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이야기/왕실의 미인들

세계사에 영향을 준 문제의 미인들

정준극 2012. 5. 21. 11:10

세계사에 영향을 준 문제의 10명의 미인들

 

인터넷의 정보-교육 목적의 사이트인 부키사(Bukisa)가 2009년 3월에 조사한 역사상 중요한 인물들(남자)과 관련이 있어서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여인들중 10명을 선발하여 소개하였기에 본 블로그에서도 심심하던 판에 소개코자 한다. 물론 이들 여인들은 미모도 미모려니와 사회적, 정치적으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이다. 부키사는 웹키아(Webkia)가 개발한 사이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수많은 여인들이 인류의 역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그중에 어떤 여인들은 위대한 지도자였다. 나머지 여인들은 위대한 인물들의 부인이거나 어머니이거나 누이였다. 또 어떤 여인들은 유명한 지도자의 정부이기도 했다.

 

1. 마리 봘레브스키 백작부인(Countess Marie Walewski)

폴란드의 아테나시우스 봘레브스키(Athenasius Walewski) 백작의 부인인 마리 봘레브스키(1786-1817)는 나폴레옹 황제와의 염문으로 유명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대단히 열정적인 것으로 알려져서 더 유명했다. 1810년 5월, 마리는 알렉산드르 봘레브스키라는 아들을 낳았다. 나폴레옹의 아들이었다. 이 아이는 나중에 프랑스의  정치가가 되었다. 마리 봘레브스키 백작부인은 나폴레옹과 염문을 가질 때에 22세였다. 푸른 눈과 금발의 마리는 과연 미인이었다. 마리 봘레브스키 백작부인은 나폴레옹에게 전쟁 좀 그만하고 프랑스에서 조용히 지내자고 제안했었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그말을 들었더라면 수많은 목숨이 전쟁에서 희생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마리 봘레브스키

 

2. 폴랭 벨리슬 훠어스(Pauline Bellisle Foures)

나폴레옹의 또 다른 정부였다. 나폴레옹은 부인인 조세핀이 다른 남자와 불륜을 저질렀다고 믿어서 반감으로 폴랭을 정부로 삼았다. 폴랭 벨리슬 훠어스는 어떤 젊은 장교의 부인이었다. 폴랭은 군인들 사이에서 '나폴레옹의 클레오파트라'라고 알려졌었다. 만약 폴랭이 나폴레옹에게 정치적인 조언을 했고 나폴레옹이 그를 받아들였다면 유럽의 정세는 사뭇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폴랭 벨리슬 훠어스

 

3. 에바 브라운(Eva Braun)

에바 브라운의 이야기는 길지 않지만 비극적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대단히 흥미롭다. 에바 브라운은 아돌프 히틀러의 정부였으나 나중에는 정식부인이 되었다. 에바 브라운이 어떤 생활을 했는지에 대하여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마치 비밀에 쌓인듯하다. 더구나 에바 브라운은 모임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히틀러와 에바는 1929년에 뮌헨에서 처음 만났다. 에바가 17세였고 히틀러가 40세였다. 두 사람의 애정행각은 두 사람이 운명적인 동반자살을 할때까지 15년이나 계속되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에바와 함께 권총자살을 했으며 그 전날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에바는 히틀러의 40시간 동안의 정식부인이었다. 만약 에바가 히틀러에게 여러 평화적인 조언을 했고 히틀러가 그런 조언을 받아들였다면 2차 대전의 양상은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다.

 

에바 브라운

 

4. 클라라 페타치(Clara Petacci) - Claretta Petacci

클라라 페타치는 이탈리아의 독재자인 베니토 무솔리니의 정부였다. 클라라는 로마 출신의 미인이었다. 클라라는 무솔리니보다 29년 연하였다. 클라라는 무솔리니가 최후를 맞이할 때에 함께 있었다. 1945년 4월 28일(히틀러가 자살하기 이틀전),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타치는 메짜그라(Mezzagra)라는 곳으로 끌려가 두 사람 모두 총살되었다. 이튿날, 무솔리니와 클라라 페타치의 시신은 밀라노의 피아쩰라 로레토로 운반되어 에소주유소 앞의 공터에 거꾸로 매달린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모여들어 두 사람의 시신에 대하여 분노를 표출했다.

