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왕실의 미인들

인도의 가야트리 데비 공주

정준극 2011. 4. 29. 09:34

인도의 가야트리 데비(Gayatri Devi) 공주

 

마하라니 가야트리 데비 왕비

 

인도라는 나라는 하두 넓은 나라이기 때문에 영국이 영연방의 일원이 되어 식민지 통치를 받는 때만 해도 무려 650여개의 소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영국은 이들이 개별 왕국으로서 존속토록 하여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인도의 왕국 중에는 큰 왕국도 있었고 작은 왕국도 있었다. 그러다가 1947년 인도가 독립하자 왕국 제도를 없애고 공화국에 편입되었으며 대개의 경우, 큰 왕국의 군주들은 주의 총독(또는 지사)으로 임명하여 그 지방을 관할토록 하였다. 쿠츠 베하르(Cooch Behar)는 서부 벵갈에 있는 비교적 작은 왕국이었다. 지금의 서부 벵갈(West Bengal)주가 이에 속한다. 가야트리 데비(Gayatri Devi)는 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나던 해인 1919년에 쿠츠 베하르의 공주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그리고 놀랄만큼 아름다운 공주로서 성장하였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면 세계적인 패션 잡지인 보그(Vogue)는 가야트리 데비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10인중의 하나로 선정할 정도였다. 가야트리 데비는 패션계의 우상(이콘)이었다. 그러한 그가 소녀시절에 인도 자이푸르(Jaipur)왕국의 만 싱(Man Singh)2세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 세계적인 뉴스였다. 만 싱은 데비보다 아홉살이 많았다. 더구나 만 싱은 이미 두번이나 결혼하여 자녀도 가진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데비와 만 싱은 사랑으로 난관을 헤치고 결혼하였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 가야트라 데비는 인도의 정치계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다. 국회에도 진출하였다. 여러가지 자선사업과 육영사업에도 앞장 섰다. 전 인도가 그를 존경하였다. 가야트리 데위는 90세까지 장수하다가 2009년 7월 29일 지병으로 타계하였다. 가야트리 데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가야트리 데위 공주가 잠시 어린 시절을 보낸 인도 서부 벵갈의 쿠치 베하르 궁전

 

가야트리 데비 공주의 아버지는 쿠치 베하르의 왕자인 지텐드라 나라얀(Jitendra Narayan)이라는 사람으로 황태자(유브라자: Yuvraja)의 동생이며 어머니는 바로다(Baroda)왕국의 인디라 라제(Indira Raje)공주였다. 인디라 라제 공주는 바로다 왕국의 마하라자 사야지라오 가에크와드 3세의 유일한 딸로서 대단히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사교계에서도 놀랄만큼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었다. 가야트리 데비 공주의 미모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 가야트리 데비는 비스바 바라티(Visva-Bharati)대학교 부속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으며 그후 가족과 함께 스위스에 있을 때 로잔느에서 공부했고 이어 영국 런던의 비서학교에 다녔다. 가야트리 데비는 1940년 5월에 자이푸르 왕국의 사와이 만 싱(Sawai Man Singh)2세와 결혼하였다. 데비가 만 싱(애칭은 자이: Jai)을 처음 만난 것은 12살 때 칼커타에서였다. 자이는 폴로 경기에 출전하기 위해 칼커타에 왔으며 그때에 데비의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마하라니 가야트리 데비는 승마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다(데비는 결혼 후에 마하라니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마하라니(Maharani)는 마하라자(Maharaja)의 부인을 말한다. 마하라자는 왕 또는 군주를 말한다). 마하라니 가야트리는 여성으로서는 뛰어난 폴로 선수이기도 했다. 또한 사격실력도 훌륭했다. 특히 사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의 실력이 있었다. 마하라니 가야트리는 자동차를 좋아했다. W126을 최초로 인도에 수입하여 사용한 사람이다. 가야트리 데비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야가트 싱(Jagat Singh)왕자이다.

 

마라하니 가야트리 데위와 남편 마하라자 사와이 만 싱2세(Credit: AP)

 

데비의 어린시절은 두 명의 대단한 여인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한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쿠치 베하르의 마하라니로서 남편이 1922년에 세상을 떠나자 거의 10년이 넘도록 아들의 섭정으로서 왕국을 통치하였다. 두번째 여인은 바로다 왕국의 마하라니인 외할머니였다. 데비의 외할아버지는 바로다 왕국을 인도에서도 가장 선진화된 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외할머니의 기여는 상당했다. 데비는 그러한 외할머니를 어린 시절부터 무척 존경했었다. 데비는 두 여인의 영향을 받아 영국식 교육을 받고 영국식 사고방식을 가진 인도의 공주로서 자랐다. 데비는 자기 주장이 뚜렷하고 자기의 이상을 실현할 희망을 가진 여인으로서 성장하였다. 일례로, 가야트리 데비는 자이푸르에서 여성교육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여러 학교를 후원하였다. 가장 유명한 여학교는 1949년에 설립한 마하라니 가야트리 데위 여자공립학교이다. 예술과 공예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자이푸르의 특산인 청자의 염색 기술을 증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사람들은 그를 '리틀 데비'라고 불렀는데 알다시피 데비는 힌두교의 중심되는 여신이다.

 

사람들은 데비를 힌두의 신인 데비라며 찬양했다.

 

가야트라 데비의 친구들은 데비를 아예샤(Ayesha)라고 불렀다. 1940년에 그가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이푸르의 마하라자, 즉 자이와 결혼하겠다고 나섰을 때 인도는 물론 세계로부터 집중적인 관심을 받았다. 남편이 될 라이는 이미 두번이나 결혼을 했었고 데비와 결혼하는 것이 세번째 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가족의 반대가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데비가 처음 라이를 만났을 때는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데비가 12살 때였고 자이는 21세의 청년이었다. 당시 라이는 인도에서도 알아주는 멋있는 남자였다. 대단한 부자였을 뿐만아니라 핸섬하게 생겼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뛰어난 폴로 선수였다. 인도에서는 폴로를 잘 하면 대중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다. 라이는 폴로를 어찌나 잘 했던지 그가 선수로 되어 있는 자이푸르 팀이 시합에만 나가면 이겼다. 라이가 두번 결혼했다고 했지만 실상 그 결혼들은 정책적인 것이었다. 인도의 귀족 집안에서는 대개 다섯살만 되어도 결혼을 정하는 관습이 있다. 라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일찍 결혼하였고 사정상 또 결혼하였다. 하지만 라이는 아마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라이는 아름답고 활달한 데비 공주를 만나자마자 첫 눈에 반하였다. 라이가 알고 있는 라지푸르의 정통 여인들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데비가 런던의 몽키 클럽에 다니면서 교양을 쌓고 있을 때 두 사람은 은밀히 데이트하며 사랑을 키웠다. 그리고 결혼을 약속하였다. 두 사람은 비공식적으로 약혼까지 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알려지자 그야말로 양가의 반대가 물끓듯 했다. 그러다가 1939년에 두 사람이 결혼하겠다고 정식으로 발표하자 인도의 왕국들은 '아니, 정말 이럴수가?'라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1940년에 결혼하였다. 두 사람은 행복했다.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1962년, 데비는 또 다시 인도는 물론 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공화국이 된 인도에서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인도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군 필립공과 함께 벵갈 호랑이 사냥에 참가한 마하라니 가야트리 데비(가운데). 여왕의 왼쪽이 만 싱, 왼쪽 끝이 호랑이를 총으로 쏘아 잡은 필립공. 어린 아이는 찰스 왕자. 어쩌자고 이렇게 잔인하게 호랑이를 죽였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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