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영국왕실과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 사건

정준극 2010. 2. 9. 06:00

캔터베리 대주교 사건

 

그로부터 34년 후, 새로운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그 헨리2세의 아들인 악명 높은 존(John)왕이 교황이 임명한 캔터베리 대주교를 인정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그 바람에 존왕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한술 더 떠서 교황은 존왕의 왕위를 박탈한다는 교서까지 발표하였다. 이에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존왕은 ‘해볼 테면 해봐라’라는 심정으로 영국에 있는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들의 활동을 모두 정지시켰다. ‘감히 왕에게 까불어...?’였다. 그러다 보니 교회의 주관으로 치루던 결혼식은 물론 장례식도 치루기 어렵게 되었다. 당시로서 이것은 성직자에 대한 대단한 처벌이 아닐 수 없었지만 민간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장례가 그러했다. 교회의 참여가 있어야만 영혼이 부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신부의 참여 없이 장례를 치루는 것은 마치 죽은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영국왕 존(1166-1216). 재위: 1199-1216(17년)


결국 존왕은 교황에게 가장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존왕은 영국을 교황의 속지로 인정하였고 그 속지를 다스리는 특권으로서 매년 약 700 파운드의 세금을 내기로 했다. 부왕인 헨리2세와 존왕은 교황으로부터 비참할 정도의 대우를 받았다. 마치 교황이 어부(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면 그 어부의 낚시 바늘 끝에 매달린 지렁이처럼 보잘것 없이 꿈틀거리는 신세와 같았다. 그로부터 3세기 후, 헨리8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교황의 입장은 상당히 위축된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열국의 왕들과 군주들이 유럽을 물들이고 있는 종교개혁의 기치에 편승하여 교황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교황 인노센트3세

1517년 독일의 성직자인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Pardons for Sin) 판매를 비롯해서 몇 가지 불합리한 교회의 관습을 반대하는 개혁의 기치를 들었던 것은 결국 가톨릭에서 개신교(Protestant)가 갈라지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었다. 유럽의 여러 군주들은 이 기회를 교황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기로 삼았다. 종교적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생각보다는 군주의 주권을 찾는다는 의도가 더욱 강했을 것이다. 군주들은 엄청남 부를 축적한 교회의 토지와 재산에 눈길을 돌렸고 결국 이런 것들은 종교개혁의 소용돌이에서 모두 군주의 손아귀에 돌아가게 되었다.

 

캔터베리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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