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페스티벌/잘츠부르크 축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정준극 2012. 1. 21. 17:49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Salzburger Festspiele - Salzburg Festival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중의 지멘스 후원의 행사. 대성당 광장


오늘날 세상에 수많은 음악제가 있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발만큼 역사와 전통이 있고 내실 있는 음악제는 찾아 보기 힘들 것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 처음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 1920년이니 2020년으로서 1백주년을 맞는다. 그만큼 연륜이 깊은 음악제이다. 또한가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특징은 다른 음악제들이 오페라 페스티발, 옛음악 페스티발, 현악4중주 페스티발 등 음악에 중점을 두었으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은 음악의 여러 장르에 대한 축제일 뿐만 아니라 연극과 발레도 겸하는 축제라는 것이다. 연극에는 잘츠부르크의 전통인 인형극도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라고 하면 매년 여름철에 열리는 페스티발을 말한다. 대체로 7월말부터 시작하여 5주간 계속된다. 그런데 여름철 페스티발 이외에도 부활절 페스티발, 오순절 페스티발 등도 별도로 진행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은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가 태어난 곳이라는 특별한 사연도 작용하는 페스티발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하일라이트 중의 하나는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연극인 '예더만'(Jedermann: Everyman)을 매년 공연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전통으로 이어져 왔다.


'예더만'의 한 장면. 젠타 버거와 막시밀리안 셸


모차르트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음악제가 처음 열린 것은 1877년이었다. 국제모차르트재단(International ozarteum Foundation)이 주관하여서였다. 그러나 매년 열리는 것은 아니었고 간헐적이었다. 그나마 그것도 1910년에는 여러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1914년에 다시 음악제를 갖자는 계획이 있었으나 바로 그 해에 1차 대전이 터지는 바람에 어느정도 준비까지 했지만 취소되었다. 그러나 비록 전쟁 중이었지만 음악제를 갖자는 열망은 식지 않았다. 1917년에 변호사인 프리드리히 게마허(Friedrich Gehmacher: 1866-1942)와 음악학자인 하인리히 다미슈(Heinrich Damisch: 1872-1961)가 뜻한바 있어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협회'(Salzburger Festspielhaus-Gemeinde)를 구성하고 '잘츠부르크크 페스티발'을 갖기로 했다. 페스티발은 음악과 연극을 함께 공연하는 것으로 하되 음악은 주로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으로 추진했다. 그러나 구상은 좋았지만 역시 전쟁 때문에 음악제가 열릴수 없었다. 1918년에 전쟁이 끝나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을 열자는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5인의 전문가들이 발벗고 나섰다. 시인이며 극작가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ahl), 작곡가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rauss), 무대 디자이너인 알프레드 롤러(Alfred Roller), 지휘자 프란츠 샬크(Franz Schalk), 그리고 당시 베를린의 독일극장(Deutsches Thr) 극장장으로 무대감독인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였다. 막스 라인하르트는 1911년에 후고 폰 호프만슈탈의 '예더만'을 베를린의 슈만 서커스(Zirkus Schumann) 아레나에서의 초연을 무대감독한바 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설립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인 극작가 겸 시인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1874-1029). 그는 비엔나의 유태인 은행가의 딸인 게르트루트 '거티' 슐레징거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아들 프란츠는 1929년 7월에 자살하였다. 후고는 아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고 나서 이틀 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후고는 나치가 득세하였을 때에 부인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들 다섯 명의 노력으로 1920년 8월 20일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 정식으로 개최될수 있었다. 1920년 페스티발은 잘츠부르크 대성당 앞 광장에서 '예더만'을 공연하는 것으로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개막공연의 '예더만'은 당대의 연극배우인 알렉산더 모이씨(Alexander Moissi)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오프닝에 '예더만'을 대성당 앞 광장에서 공연하는 것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1921년부터는 실내악과 오케스트라 음악을 함께 공연하기 시작했다. 잘추브르크 페스티발에서 오페라를 처음 무대에 올린 것은 1922년으로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이 공연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지휘한 것이었고 출연진은 대체로 비엔나의 슈타츠오퍼에서 초빙한 성악가들이었다. 당대의 테너 리하르트 타우버(Richard Tauber)는 이 공연에서 돈 오타비오를 맡았다.


