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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상 가장 뛰어난 여류 작곡가 릴리 불랑제

정준극 2011. 5. 20. 08:23

릴리 불랑제(Lili Boulanger)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뛰어난 여류 작곡가

 

24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작곡가 릴리 불랑제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누가 가장 뛰어난 여류 작곡가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무릇 어떤 한 사람을 한 분야의 제1인자로 꼽는 것은 아무래도 객관적일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악사상 가장 훌륭한 작곡가는 아무래도 프랑스의 릴리 불랑제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주위의 한결같은 주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릴리 불랑제라는 여성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릴리 불랑제의 원래 이름은 마리-줄리엣 올가 릴리 불랑제(Marie-Juliette Olga Lili Boulager)이다. 1893년 8월 21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역시 작곡가인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 1887-1979)의 여동생이다. 그래서 이 두사람의 여류 작곡가를 '불랑제 시스터스'라고 부른다. 릴리는 어릴 때부터 음악의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릴리의 음악적 재능은 이미 두살 때부터 보이기 시작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릴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어린 릴리가 피아노를 치는 것을 보고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릴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 다 음악가였다. 릴리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릴리의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릴리의 아버지는 릴리가 태어날 때에 무려 77세였다. 대단한 노익장이었다. 그런데도 어린 릴리는 아버지를 무척 따랐다. 어머니인 라이싸 미셰츠카야는 러시아의 왕족이었다. 말하자면 공주의 신분이었다. 음악공부를 하러 파리에 왔다가 파리음악원에 다닐 때에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릴리의 아버지인 어네스트 불랑제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어 결혼하였다. 릴리의 할아버지인 프레데릭 불랑제는 이름난 첼리스트였고 릴리의 할머니인 줄리엣 불랑제는 유명한 소프라노였다. 아무튼 음악가 집안이었다.

 

릴리의 언니인 나디아. 1960년

 

릴리의 언니인 나디아도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었다. 나디아는 겨우 10세 때에 파리음악원에 들어가 나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부하였다. 릴리는 시간만 있으면 그런 언니를 파리음악원의 교실까지 따라가서 함께 앉아 있었다. 얼마후 릴리는 정식으로 파리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아마 파리음악원의 역사상 가장 연소한 학생이었을 것이다. 릴리는 파리음악원에서 주로 그 어려운 음악이론을 공부했으며 아울러 오르간,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하프도 배웠고 노래공부도 하였다. 아무튼 모두들 릴리를 보고 '어디서 저런 아이가 왔는지 모르겠다'면서 놀랐다. 릴리는 19세에 음악도로서는 최고의 영예라고 하는 그랑 프리 드 롬(Grand Prix de Rome) 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에 가서 음악공부를 할수 있는 특전이 부여되는 상이었다. '파우스트와 엘렌'(Faust et Helene)라는 칸타타로 상을 받았다. 명문의 파리음악원에서 여자로서 그랑 프리 드 롬을 받은 것은 릴리가 최초였다. 언니인 나디아는 그랑 프리 드 롬에 네번이나 도전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생각한 언니는 그랑 프리 드 롬에의 도전을 포기하고 동생 릴리의 학업을 도와주는 일에 더욱 주력하였다. 그러므로 릴리 불랑제는 나디아 불랑제의 첫번째 제자이기도 했다. 그후 릴리는 폴 비달(Paul Vidal), 조르즈 코싸드(Georges Caussade),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로부터 사사했다. 포레는 특별히 릴리의 재능을 사랑하여서 릴리에게 가곡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시켰다.

 

작곡에 여념이 없는 릴리 불랑제

 

릴리가 존경하여 마지 않았던 아버지 프레데릭은 릴리가 여섯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하기야 나이가 어느덧 83세가 되었으니 당시로서 오래 살기는 오래 살았던 셈이었다. 하지만 어린 릴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훗날 릴리의 작품들이 대개 슬픔과 비탄을 주제로 했던 것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기억하여서였다고 한다. 릴리의 작품에 비록 비탄적인 주제가 많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릴리의 작품은 화려한 하모니와 기악적 테크닉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곡이나 오페라의 경우에는 대본의 세팅이 대단히 정교하고 치밀하였다. 릴리의 작품에는 포레나 드빗시의 영향이 묻어 있다. 그리고 아서 오네거는 릴리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릴리 불랑제

 

릴리의 생활과 작품활동은 뜻하지 아니한 신병으로 고통을 받았다. 어릴 때에 기관지 폐렴을 알았던 것이 나중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면역체계가 약해 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는 24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결핵이 확대되어 세상을 떠났다. 릴리는 여행을 좋아하였다. 그래서 그랑 프리 드 롬을 받아 이탈리아로 가게 되자 뛸 듯이 기뻐하였다. 하지만 병으로 인하여 이탈리아에서 중도에 파리로 돌아와야 했다. 파리에 돌아온 릴리는 언니 나디아와 함께 1차 대전으로 부상 당한 프랑스 병사들을 돌보는 일을 자원봉사하였다. 자기의 생애가 얼마 안 있으면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한 릴리는 그동안 미완성으로 놓아 두었던 작품들을 완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서재에서의 릴리. 결혼을 하지 않았다.

 

릴리 불랑제는 1918년 3월 15일 파리 북부의 일 드 프랑스 지방에 있는 메지 쉬르 세느(Mezy-sur-Seine)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파리의 몽마르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오페라 La princesse Maleine(말레느 공주)를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미국의 음악사학자인 레오니 로젠슈티엘(Leonie Rosenstiel)은 The Life and Works of Lili Boulanger(릴리 불랑제의 생애와 작품)이라는 전기적인 책을 펴냈다. 1979년 언니 나디아가 세상을 떠났다. 동생 릴리보다 무려 60여년을 더 살았다. 나디아 불랑제는 몽마르트 언덕, 동생 릴리의 묘지 바로 옆에 묻혔다. 예술학과로 유명한 보스턴의 웰슬리대학(Wellesley College)는 릴리 불랑제를 기념하여 '릴리 불랑제 국제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은 해마다 유능한 작곡가 또는 연주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태양계의 화성과 목성 사이에 있는 소행성 지역은 릴리 불랑제를 기려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 1181 Lilith라는 소행성 그룹이다.

 

릴리 불랑제가 남긴 주요 작품은 대략 다음과 같다.

- 메조소프라노, 테너, 바리톤,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나 '파우스트와 엘렌'(1913)

- 관현악곡 '봄의 아침'(D'un matin de printemps) (1917-18)

- 관현악곡 '슬픔의 저녁'(D'un soir triste) (1917-18)

- 테너, 합창, 오르간,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편 24편' (1916)

- 시편 129편

- 알토, 테너, 합창, 오르간, 오케스트라를 위한 '시편 130편' (1910-17)

- 피에 예수(Pie Jesu)

 

파리의 몽마르트에 있는 릴리 불랑제의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