 

클라라 페타치

                

5. 마르게리타 사르화티(Margherita Sarfatti)

1880년에 태어나 1961년에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의 저널리스트, 예술평론가, 예술후원가, 예술품수집가인 마르게리타 사르화티는 무솔리니의 정부 중 한 여인이었다. 마르게리타 사르화티는 부유한 유태인 변호사의 딸이었다. 마르게리타 사르화티는 1911년에 무솔리니를 만나 그때부터 정부로서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는 수준 높은 지식인으로서 무솔리니를 주축으로 한 이탈리아 파치슴의 발전에 두드러진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를 통해 파치슴에 열심이었던 실제 속셈은 무솔리니의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회피코자 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는 1938년에 이탈리아를 떠나 아르헨티나로 갔다. 그리고 1947년에 전후의 이탈리아로 돌아갔다. 이탈리아에 돌아온 그는 오로지 예술계에서만 활동하였다.

 

마르게리타 사르화티

                         

6.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Servilia Caepionis)

줄리어스 시저의 정부라고 하면 누가 뭐래도 클레오파트라를 생각할 터인데 그건 우리 생각이고 실은 로마에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라는 여인을 정부로 두고 있었다.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는 기원전 107년에 태어나 BC 42년에 세상을 떠났다. 로마사를 얘기함에 있어서 로마황제의 이름들을 거명할 때에 함께 거론되는 여인으로는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가 유일하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줄리어스 시저의 정부였으니 말할 나위가 없다.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는 줄리어스 시저보다 몇년 연상이었다. 그런데도 시저는 세르빌리아를 끔찍하게 여겼다. 시저가 골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마로 귀환활 때에 세상에서 가장 비싸다는 흑진주를 세르빌리아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샀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는 마르쿠스 카토(아들)과 이복 남매였다. 세르빌리아는 처음에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과 결혼했다. 아들을 낳았으니 그 이름은 브루투스였다. 브루투스는 나중에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사람의 운명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 아닐수 없다. 세르빌리아는 당시 로마의 다른 정부들과는 달리 대단히 대담한 여인이었다. 그는 시저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만일 그가 시저를 만나고 싶을 때에는 미리 찾아가겠다고 알렸다. 그래서 시저와 세르빌리아의 염문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

                                

7. 클레오파트라(Cleopatra) - 클레오파트라 7세

이집트의 여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는 세르빌리아 키피오니스와 마찬가지로 줄리어스 시저의 정부였다. 다만, 세르빌리아와 다른 점이 있다면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의 아들인 시저리온(Caesarion)을 낳았다는 것이다. 시저리온은 나중에 톨레미 15세로서 이집트를 통치하였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8. 아스파시아(Aspasia)

아스파시아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지만 고대 그리스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여인이었다. 아스파시아는 아테테의 정치가인 페리클레스(Pericles)와 염문이 있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BC 470년에 태어나 BC 40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밀레시아 출신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아테네에서 보냈다. 그러므로 페리클레스에게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따라서 아테네의 정치에도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스파시아의 이름은 당대의 철학자들인 플라토, 아리스토파네스, 세노폰(Xenophon) 등의 저서에 등장할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두었다. 페리클레스 2세로서 나중에 아테나군의 장군이 되었으나 아르지누새(Arginusae)전투에서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아스파시아

                            

9. 마담 드 뽕빠두(Madame de Pompadour)

루이 15세의 정부로서 프랑스 정치와 문화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마담 드 뽕빠두의 원래 이름은 잔느 앙투아네트 뿌아송(Jeanne-Antoinette Poisson)이었다. 원래는 뽕빠두 후작부인이었기 때문에 편의상 마담 드 뽕빠두라고 부르는 것이다. 1721년에 태어나서 1764년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 앙뚜아네트와는 불편한 관계였다는 얘기도 있다.

 

마담 드 뽕빠두

                             

10. 릴리 랑트리(Lillie Langtry)

릴리 랑트리의 원래 이름은 에밀리 샬로테 르 브레턴(Emilie Charlotte Le Breton)으로 1853년에 태어나 1929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국의 인기배우였다. 태어나기는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안선 아래쪽에 있는 저시섬(Island of Jersey)에서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저시 릴리'(Jersey Lily)라고 불렀다. 저시 릴리는 여러 애인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남자는 빅토리아여왕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였다.

 

릴리 랑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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