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1구 플로리드스도르프

[참고자료] 영화 속의 씨씨, 로미 슈나이더

정준극 2010. 9. 21. 20:39

[참고자료]

영화 속의 씨씨, 로미 슈나이더(Romy Schneider)

비엔나에서 태어난 세계적인 여배우

 

1960-7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세기의 미인 로미 슈나이더를 모를리가 없다. 더구나 로미 슈나이더는 세기의 미남 알랭 들롱의 파트너였다. 두 사람이 출연한 크리스티네(Christine)라는 영화는 당시의 학생들에게 사랑의 비수(悲愁)를 가슴 저미도록 안겨준 애절한 이야기였다. 우리나라에서 옛 영화 팬들에게 로미 슈나이더라고 하면 크리스티네 또는 카티야(katya), 굿 네이버 샘(Good Neighbor Sam) 등을 연상하지만 유럽, 특히 비엔나에서는 다르다. 로미 슈나이더라고 하면 우선 아름다운 왕비 엘리자베트(씨씨)를 연상한다. 합스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왕비를 주제로 한 3편의 Sissi Trilogy에서 타이틀 롤을 맡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로미 슈나이더는 비엔나에서 태어난 배우이다. 합스부르크의 엘리자베트 왕비를 그리는데 있어서 비엔나 출신의 배우만큼 훌륭하게 해낼 사람은 없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었다. 로미 슈나이더가 누군지 잘 모르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간략하게 소개한다.

 

  

헤디 라마르(Hedy Lamarr) 이후 비엔나 출신의 최고 여배우인 로미 슈나이더. 왼편이 헤디 라마르

 

로미 슈나이더는 1938년 9월 23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938년이면 히틀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여 두 나라가 억지로 하나의 국가가 된 해이다. 그러므로 로미 슈나이더도 엄밀히 말하자면 오스트리아 출신이 아니라 독일 태생이라고 말할수 있다. 로미 슈나이더의 원래 이름은 로제마리 마그달레나 알바흐(Rosemarie Magdalena Albach)였다. 독일인 후손으로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아버지 볼프 알바흐 레티(Wolf Albach-Retty)와 독일에서 태어난 비엔나에 온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Magda Schneider)는 모두 이름난 배우였다. 로미 슈나이더는 태어난지 3주 후에 쇠나우 암 쾨니히제(Schonau am Konigsee)라는 곳으로 이사를 갔다. 히틀러의 나치가 모든 것을 통제했고 더구나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흉흉하여서 로미의 부모는 어린 로미만이라도 비엔나를 떠나 지내도록 한 것이다. 어린 로미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인 마리아와 프란츠 슈나이더의 손에 자랐다. 로미가 나중에 동생 볼프-디터와 함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손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마리엔그룬트(Mariengrund)라는 마을이었다. 이곳의 연만한 주민들은 아직도 로미 슈나이더가 자기들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데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로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 중에도 비엔나에서 계속 배우로서 활동하였으며 1943년에 별거에 들어가 결국 1945년 종전과 함께 이혼하였다.

 

10세 때의 로미 슈나이더

 

로미는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잘츠부르크 인근의 영국여학교인 인터나트 골덴슈타인(Internat Goldenstein)사립학교에 다녔다. 그때 로미는 일기에 '나도 반드시 배우가 될거야'라고 적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배우로서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한편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는 1953년에 비엔나의 유명한 요리사인 한스 블라츠하임(Hans Blatzheim)이라는 사람과 재혼하였다. 그래서 로미와 남동생 볼피는 어머니를 따라 비엔나에서 계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로미는 학교에 다니는 것보다 연극이나 영화에 출연하는 것이 더 좋았다. 그리하여 1953년, 15세의 소녀 때에 첫 영화에 출연하였다. Wenn der weisse Flieder wieder blunt(하얀 라일락 꽃이 다시 필 때에)라는 영화였다. 로미가 영화배우로서 재능을 보이자 계부인 한스 블라츠하임은 요리사 일은 때려 치우고 아예 로미의 매니저로서 앞장섰다. 어머니 마그다 슈나이더는 자기도 명색이 배우인데 남편이라는 작자가 자기의 매니저 노릇은 하지 않고 어린 딸의 매니저로 자처하고 나서는데 대하여 못마땅했지만 딸이 잘되기 위해서라는데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로미는 그런 계부가 싫었다. 왜냐하면 나중에 털어놓은 이야기이지만 계부라는 작자가 자기에게 불건전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로미가 영화에 데뷔한 1953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 6.25 사변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였으니 우리는 전쟁으로 죽어라고 고생하던 때에 로미는 이미 여배우로서의 길을 걷고 있었다.  