2016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의 '돈 조반니'. 체를리나에 소프라노 발렌티나 나포르니타. 빈 필하모닉 코러스.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트 하우스 무대. '돈 조반니'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역사에서 처음 공연된 오페라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협회'는 한해 두해가 지나자 별도의 공연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1925년에 묀흐스버그()의 북쪽 자락에 있는 과거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마사(馬舍)를 개조하여 공연장으로 만들었다. 오스트리아의 건축가이며 무대 디자이너인 클레멘스 홀츠마이스터(Clemens Holzmeister)의 기여가 컸다. 그것이 오늘날의 '펠젠라이트슐레 극장'(Felsenreitschule Theater)이다. 개관기념 공연은 이탈리아 베니스의 귀족인 카를로 고찌(Carlo Gozzi: 1720-1806)의 희곡 '투란도트'였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 공식적으로 출범한지 불과 5년밖에 안되었지만 1925년에 이미 페스티발의 규모는 상당히 확장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서 오스트리아 공영방송인 RAVAG(현재의 ORF)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실황을 중계방송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듬해인 1926년에는 펠젠라이트슐레 극장에 부속되어 있는 승마학교 건물을 개조하여서 극장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극장의 개관기념 공연은 카를로 골도니의 코미디인 '두 주인의 하인'(The Servant of Two Masters)였다.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원래 콘서트에나 적당한 오리지날 페스티발 홀을 개조하여 일반 콘서트는 물론 오페라도 공연할수 있는 본격 무대의 극장으로 만들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을 위한 제 3의 공연장으로 모차르트를 기념하여서 '모차르트 하우스'(Haus für Mozart:House for Mozart)가 마련되었다.


골도니의 연극 '두 주인의 하인'의 한 장면. 웰링턴. '두 주인의 하인'은 새로운 극장의 개관 기념 공연이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이전인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와 브루노 발터와 같은 위대한 지휘자들이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을 위해 지휘봉을 들었다. 1936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저 유명한 '트랍 패밀리 싱어스'(Trapp Family Singers)의 공연이 있었다. 그 이야기는 훗날 뮤지컬과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것이 되었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트랍 패밀리가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연주한 것이 1936년이 아니라 1938년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구설수에 올랐다. 1937년에는 보이드 닐(Boyd Neel)과 그의 오케스트라가 벤자민 브리튼의 '프랭크 브릿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a Theme of Frank Bridge)을 초연하였다. 그러다가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은 큰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토스카니니는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에 항의하여서 사퇴하였다. 유턔계의 예술가들인 막스 라인하르트와 게오르그 솔티 등은 이민의 길을 떠났다. 연극 '예더만'도 마지막 공연을 가질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스티발은 1944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당시 나치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의 지시로 중단되었다. 이른바 '7월 20일 음모'에 대한 보복조치의 일환이었다. '7월 20일 음모'란 1944년 7월 20일에 동부 프러시아에 있는 히틀러의 은신처인 '늑대의 굴'이란 장소에서 히틀러를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일명 '발키리 작전'이라고 불리는 최대 규모의 쿠테타 시도였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은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돌아간 1945년 여름에 다시 개최되었다.


아루트로 토스카니니는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을 항의하여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지휘자를 사임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어느정도 안정되기 시작하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도 천천히 명성을 되찾기 시작했다. 특히 1956년에 잘츠부르크 출신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예술감독을 맡게 되어 그러했다. 당시의 페스티발은 주로 모차르트의 작품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1960년에 대연주회장(Grosses Festspielhaus)가 마침내 문을 열게 되었다. 이로써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은 오페라, 드라마, 클래시컬 콘서트의 연주회장으로서 명성과 위상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오페라는 주로 모차르트와 리하르트 슈타르우스의 작품에 중점을 두었지만 다른 작곡가들의 오페라, 예를 들면 베르디(활슈타프)와 베토벤(휘델리오)의 오페라도 무대에 올려졌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고전적인 면모는 1989년 카라얀이 세상을 떠나자 급격하게 모던의 분위기로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 주역은 감독인 제라르드 모르티에(Gerard Mortier)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2001년에 감독이 된 페터 루치카(Peter Ruzicka)도 페스티발의 현대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명성을 세계에 드 높인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그는 섬머 페스티발에 직접 관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터(부활절) 페스티발의 발족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2006년에 페스티발은 위르겐 플림(Jürgen Flimm)과 콘서트 감독인 마르쿠스 힌터호이저(Markus Hinterhäuser)에 의해 주도되었다. 2006년은 마침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였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은 이를 기념하여 모차르트의 오페라 22편을 모두 무대에 올리는 장거를 이룩하였다. 그 중에는 미완성인 오페라들도 새롭게 발굴하여 공연하는 역사적인 사업도 포함되었다. 22편 오페라의 공연실황은 모두 DVD로 만들어져서 2006년 11월부터 발매되기 시작했다. 대규모 공연장인 '모차르트 하우스'가 문을 연것도 2006년이었다.


'모차르트 하우스'(Huas für Mozart)의 무대와 오디토리엄. 이로써 오페라, 발레, 연극 공연은 물론 교향악단 연주회 등을 충분히 치룰수 있는 공연장이 마련되었다.


