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브라질의 이사벨라

이사벨 공주는 누구?

정준극 2010. 11. 24. 11:43

이사벨 공주는 누구?

 

도나 이사벨. 브라질의 노예해방을 위해 앞장섰다.

 

이사벨 공주는 브라질 제국의 제2대 황제 겸 마지막 황제였던 돔 페드로2세의 장녀로서 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황제 직무대리(섭정 공주)를 맡아 그 기회를 이용하여 브라질의 노예제도를 과감하게 철폐한 인물이다. 그래서 이사벨을 '구속자(救贖者) 이사벨'(Isabel the Redemptress)이라고 부른다. 이사벨은 브라질 황제의 법정 후계자로서 공식 명칭은 프린세스 임페리얼(Princess Imperial: 공녀)이지만 사실상 브라질의 여제(Empress)였다. 기왕에 황족 얘기가 나온 김에 이사벨의 풀 네임을 알아보면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 레올폴디네 아우구스타 미카엘라 가브리엘라 라파엘라 곤자가이다. 대천사의 이름은 모두 가져다가 붙였다. 이사벨은 아버지 황제인 돔 페드로2세를 대신하여 세번이나 직무대행 또는 섭정의 역할을 맡아했다. 돔 페드로가 해외여행을 갈 때면 의당 직무대리를 맡았다. 돔 페드로2세에게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돔 페드로2세에게는 딸만 둘이 있었다. 황제의 직무대리를 했던 경우는 첫번째가 1871년 5월부터 1872년 3월까지 약 1년 동안이었으며 두번째가 1876년 3월부터 1877년 9월까지 약 1년반 동안이었고 마지막으로는 1887년 6월부터 1888년 8월까지 역시 약 1년간이었다. 이 마지막 기간에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아버지 황제가 부재중에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브라질 제국의 마지막을 지켜보아야 했다.

 

리우 데 자네이로 대성당에서 이사벨의 황제 후계자(섭정 공주) 임영식. 1887년.

 

돔 페드로2세 황제는 그나마 선진적인 군주였다. 형님의 뒤를 이어 브라질 제국의 황제가 되자 브라질의 산업과 문화발전을 위해 무언가 기여를 하고 싶었다. 유럽의 선진 문물을 도입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속들을 거느리고 유럽 여행을 떠났다. 그러다보니 유럽이 너무 좋아서 자꾸만 더 있고 싶었다. 리우 데 자네이로의 형편없는 궁전에서 지내던 형편이었는데 유럽에 갔더니 대단한 대접을 받았다. 점차 세상 열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파리에도 가고 베니스에도 갔으며 밀라노에도 갔다. 그래서 자주 여행을 다니게 되었다. 돔 페드로2세는 브라질의 노예제도가 참으로 옳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노예제도를 원만하게 해결할수 있을까라며 걱정했다. 그러나 지배층의 거부반응이 완강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골치가 아픈 그는 바람도 쏘일 겸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1887년이었다.

 

이사벨의 아버지인 돔 페드로2세의 대관식

 

돔 페드로2세의 해외 여행중 직무대리를 맡은 이사벨 공주는 평소 노예제도의 폐지를 신중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아버지 황제가 여행을 떠나자 이사벨은 '때는 이 때다'라는 생각으로 아버지 황제와는 별로 상의도 하지 않은채 1888년 5월 13일 농업장관이며 상원의원인 로드리고 다 실바와 협의하여 노예폐지법안을 통과시켰다. 노예폐지법을 '레이 아우레아'(Lei Aurea)라고 불렀다. 영어로 말하면 Golden Law(황금률)이다. 이사벨의 결단은 수많은 노예들에게 희망의 불을 밝혀준 것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사벨을 '구속자 이사벨'이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교황 레오13세는 이사벨에게 교황청의 최고 영예인 '황금 장미'를 수여하였다.

 

브라질 원주민 노예 학대 장면. 간혹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도 있었다.

 

이사벨 공주는 1846년 리우 데 자네이로의 산 크리스토바오 궁전(Paco de Sao Cristovao)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이 브라질 제국의 황제인 돔 페드로2세이며 어머니는 시실리왕국 프란시스1세의 막내딸인 테레사 였다. 시실리 왕국은 '두개의 시실리 왕국'(Two Sicilies)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왕국으로 나폴리도 이에 속한바 있다. 이사벨의 위로는 아들이 태어났지만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남동생도 하나 있었지만 역시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이사벨의 아래로는 여동생 레오폴디네가 있다. 이사벨은 어떻게 생겼는가? 금발에 푸른 눈을 가졌으며 키는 크지 않았고 날씬한 편은 아니었다. 그리고 눈섶이 별로 없었다.

