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

[참고자료] 라데츠키 작전

정준극 2010. 9. 20. 12:07

[참고자료]

라데츠키 작전

(Operation Radetzky)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명장 요셉 벤첼 라데츠키 장군(1766-1858)

 

‘라데츠키작전’은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초, 나치에 저항하는 일단의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군 장교들이 비엔나를 전쟁의 포화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소련군의 비엔나 무혈입성을 지원한 작전으로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장군 요셉 벤첼 라데츠키(Josef Wenzel Radetzky) 백작의 이름을 따서 붙인 암호이다. 라데츠키장군은 요한 슈트라우스1세의 ‘라데츠키행진곡’으로 전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라데츠키작전’을 주도한 이들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출신의 오스트리아 방어군(하임베르) 장교들로서 비록 독일군에 편성되어 있지만 조국 오스트리아를 전쟁의 참화로부터 구출코자 지하저항단체와 협동하여 소련군이 비엔나에 무혈입성토록 지원하였다. 그렇게 하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구출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의 영광이 깃든 비엔나의 위대한 유산들을 전쟁의 포화와 히틀러의 파괴명령으로부터 보존할수 있었다. ‘라데츠키작전’을 주도한 장교들은 칼 초콜 소령을 비롯하여 칼 비더만(Karl Biedermann) 소령, 알프레드 후트(Alfred Huth) 대위, 루돌프 라슈케(Rudolf Raschke) 중위였다. 하지만 ‘라데츠키작전’은 D-데이를 며칠 앞두고 사전에 나치 친위대에 의해 발각되어 주동자인 칼 초콜 소령은 다행히 피신하였지만 세 사람의 가담장교들은 체포되어 종전을 며칠 앞둔 1945년 4월 8일 도나우 건너편의 플로리드스도르퍼 슈피츠(Floridsdorfer Spitz)에서 처형되었다. 나치는 총알도 아깝다고 하여 이들을 군인으로서 불명예인 교수형으로 처형했다.

 

나치는 오스트리아 국방군 소속의 칼 비더만 소령등을 교수형에 처한후 한동안 방치해 두었었다.

 

비엔나시는 1964년 플로리드스도르퍼 슈피스의 그 장소에 3명의 의로운 장교들을 추모하는 명판을 설치하였다. 1967년에는 14구 펜칭에 있는 Kaiser-Franz-Joosef-Kaserne(프란츠 요셉 황제 병영)을 세 사람의 장교들 이름을 따서 Biedermann-Huth-Raschke-Kaserne(비더만-후트-라슈케 병영)이라고 변경하였다. 또한 플로리드스도르프의 그로쓰예들러스도르프(Grossjedlersdorf)에는 ‘칼 비더만 가쎄’를, 다른 곳에는 ‘루돌프 라슈케 가쎄’, ‘알프레드 후트 가쎄’를 두어 이들의 애국적인 희생을 기념하고 있다. 만일 이들이 없었더라면 1천년 비엔나의 찬란한 문화유산은 한 줌의 잿더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영화 '라데츠키 작전'의 한 장면. 칼 비더만, 알프레드 후트, 루돌프 라슈케 등이 동료장교를 설득하고 있다.

 

1945년 3월에 소련군은 비엔나를 탈환키 위해 이미 헝가리의 도나우와 플라텐제(Plattensee)사이에 포진하고 총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이 지역은 나치 독일이 점령한 이른바 대독일제국(Grossdeutschen Reich)에 속하여 있었다. 소련군은 3월 29일 국경지대의 클로스터마리엔버그(Klostermarienberg)에 집결하고 있다가 4월에는 비엔나 주변까지 진격하였다. 사태가 이렇듯 급박하게 돌아가자 히틀러는 전군에게 비엔나사수의 명령을 내렸다. 히틀러는 후퇴란 있을수 없다고 하면서 무슨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비엔나를 적의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할 것과 만약 적에게 빼앗기게 된다면 모든 기차역, 철도, 기관차, 철교, 철도전철(轉轍)시설, 석유비축탱크, 전기시설, 가스시설, 기술정비소, 생필품저장고 등을 모두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말하자면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하였을 때 러시아군이 감행한 초토화작전을 그대로 수행하라는 명령이었다. 이를 Nerobefehl(네로명령)이라는 암호로 불렀다. 네로가 로마에 방화하여 초토화시킨 작전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에서였다. 독일군의 일부 장교들은 히틀러의 이같은 작전명령에 대하여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지만 그렇다고 전시에 총통(휘러)의 명령을 듣지 않을수 없는 처지였다.

