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로마교황의 간섭

정준극 2010. 2. 9. 05:59

로마 교황이여! 좀 지나치지 않은가?

 

영국 국왕들은 1066년 정복왕 윌렴(William the Conqueror)이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에서 승리하여 영국 왕관을 차지한 이래 교황 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교황이 제왕들의 권위에 지나치게 간섭하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9세기 훨씬 이전부터 교황들은 유럽의 대부분 땅을 차지함으로서 유럽을 마치 거대한 교황 영지처럼 만들었다. 교황들은 이 영지로부터는 물론이고 심지어 왕들과 대공들로부터도 세금을 거두고 병역을 부과하며 만고강산의 생활을 했다.

 

교황이 파문하는 장면(그레고리9세). 파문은 가장 참혹한 죽음과 마찬가지였다.


교황의 권세는 실로 막대했다. 별도의 종교재판소를 만들아 맘에 들지 않으면 이단이니 뭐니 해서 잡아넣었다. 그리고 국가의 법에 복종하던 수많은 성직자들을 교황이 만든 별도의 법 테두리 안으로 밀어 넣었다. 국광의 말은 듣지 말고 하나님이 택한 교황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었다. 만일 이의가 있으면 ‘아니, 하나님 알기를, 다시 말해서 나를 우습게 알아? 엉!’이라면서 사정없이 핍박하였다. 가장 심각한 것은 파문(Excommunication)이었다. 사정이 그러하니 유럽의 국왕들도 교황의 권세 아래에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정복왕 윌렴의 증손자인 헨리2세가 한때 자기의 친구였으며 자문관이었던 켄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커의 피살과 관련하여 자기 입장을 고해성사 하게 되었는데 그 때에 왕으로서 대주교에게는 고해 성사 한다 하더라도 바로 그 대주교가 죽은 이상 누구에게 고해성사 해야 하며 또 과연 국왕으로서 교황이 임명한 성직자에게 무릎을 꿇고 고해성사를 할 필요가 있는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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