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거리들/23구 리징

[참고자료] 인처스도르프(Inzersdorf)

정준극 2012. 9. 30. 21:11

[참고자료]

리징의 인처스도르프(Inzersdorf)

 

젊은 시절의 프란체스카 도너

              

23구 리징의 인처스도르프를 굳이 별도로 소개함은 그곳이 대한민국의 국부이신 이승만 박사의 영부인이신 프란체스카 여사가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서 인처스도르프를 찾아보면 내용 중에 인처스도르프 출신의 유명인사 명단이 나온다. 그 첫번째에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 여사의 이름이 올라와 있다. 대한민국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도너(Donner)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결혼전 성이다. 그래서 다른 자료들에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성함을 Francesca Donner Rhee 라고 적혀 있다. 인처스도르프 마을회관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가 함께 찍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비엔나의 작은 마을에서 그런 사진을 볼수 있다는 것이 감격스럽다. 아무튼 인처스도르프는 우리가 모두 존경하여 마지않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고향이므로 뜻 있는 한국인이라면 시간을 내어 한번 찾아가서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추모의 정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한번쯤 되새겨 보는 것도 도리일 것이다. 프란체스카 도너 리 여사는 1900년에 인처스도르프에서 태어나 1992년에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였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비엔나의 22구 도나우슈타트에 한인문화회관이 2012년 5월에 문을 열었으며 이를 기념해서 구 당국은 한인문화회관 앞의 길을 프란치스카 도너 리 베그(Franziska-Donner-Rhee Weg)라고 붙였다. 뜻 깊은 일이다.

 

인처스도르프 마을회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승만 대통령과 영부인이신 프란체스카 여사의 사진

 

오늘날의 인처스도르프는 1893년 이전에는 '인처스도르프 암 비너베르게'(Inzersdorf am Wienerberge)라고 불렀다. 비엔나 구능지대의 자락에 있는 마을이라서 그렇게 불렀던 것 같다. 그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이전까지는 '인처스도르프 바이 빈'(Inzersdorf bei Wien)이라고 불렀다. '비엔나 인근의 인처스도르프'라는 뜻이다. 당시 인처스도르프는 비엔나와는 행정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립구역이었다. 그러다가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비엔나에 편입되었고 지금은 비엔나 23구 리징의 한 파트가 되어 있다. 리징은 인처스도르프를 비롯하여 아츠거스도르프, 에어라아, 지벤히르텐, 리징, 마우어, 로다운, 칼크스부르크 등 여러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인처스도르프의 면적이 가장 넓다. 인처스도르프는 토지의 대부분이 슾지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도처에 진흙이다. 진흙은 벽돌만드는데 쓴다. 19세기에는 인처스도르프에 벽돌만드는 공장들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벽돌공들이 많이 살았다. 벽돌공들의 일부는 멀리 보헤미아에서 일자리를 찾아 비엔나로 흘러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아직도 체코 이주민들의 후손들을 찾아 볼수 있다. 인처스도르프에 작은 호수들이 여럿이나 있는 것은 벽돌을 만들기 위해 진흙을 파낸 자리에 물이 고여서이다.

 

인처스도르프의 성니콜라스 교회

 

인처스도르프가 처음 기록에 나타난 것은 1120년 경이다. 그때는 이미치네스도르프(Imicinesdorf) 또는 이미치니스도르프(Ymizinisdorf)라고 불렀다. 이미치(또는 이미친)의 마을이라는 의미이다. 아마 마을을 처음 조성한 사람의 이름이 이미치 또는 이미친이었던 모양이다. 16세기 초반까지 이곳에는 실상 두개의 마을 뿐이었다. 인처스도르프와 빌렌도르프(Willendorf)였다. 그러는 중에 1529년 터키의 1차 비엔나 공성 때에 두 마을이 모두 파괴되었다. 터키가 물러간후 마을을 재건하게 되었는데 두 마을 중에서 인처스도르프만이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인처스도르프의 이력에 대하여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으므로 여기에서 그친다. 다만, 인처스도르프는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개신교가 번창한 것이 특별하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면 저 유명한 1683년의 비엔나 전투(Battle of Vienna) 때에 인처스도르프는 다시한번 전화에 휩싸여서 완전파괴 되었으며 사람들이 살지 않게 되자 당시 이 지역을 통치하던 킨스키 가문이 다른 나라 사람들을 이곳에 데려와 정착토록 했으며 그들 상당수가 개신교였기 때문이다.

 

1683년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시 비엔나 전투 장면

                           

인처스도르프가 벽돌로서 유명하게 된 것은 19세기에 오스트리아의 뛰어난 기업가인 하인리히 폰 드라셰 봐르틴버그(Heinrich von Drasche-Wartinberg: 1811-1880)라는 사람이 뜻한바 있어서 이곳에 대규모 벽돌공장을 세우고 벽돌을 생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하여 하인리히 폰 드라셰 봐르틴버그는 '벽돌 남작'(Ziegelbaron: Brick Baron)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했었다. 그전에도 물론 벽돌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 때에는 1년에 1천6백만개의 벽돌을 만들었지만 '벽돌 남작'에 의해 대규모 공장이 들어선 후부터는 1년에 무려 1억개의 벽돌을 생산했으니 벽돌마을이라고 불러도 탓할 사람이 없었다. 벽돌공장들과 함께 다른 공장들도 들어서자 산업시설들이 많은 인처스도르프의 북부 지역은 경제수준이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자 비엔나 시당국은 벽돌지역만을 당시 비엔나의 10구인 화보리텐에 속하도록 했다. 경제수준이 낮은 다른 지역은 그대로 별도의 마을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제수준이 낮은 지역들은 인근 도시인 리징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인처스도르프를 흐르는 리징강. 슈타인제와 슐로스제 사이의 흐름이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나치는 비엔나 근교의 리징을 비롯한 13개 지역을 비엔나시에 편입하고 비엔나의 25구로 삼았다. 나치는 이렇게 비대해진 비엔나를 '대비엔나'(Gross-Wien)라고 불렀다. 2차 대전 중에는 인처스도르프가 공장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에 연합군의 공습을 자주 받아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인처스도르프는 그대로 비엔나에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954년에 비엔나의 23구인 리징에 속하게 되었다. 전후의 복구사업을 상당히 빠르게 진척되었다. 새로운 건물들과 새로운 길이 들어서게 되었다. 인처스도르프 사람들은 오페라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트라비아타가쎄도 있고 오텔로가쎄도 있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트라비아타가쎄와 오텔로가쎄에 대규모 아파트(보눙)가 들어섰다. 따라서 주민들도 늘었다. 인처스도르프에는 17세기에 건축한 바로크성이 있다. 2차 대전중에 크게 파손되었으며 그러다가 A23번 고속도로가 생기게 되자 상당부분이 철거되었다. 현재 성의 정원은 일반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마을 중심에 있는 성니콜라스교회는 1818년에 건립된 것이다. 원래 그 자리에는 고틱교회가 있었는데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지은 것이다. 인처스도르프의 유명건물로는 마리아 테레지엔 슐뢰쎌이 있다. 아름다운 성이다. 그리고 그륀버거 슐뢰쓸(Grünberger Schlössl)이라는 궁전도 있다. 18세기에 그륀버거라는 귀족이 여름별장으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그륀버거 슐뢰슬

인처스도르프 마을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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