 

1954년의 로미 슈나이더. 당시 로미는 춘향이와 나이가 같은 16세였다.

 

'하얀 라일락 꽃이 다시 필 때에'에서 두각을 나타낸 로미는 이듬해인 1954년 Madchenjahre einer Konigin(여왕의 소녀시절)에서 주역을 맡게 되었다. 영국의 젊은 빅토리아 여왕 역할이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The Story of Vicky(비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인기를 끌었고 영국에서는 Victoria in Dover(도버의 빅토리아)라는 제목으로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비키는 빅토리아 여왕의 애칭이었다. 하기야 영국사람들에 있어서 빅빅토리아 여왕이라고 하면 밥먹다가도 일어나서 예의를 표하는 정도이니 영화가 인기를 끌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던중1955년, 로미가 17세 때에 행운의 여신을 로미에게 다가왔다. 에른스트 마리슈카가 감독한 Sissi(씨씨)에서 대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비가 된 엘리자베트의 역할을 맡은 것이다. 이어 이듬해인 1956년에는 씨씨 시리즈 2편인 '씨씨 - 젊은 왕비'에, 1957년에는 3편인 '씨씨 - 왕비의 운명의 해'에 출연하였다. 상대역인 프란츠 요셉 황제 는 칼하인츠 뵘(Karlheinz Bohm)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친구로서 지냈다. 아직 스므살도 되지 않은 로미 슈나이더는 3부작 씨씨로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그리스, 포르투갈 등지에서 최고의 아름다운 배우로서 최대의 사랑을 받았다. 모두 합스부르크 왕가와 관련이 있는 나라들이었다. 비엔나에서는 처음에씨씨 영화가 개봉되자 사람들이 이를 보기위해 새벽부터 극장 앞에 가서 줄을 서고 기다렸다고 한다. 그래서 비엔나에서는 로미 슈나이더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귀욤 에뱅이 쓴 '미스테리의 로미 슈나이더' 표지

 

로미는 1957년이 완성된 배우로서의 출발점이었다. 아직 스테레오 음향이 아니었지만 로미는 1957년에 Robinson soll nicht sterben(로빈슨은 죽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The Legend of Robinson Crusoe)에 출연하였고 이어 Monpti(몬프티)에도 출연하였다. 두 번 모두 유망배우인 호르스트 부흐홀츠(Horst Buchholz)와 공연(共演)하였다. 로미를 정작 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작품은 Christine(크리스티네: 1958)였다.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의 희곡을 영화한 것으로 실은 1933년에 막스 오풀스(Max Ophuls)감독이 제작한 Liebelei(연인)이라는 영화를 리메이크 한 것이었다. 그런데 1933년의 Liebelei에는 로미의 어머니인 마그다 슈나이더가 주연으로 출연했었으니 어머니와 딸이 모두 같은 작품의 영화에 출연한 셈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로미는 크리스티네에서 프랑스의 알랭 들롱(Alain Delon)의 상대역으로 출연했다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어 1959년 파리에서 약혼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정식으로 결혼은 하지 않고 파트너로서 지냈다.