2010년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90주년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여 독일 칼스루에 출신의 볼프강 림(Wolfgang Rihm: 1952-)이 작곡도 하고 대본도 쓴 오페라 '디오니소스'(Dionysos)가 세계초연되었다. 볼프강 림은 모차르트와 첫 이름이 같아서 잘츠부르크에서 호감을 받기도 했다. '디오니소스'는 허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디오니시안 디티람브스'(Dionysian-Dithyrambs)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이다. 2011년에는 페스티발 감독인 플림(Flimm)이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감독으로 가는 바람에 알렉산더 페레이라(Alexander Preira)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페레이라의 정책은 새로운 제작의 오페라만을 페스티발의 무대에 올린다는 것이었다. 예산을 많이 들지만 페레이라의 시도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위상을 높이는 기여를 했다. 페레이라는 2014년에 라 스칼라의 총감독이 되기 위해 잘츠부르크를 떠나야 했고 후임은 2012년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의 드라마 감독으로 활동했던 스벤 에릭 베흐톨프(Sven-Eric Bechtolf)가 일단 직무대리로 취임하였다. 스벤 에릭 베흐톨프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발로서는 처음으로 예술적 프로그램을 책임지는일을 맡았다. 한편, 예산 삭감으로 페레이라의 '새로운 제작만을'이라는 구호는 일단 후퇴를 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2015년에는 다만 세편의 오페라만이 새로운 제작으로서 공연되었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베토벤의 '휘델리오', 그리고 볼프강 림의 '멕시코 정복'(Die Eroberung von Mexico)였다. 이외에 무대에 올려진 오페라는 네편으로 벨리니의 '노르마',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레', 글룩의 '터리드의 이피제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였다. 이들 네편의 오페라는 과거 공연의 리바이발이었다. 2018년에는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제작되었는제 잘츠부르크 페스티발 연혁에 있어서 처음으로 여성인 리디아 슈타이어가 제작을 맡은 것이었다.


볼프강 림의 '디오니소스'. 잘츠부르크 초연. 2010년.


이건 다른 얘기지만 잘츠부르크 페스티발로 인한 경제효과는 어느정도인가? 마침 2017년 자료가 있기에 소개한다. 티켓 판매 수입은 총 2천 7백만 유로에 이른다. 약 350억원이다. 페스티발로 인하여 잘츠부르크시에 주는 경제적 효과는 엄청나다. 1년에 약 2천 5백억 정도가 된다. 참석자들의 여행경비, 체재비, 관광비 등등 부가적인 경제효과가 엄청나다. 페스티발로 인한 고용효과도 대단하다. 잘츠부르크에서만 2천 8백명의 상시 고용인원이 있으며 오스트리아 전체로 보면 3천 4백명의 고용효과가 있다. 그리고 페스티발로 인한 정부의 세수는 7천 7백만 유로, 즉 약 1천억원에 이른다. 이쯤 되면 페스티발로 인한 경제효과가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같은 수치는 잘츠부르크 섬머 페스티발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고 이스터 페스티발, 휘트선 페스티발을 망라한 것이다.


잘츠부르크 국제공항. 알프스의 만년설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페스티발을 위해 매년 수많은 인파가 이 공항을 이용하고 있다.


이상의 잘츠부르크 섬머 페스티발을 중심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이라고 하면 부활절 페스티발과 성령강림절 페스티발도 당연히 포함된다.


잘츠부르크 성령강림절(또는 오순절) 페스티발은 부활절 후의 일곱번째 주간에 열리는 페스티발이다. Salzburger Pfingstfestspiele 라고 하며 국제적인 명칭으로는 Salzburg Whtsun Festival 이라고 한다. 성령강림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후에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이 예루살렘의 어느 다락방에 모여 기도에 힘쓰고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성령의 불길이 다락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강림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독일어로는 Pfingst 라고 하지만 영국에서는 Whitsun 이라고 하며 미국에서는 Pentecost 라고 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은 영국의 표현을 공식명칭으로 채택하였기 때문에 Salzburg Whitsun Festival 이 된 것이다. 이 페스티발은 1973년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주도하여 착수된 것이다. 주로 짧은 콘서트로서 프로그램을 구성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타이틀도 Pfingstkonzerte(성령강림절 콘서트)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오늘날에는 4일동안 매일 여러 연주회가 열리는 페스티발로 발전하였다. 제1회 성령강림절 페스티발은 브루크너의 교향곡에서 세편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의 지휘로 베를린 필이 그로세스 페스트슈필하우스에서 연주하였다. 그 다음 해에는 오페라도 프로그램에 추가되었다. 그리고 콘채르트라는 명칭은 공식적으로 페스티발로 변경되었다. 1990년대부터는 바로크 레퍼토리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예를 들어서 2005년에는 헨델의 '아치스와 갈라테아'(Acis and Galatea)와 그의 오라토리오 '솔로몬'(Solomon)이 성령강림절 페스티발에 공연되었다. 2007년부터는 리카르도 무티가 예술 감독으로서 5년간 활동하게 되었다. 무티의 시기에는 희귀 오페라의 공연에 많은 노력이 기울여졌다. 주로 18세기와 19세기 초반의 나폴리 학파에 의한 오페라들이 모차르트 하우스의 무대에 올려졌다. 2012년부터는 무티의 후임으로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가 5년 임기의 예술감독에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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