 되며 한때 이집트 전쟁장관 및 해군장관을 역임한바 있다. 두 사람은 딸 나디아(Nadia)와 아들 후싸인(Hussain)을 두었다.


이스마일 쉬린과 화우지아 공주


[후기: 화우지아는 2013년 7월 2일 향년 91세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우지아는 이튿날인 7월 3일 카이로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