 

영화 크리스티네에서 알랭 들롱과 함께

 

알랭 들롱과 결혼하기로 한 로미는 비엔나를 떠나 당시 유럽 영화의 중심지인 파리에서 배우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로미는 파리에서 살면서 오손 웰스(Orson Welles)의 The Trial(심판)에 출연하여 미모뿐만 아니라 연기력으로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The Trial은 카프카의 동명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었다. 남편 알랭 들롱은 로미를 거장 루키노 비스콘티(Luchino Visconti)에게 소개해 주었다. 로미는 비스콘티의 주선으로 연극무대로 진출하였다. 로미는 1961년 현대극장(Theatre Moderne)에서 존 포드의 무대연극인 'Tis Pity She's a Whore(가련한 매춘부)의 여주인공인 아나벨라를 맡아 열연했다. 상대역인 조반니 역은 알랭 들롱이었다. 이어 영화 Boccaccio 70(보카치오 70)에 출연하였고 1962년에는 체호프의 연극 The Seagull(갈매기)에도 출연하였다. 로미는 잠시 할리우드에 가서 활동한 일이 있다. 이때에 잭 레몬과 함께 Good Neighbor Saam(굿 네이버 샘)에 출연했고 피터 오툴, 우디 알렌과는 What's New Pussycat?(푸시캣)에 출연했다.

 

엘리자베트(씨씨)왕비의 초상화 앞에서의 로미 슈나이더

 

1963년 로미와 알랭 들롱은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세계적인 뉴스였다. 그러나 비록 헤어지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평생을 좋은 친구로서 지냈고 영화에도 종종 함께 출연하였다. 예를 들면 La Piscine(수영장: 1968), The Assassination of Trotsky(트로츠키 암살: 1972) 등이었다. 로미는 1970년대에도 계속 프랑스에 머물면서 영화에 출연하였다. 1974년에 출연한 L'important c'est d'aimer는 로미에게 세자르상(Cesar Award)를 안겨준 작품이었다. 세자르상은 프랑스판 오스카상이다.

 

30세의 로미 슈나이더

 

로미 슈나이더는 씨씨에서 명랑하던 소녀 씨씨가 결혼생활과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를 보여주었지만 사실 아직도 소녀티를 벗지 못한 연기였다고 할수 있다. 하지만 바바리아 국왕 루드비히2세의 생애를 조명한 1972년 비스콘티의 작품인 Ludwig(루드비히)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엘이자베트보다 더 복잡하고 성숙하여 감정을 지닌 여인 역할을 보여주었다. 어느 때 로미는 '씨씨는 마치 오트밀처럼 까칠한 면이 있었다'고 말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로미는 1974년에 미셀 피콜리(Michel Piccoli)와 함께 Le Trio Infernal에 출연했도 1981년에는 리노 벤추라(Lino Ventura)와 함께 Garde a vue에 출연했다. 이 즈음에 로미에게는 기분 언짢은 일이 생겼다. 로미는 1979년 독일의 거장 감독인 라이너 베르너 파쓰빈더(Rainer Werner Fassbinder)로부터 The Marriage of Maria Braun(마리아 브라운의 결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여러가지 조건들을 협의하였으나 의견을 일치를 보지 못하고 협상이 결열된 일이 있다. 화가난 파쓰빈더 감독은 로미에 대하여 '미련한 암소'라고 불렀으며 이 소리를 들은 로미는 '그런 야수와 같은 사람하고는 절대로 일을 같이 하지 못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명랑하고 밝기만 했던 로미의 성격도 어느덧 우울하고 분을 참지 못하는 것으로 바뀌어져 가고 있었다.

 

 로미 슈나이더 프로필

 

1980년에 로미는 베트랜드 태버니어(Bertrand Tavernier)의 Death Watch(La mort en direct)에 출연하였다. 데이비드 콤튼(David Comptio)의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이었다. 로미는 죽어가고 있는 어떤 여인의 역할을 맡았다. 이 여인의 뇌에는 작은 카메라가 이식되어 있어서 그 카메라를 통해 텔리비전을 볼수 있었다. 아직도 젊은 로미 슈나이더는 사랑에 눈을 뜬 젊은 공주로부터 어느덧 죽어가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를 창조하게 되었다. 이제 잠시 로미 슈나이더의 개인 생활을 어떠했는지 알아보자.