 

이사벨의 어머니인 시실리 왕국의 공주 테레사 크리스티나. 이 그림은 결혼 중매용으로 그린 것으로 실물에 비하여 훨씬 아름답게 그리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나중에 돔 페드로는 테레사 크리스티나를 만나보고 나서 '이건 아니올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사벨은 1864년, 18세 때에 프랑스의 오(Eu) 백작인 갸스통 도를레앙(Gaston d'Orleans)과 결혼하였다. 1842년생이므로 이사벨보다는 4세가 많았다. 프랑스 왕가인 오를레앙 가문의 출신이다. 이사벨의 여동생인 레오폴디네는 독일 작세-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와 결혼하였다. 두 자매의 결혼에는 사연이 있다. 오를레앙의 갸스통 공자와 작세-코부르크-고타의 아우구스트 공자는 한번도 만난 일은 없지만 얘기로 들은 브라질 제국의 두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함께 리우 데 자네이로를 찾아왔다. 원래 계획은 언니 이사벨이 아우구스트 공자와 결혼하며 동생 레오폴디네가 갸스통 공자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신통하게도 이사벨은 갸스통 공자를 마음에 들어했고 레오폴디네는 아우구스트 공자를 마음에 두었다. 아버지 돔 페드로2세 황제는 중매로 결혼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딸 들에게 마음대로 결정하라고 했다. 그리하여 원래 계획과는 달리 신랑들이 바뀌었다. 갸스통 백작과 결혼한 이사벨은 슬하에 1녀 3남을 두었다. 딸 루이사 비토리아, 아들 페드로, 루이스, 안토니오이다.

 

이사벨의 남편이 된 프랑스 오를레앙 가문의 갸스통  도(Gaston d'Eu) 백작. 갸스통 도 백작은 이사벨이 세상을 떠난지 1년 후인 1922년 브라질을 방문하기 위해 가던중 선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1889년 브라질 제국의 군부가 쿠테타를 일으켜 돔 페드로2세를 황제의 자리에서 축출하였다. 노예제도 폐지의 여파였다. 당시 돔 페드로2세는 파리를 여행중이었다. 돔 페드로2세는 1891년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혁명을 일으킨 군부는 브라질 제국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브라질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이사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브라질 제국의 여제가 되려던 기회를 잃었다. 이사벨과 가족들은 남편의 고향인 프랑스로 유배아닌 유배를 떠나야 했다. 이사벨은 오(Eu) 지방에 있는 샤토 도(Chateau d'Eu)에서 지냈다. 이사벨을 추종하는 세력들은 프랑스에 '브라질 제국 망명 정부'를 수립하고 이사벨을 법적인 여제(Empress)로 추대하였다. 그러기를 10년을 보냈다. 이제 브라질의 사정도 어느정도 좋아졌다. 브라질의 일각에서는 이사벨의 귀국을 종용하였다. 이사벨도 언제까지나 프랑스에서 눈치밥을 먹을 생각이 없었다. 1921년 여름, 이사벨은 가족들과 함께 브라질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병을 앓았다. 이사벨은 그해 11월 14일 샤토 도에서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향년 75세였다.

  

이사벨이 10년이 넘게 망명생활을 하며 지낸 프랑스의 샤토 도

 

이사벨은 임시로 프랑스의 샤토 도에 안치되었다. 그로부터 세월을 흘러 1953년이 되었다. 브라질 정부는 이사벨의 유해를 가져와도 좋다고 허락했다. 리우 데 자네이로에 도착한 이사벨의 유해는 리우 데 자네이로에서 65km 떨어져 있는 페트로폴리스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971년에 리우 데 자네이로의 산 페드로 데 알칸타라(Sao Pedro Alcantara) 대성당의 제국 영묘에 이장되었다. 이사벨은 브라질의 노예제도를 타파했으며 백성들을 사랑하여 존경을 받았다. 이사벨은 브라질의 현대 역사에 있어서 길이 기억되는 인물이다.

 

제국 영묘가 있는 리우 데 자네이로 인근의 산 페드로 알칸타라 대성당. 앞에는 운하가 조성되어 있다. 이곳에 이사벨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