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 작곡가/독일-오스트리아

펠릭스 드래제케(Felix Draeseke)

정준극 2012. 2. 14. 14:17

펠릭스 드래제케(Felix Draeseke)

리스트와 바그너도 찬사를 보낸 신독일학파의 작곡가

 

 

펠릭스 아우구스트 베른하르트 드래제케(Felix August Bernhard Draeseke: 1835-1913)는 프란츠 리스트와 리하르트 바그너 조차 찬사를 보냈던 '신독일학파'(Neudeutsche Schule: New German School)에 속한 작곡가이다. 드래제케는 8편의 오페라와 무대작품, 4편의 교향곡, 기타 성악곡과 실내악 작품을 남겼다.

 

펠릭스 드래제케는 독일 코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 코부르크는 프랑코니아 공작영에 속하여 있었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음악에 매력을 느껴 작곡을 시도했다. 첫 작품은 놀랍게도 여덟살 때 만든 것이었다. 청년이 된 그는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선언하고 라이프치히음악원에 들어가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라이프치히음악원에서의 공부는 그다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1년후,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본 그는 봐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중심에 모인 '신독일학파'에 관심을 갖고 결국 이들과 합세하였다. 드래제케는 봐이마르에서 6년을 지냈다. 그는 1862년에 독일을 떠나 스위스의 로잔느에 일단 정착하였다. 이곳에서그는 무려 14년간이나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며 음악활동을 했다. 독일로 다시 돌아오기로 결심한 그는 1876년에 드레스덴에 정착키로 결정하였다. 드레스덴에 온 그는 작곡을 하면서 생활을 하였으나 공식적으로 드레스덴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된 것은 드레스덴에 온지 8년 후인 1884년이었다. 그리고 58세가 되던 1894년에 그는 전에 그의 제자였던 프리다 노이하우스와 결혼하였다. 그제서야 생활에 안정을 찾았던 것이다. 그는 1912년에 그의 마지막 작품인 교향곡 제4번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3년 2월,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드레스덴의 톨케비츠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드래제케는 작곡을 함에 있어서 각 장르의 작품을 골고루 작곡하는 성향을 보여주었다. 교향곡, 협주곡, 실내악곡, 솔로 피아노를 위한 작품 들을 골고루 작곡한 것이다.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인 Sonata quasi Fatasia는 리스트로부터 더 할수 없는 찬사를 받은 작품이다. 리스트는 이 작품을 베토벤 이후에 가장 중요한 피아노 소나타라고 말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드래제케는 사회적으로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의 작품도 음악계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관심을 끌지 못했다기 보다는 무시당하였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드래제케는 바그너의 충실한 후계자라고 볼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바그너와 같은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찾아볼수 있다. 어찌보면 그의 작품은 Gesamtkunstwerk(총체적예술작품)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드래제케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도 그랬지만 사후에 더욱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는 그의 반대파들도 그의 음악만큼은 존경했다. 당시 독일의 저명한 연주가와 지휘자들은 드래제케의 작품을 자주 연주하였다. 한스 폰 뷜로우, 아르투르 니키슈, 프리츠 라이너, 칼 뵘 등이었다. 그러나 어느때 폰 뷜로우가 말한대로 드래제케는 'harte Nuss'(깨기 어려운 호두)였다. 드래제케의 작품은 대단히 수준이 높았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한편 드래제케는 성격이 유별나서 다른 사람을 비판할 일이 있으면 참지 못하였다. 그래서 지인들과의 관계가 이상하게 변질되는 경우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의 관계였다. 1905년에 드래제케는 Die Konfusion in der Musik 이라는 팜플렛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공격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드래제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아 존경을 하고 있었으나 드래제케가 살로메를 형편없다고 비판하는 바람에 두 사람의 관계는 어색하게 되었다.

 

드래제케의 음악은 독일 제3제국 시기에 진흥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자 그의 이름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그리고 사조의 변화에 의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그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드래제케의 연주회가 열리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드래제케의 오페라 수첩]

● Koenig Sigurd(에마누엘 가이벨의 지구르트에 기본을 둔 3막의 오페라: 1853-57) ● Dietrich von Bern(3막의 오페라: 1877) ● Gudrum(3막의 오페라: 1879-84) ● Bertram de Born(3막의 오페라: 1892-94)

 

합창곡은 다음과 같다.

● Christus(전주곡과 세편의 오라토리오로 구성된 미스테리움: 1895-99) 전주곡: 주님의 탄생(Die Geburt des Herrn), 제1오라토리오: 그리스도의 봉헌(Christi Weihe), 제2오라토리오: 예언자 그리스도(Christus der Prophet), 제3오라토리오: 주님의 죽음과 승리(Tod und Sieg des Herrn) ● 그랜드 미사곡 a 장조(1908-09) ● 레퀴엠 e장조(1909-10) ● 소프라노, 바리톤, 남성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나 Columbus(18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