 

첫번째 남편 알랭 들롱과 함께

 

로미는 1966년 7월 해리 마이엔(Harry Meyen: 1924-1979)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독일의 감독 겸 배우로서 결혼 13년만에 함부르크에서 자살을 했다. 자살의 이유는 분명치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들 데이비드 크리스토퍼(David Christopher)가 있었다. 1966년 12월에 태어났다. 그 아들이 1981년 15세 때에 사고로 죽었다. 계부였던 크리스토퍼의 아버지 집에 갔다가 장난 삼아서 끝이 뾰죽한 쇠창살의 담을 넘어가다가 동맥이 찔려서 심한 출혈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로미는 1975년 자기의 개인비서인 다니엘 비아시니(Daniel Biasini)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6년 후인 1981년 헤어졌다. 두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사고로 죽은 해였다. 하지만 세번째 남편과의 사이에는 딸 하나를 두었다. 1977년에 태어난 사라 비아시니(Sarah Biasini)는 영화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씨씨-어느 왕비의 운명의 해'의 한 장면 

 

로미 슈나이더는 1982년 5월 29일 파리의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전세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향년은 고작 44세. 참으로 짦은 인생이었다. 시체의 옆에는 독한 칵테일과 수면제가 놓여 있었다. 자살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검시결과 심장마비로 죽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로미 슈나이더는 몽포르 라모리(Montfort-l'Amaury)에 있는 부아씨 상 사부아(Boissy-sans-Avoir)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묘비에는 로미의 처녀시절 이름인 Rosemarie Albach라고 적혀 있다. 얼마후 첫번째 남편이었던 알랭 들롱은 데이비드 크리스토퍼의 유해도 이곳으로 가져와 엄마인 로미 슈나이더와 합장했다.

  

로미 슈나이더의 어머니인 마그다 슈나이더. 역시 이름난 여배우였다. 로미는정말 엄마를 많이 닮았다.

 

프랑스의 저널리스트인 유진 무아노(Eugene Moineau)는 1984년에 '프리 로미 슈나이더'(Prix Romy Schneider)를 제정하고 프랑스 영화산업에서 가장 유망한 여배우를 선장하여 시상하기 시작했다. 이 상은 명우 장 가뱅(Jean Gabin)을 기념하여 제정한 Prix Patrick Dewaere 와 함께 심사하여 수상자를 결정하고 있다. 1990년에 오스트리아의 쿠리어(Kurier) 신문은 Romy TV Award를 제정하였다. 2003년에 독일의 국영 TV는 영국에서의 100 Greatest Britons 와 같은 형태의 프로그램인 Unsere Besten(우리들의 최고) 프로그램을 통해 로미 슈나이더를 가장 위대한 독일인 78위로 선정하였다. 여배우로서는 말렌느 디트리히가 50위를 차지하였고 그 다음이 로미 슈나이더였다. 2002년까지 비엔나의 쥐드반호프(남부역)에서 그라츠까지 가는 인터시티 열차를 Romy Schneider 호라고 불렀었다. 로미 슈나이더의 생애를 그린 영화도 제작되었다. Eine Frau wie Romy(로미와 같은 여인)이라는 타이틀이며 여배우 이본느 캐터펠트(Yvonne Catterfeld)가 로미 역할을 맡았다. 2009년 독일 바덴-뷔르템버그의 하일브론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2009년 11월에는 독일연방공영방송인 ARD 방송이 제시카 슈봐르츠(Jessica Schwarz)를 로미로 내세운 TV 영화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ARD는 Die Erste 로서 방송하고 있으며 ARD국제음악콩쿠르로 유명하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50 km 떨어진 부아씨 상 사부아(Boissy-sans-Avoir) 공동묘지의 로미 슈나이더와 아들 데이비드 크리스토퍼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