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앤 볼레인의 등장

정준극 2010. 2. 9. 06:00

앤 볼레인의 등장

 

 

영국성공회가 생기게 된 연유를 제공한 앤 볼레인(1507-1536). 영국역사상 가장 현명한 여왕이었던 엘리자베스의 생모

 

영국에서 헨리8세가 탈가톨릭을 주창한 이면에는 이 같은 시류에 동승한다는 의미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당시 헨리8세는 왕자를 생산하는데 실패한 아라곤의 캐서린왕비와 이혼하고 정부로 엔조이하던 앤 볼레인(Ann Boleyn)과 정식으로 결혼하여 후사를 이을 왕자를 가져야 하겠다고 간절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캐서린왕비는 이같은 강압적인 이혼을 당치도 않게 생각하였다. 캐서린에게는 막강한 배경이 있었다. 캐서린왕비의 조카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의 스페인  카를로스(Carlos)황제였다. 카를로스는 합스부르크 왕가 계통으로서 신성로마제국의 왕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실상 교황을 장악하고 있었다. 가톨릭의 교리에 따르면 이혼은 절대금물이었다. 어쩔수 없는 사정으로 이혼하게 된다면 교황만이 이혼을 인정하는 권한이 있었다. 카를로스황제의 압력을 받은 교황은 헨리8세가 요구한 이혼신청서를 책상 설합에 넣어 둘수 밖에 없었다. 압력도 압력이지만 교황 자신도 은근히 영국 왕실에 대하여 못 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터였다.

  

토마스 크란머(1489-1556). 캐서린과 헨리8세의 이혼에 앞장 선 인물. 영국성공회의 주창자.


영국 교회의 실력자 중 하나인 토마스 크란머 (Thomas Cranmer)가 헨리8세에게 캐서린과의 이혼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크란머는 나중에 켄터베리 대주교가 된 사람이다. 크란머가 제시한 해결책은 만일 영국이 교황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국왕이 교회의 수장을 겸직한다면 가톨릭에 의한 이혼 거부 문제는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헨리는 귀가 솔깃하여 크란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독실한 가톨릭인 캐서린왕비는 교황이 인정하지 않는 결혼 무효는 받아 들일수 없다고 거부하며 왕비의 자리를 내놓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영국 땅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캐서린왕비는 헨리로부터 버림받게 되었다. 헨리는 교황의 눈치를 보지 않고 두 번째 왕비 앤 볼레인과 결혼하였다. 이로부터 헨리는 도합 6명의 왕비를 두었던 세기적 기록의 주인공이 되었다. 아무튼 헨리는 캐서린과의 이혼에 때를 맞추어 영국 땅에서 교황의 영향을 말살하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헨리는 실제로 아주 거친 성격의 소유자였다.

'왕실 이야기 > 영국왕실과 성공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라디 메리  (0) 2010.02.09
유토피아의 수난  (0) 2010.02.09
캔터베리 대주교 사건  (0) 2010.02.09
로마교황의 간섭  (0) 2010.02.09
아라곤의 캐서린이 도화선  (0) 2010.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