 

1944년 7월 20일 볼프스샨체(늑대굴)에서 히틀러를 암살하기 위한 폭발. 하지만 히틀러는 무사했다. 이로써 거사를 주도했던 슈타우펜버그 장군등 수많은 독일군 장교들이 처형되었다. 비엔나의 '라데츠키 작저'을 기획한 장교들도 이들의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는 것을 대단히 염려했다. 과연, 사전에 발각되어 주모자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오스트리아 방어군(Heimwehr: 방향군)은 나치의 정규 독일군과는 달리 사실상 조국 오스트리아 를 수호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한편, 오스트리아의 지하저항세력은 국경너머의 소련군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저항군은 05라는 암호를 쓰고 있었다. 지금도 슈테판성당의 외벽에는 당시 저항그룹이 표시해둔 05라는 숫자가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을 볼수 있다 (05는 Österreich의 Ö, 즉 OE를 의미한다). 저항그룹인 05와 국방군의 연락책임은 독일군 제17 방어사령부의 칼 초콜(Carl Szokoll)소령이었다. 그는 1944년 7월 20일의 저 유명한 히틀러제거 작전인 동부 프러시아 라스텐부르그(Rastenburg) 인근의 비밀요새인 늑대굴(Wolfsschante)에서의 폭발사건에도 연락장교로 활동했었다. 하지만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체포를 면할수 있었다. 칼 초콜 소령은 히틀러의 ‘네로명령’을 알고 어떠한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비엔나가 불바다가 되는 것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 하임베르(국방군)이 비엔나 시가지를 행진하고 있다. 나치 독일군이 이들의 행진을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다. 어딘가 장개석 군대처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들은 나치독일군이 아니다. 독일군에 편성되어 있을 뿐이었다.  

 

1945년 4월 2일, 칼 초콜 소령은 페르디난트 캐스(Ferdinand Käs) 특무상사와 요한 라이프(Johann Reif) 병장을 우크라이나 전선의 소련군 제3군단 사령관인 표도르 이반노비치 톨부친 장군에게 비밀리에 파견하여 ‘라데츠키 작전’의 내용을 설명토록하고 소련군으로 하여금 비엔나를 둘러싼 방어진지 중에서 경비가 소홀한 곳으로 진격하여 비엔나를 탈환토록 협의하였다. 독일군은 소련군의 직접적인 공격에 대비하여 동쪽 도나우 일대에 주력부대를 배치하였으며 서쪽은 상대적으로 중점을 두지 않았다. 그러므로 독일군의 허를 찔러 서쪽으로 진입하는 것으로 작전을 세웠다. 이와 함께 소련군이 진입하면 비엔나 시내에서도 지하저항군이 독일군과 교전을 하는 것으로 약조하였다. 비엔나를 공략할 소련군에게 보냈던 밀사들이 4월 4일 비엔나로 돌아온 직후 불행하게도 '라데츠키 작전'이 탄로되어 주동자 색출작전이 펼쳐졌다. 칼 초콜 소령은 즉각 소련군 진영으로 피신하여 체포되지 않았지만 칼 비더만 소령을 비롯한 후트 대위, 라슈케 중위는 친위대에게 체포되었다. 헝가리 미스콜츠(Miskolc)출신의 칼 비더만(1890-1945)은 오스트리아 방어군(Heimwehr)의 비엔나 정찰대장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독일군이 비더만 소령에게 맡긴 임무는 비엔나로 통하는 교량을 사수하는 것이었다. 비더만 소령은 자기가 방어를 맡고 있는 교량을 소련군의 입성을 위해 터놓을 작정이었다.

 

슈테판성당 정문(리젠토르)의 옆 벽면에 새겨진 05 표시. 오스트리아 지하저항그룹이 러시아군과의 연락을 위해 표시한 것이다.

 

비더만 소령은 알프레드 후트(1918-1945) 대위와 루돌프 라슈케(1923-1945) 중위와 함께 비엔나 북부의 비잠버그 일대에서 방어하고 있는 독일군의 지휘권을 접수코자 했다. 그리고 즉시 소련군에게 연락하여 비엔나로 입성토록 하였다. 나치는 오스트리아 방어군의 장교들이 무슨 반역적인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눈치 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당장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며칠후 소련군이 비엔나 서쪽으로 진주했을 때 비교적 커다란 저항을 받지 않았다. 한편, 나치 친위대는 비더만 소령, 후트 대위, 라슈케 중위를 체포하여 심문한후 1944년 4월 8일 플로리드스도르프 슈피츠의 대로에 있는 가로등에 매달아 교수형에 처했다.독일군은 히틀러가 명령한 파괴작전을 미처 수행하지도 못하고 퇴각하였다. 소련군이 비교적 신속하게 비엔나를 장악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쌍방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면 독일군 1만9천명, 소련군 1만8천명의 희생은 불가피했었다. 그리고 세계의 문화유산인 비엔나는 말할수 없이 파손되었을 것이다. 물론 소련군의 포격으로 시내의 여러 건물들이 피괴되기는 했지만 그정도로 피해를 본 것이 다행이었다. 칼 초콜은 2004년 4월, ‘라데츠키 작전’이 계획된 때로부터 60년 후에 향년 88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칼 초콜을 비롯한 3명의 장교들을 '비엔나의 구원자'라고 하며 칭송했다.

     

플로리드스도르퍼 슈피츠 길가에 있는 ['라데츠키 작전' 희생자 추모 탑 

'라데츠키 작전'을 주도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될 운명이었으나 다행히 피신하여 살아 남은 칼 초콜이 말년에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훗날 사람들은 초콜 소령을 '비엔나의 구원자'라며 칭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