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코미크

오페라 코미크 대탐구

정준극 2013. 3. 20. 18:36

오페라 코미크 대탐구

Opéra comique

 

오페라 코미크에서의 '카르멘'(안나 카트린 나이두), 추니가와 프라스키타. '카르멘'은 오페라 코미크의 장르에 속한 작품이다.

 

오페라 코미크(Opéra comique: 복수형태는 Opéras comiques)는 프랑스 오페라 장르 중의 하나로서 대화체의 대사와 아리아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 오페라를 말한다. 내용은 대체로 코믹한 형태이다. 하지만 반드시 코믹한 내용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19세기 당시에 프랑스에서 인기를 끌고 공연되었던 오페라들은 비극이건 희극이건 오페라 코미크라고 불렀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오페라 코미크는 어디에서 유래 되었는가?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풍자적인 패로디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면 된다. 음악학자들은 오페라 코미크가 원래 생제르맹극장과 생로랭극장, 그리고 비록 자주는 아니지만 코메디 이탈리안느(Comédie -Italienne)에서 공연되었던 Opéra comiques en vaudevilles 이라는 말에서 비롯한 것으로 이들 극장에서는 당시의 인기 유행 노래와 대화체의 대사를 복합한 공연을 보드빌 형태로 무대에 올린 것을 오페라 코미크라고 불렀다는 주장이다. 파리에서는 1714년에 파리에 오페라 코미크를 중점 공연하는 극장이 생겼다. 이 극장을 오페라 코미크(Opéra-Comique) 극장이라고 불렀다. 오페라 코미크의 장르에 속하는 작품을 공연하는 극장이기 때문에 오페라 코미크라고 불렀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페라 코미크라고 해서 모두 코믹하고 가벼운 내용의 작품만을 공연한 것은 아니다. 비극이라고 해도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공연하면 오페라 코미크의 장르에 속하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비제의 '카르멘'이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공연된 비극이다. 그러므로 오페라 코미크라고 하면 프랑스 오페라의 한 장르이기도 하고 그런 작품들을 주로 공연하는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을 말하기도 한다.

 

오페라 코미크라는 용어는 18세기 초부터 사용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파리에서는 매 2년마다 두 가지의 박람회가 열렸다. 하나는 생제르맹 박람회(Foire Saint Germain)이며 다른 하나는 생로랑 박람회(Foire Saint Laurent)였다. 박람회 기간 중에는 인근의 극장들에서 유머스럽거나 풍자적인 내용에 대중적인 민속노래가 덧붙은 연극을 공연하였다. 노래는 그때 그때 시사성있게 가사를 바꾸어 부르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것을 보드빌(Vaudevilles)이라고 불렀다. 당시 파리에서 연극을 공연하는 정식 극장은 코메디 프랑세(Comédie Francaise)였다. 코메디 프랑세에서의 연극 공연을 다른 극장에서의 공연을 통해 풍자하는 것이 보드빌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두 박람회 기간 중에 보드빌을 공연하는 생제르맹극장과 생로랑극장은 1715년에 하나로 통합을 하고 '오페라 코미크 극장'(Théatre de l'Opéra-Comique)이라고 불렀다. 라이발 극장들의 반대가 심했지만 새로 생긴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알렝 르네 르사즈(Alain René Lesage), 알렉시스 피롱(Alexis Piron)과 같은 저명 극작가의 연극을 공연하여 대인기를 끌었다. 이렇듯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공연되는 새로운 형태의 연극(노래가 포함된)을 오페라 코미크라고 불렀다.

 

현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의 보드빌은 18세기 중반부터 더욱 발전하여 보드빌에 사용되는 음악을 별도로 새로 작곡하여 사용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여기에는 가벼운 타입의 이탈리아 오페라의 영향이 컸다. 예를 들면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La serva padrona)은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었다. 이런 형태의 오페라 코미크는 다른 말로 Comédie melée d'ariettes(작은 아리아들이 혼합된 코메디)라고 불렀다. 이 경우에 코메디는 비단 익살극만을 의마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적인 연극도 의미했다. 그러므로 재차 언급하지만 오페라 코미크의 주제는 반드시 코믹한 것에 국한될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는 오페라 코미크라는 말이 단순히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공연하는 대화체의 대사가 포함되고 여기에 노래가 가미된 보드빌이나 오페라 이상의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이나 오페라에서는 대화체의 대사를 레시타티브로 처리한다. 파리오페라 극장과 라이발 관계에 있는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레시타티브를 사용하지 않는 보드빌 스타일의 연극이나 오페라를 내용에는 상관 없이 오페라 코미크라고 부르게 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가장 대표적인 오페라 코미크는 비제의 '카르멘'이다. 잘 아는대로 '카르멘'은 코믹한 내용이 아니라 비극이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의 '센드리용'(신데렐라) 무대

                     

18세기 중엽에 유명한 '부퐁 논쟁'(Querelle des Bouffons: 1752-54)이 있었다는 것은 오페라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항이다.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층과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는 층이 벌인 논쟁이었다. 이탈리아 오페라는 지지하는 멤버들, 예를 들면 철학자이며 음악가인 장 자크 루소는 진지한(심각한) 내용의 프랑스 오페라를 공격하였는데 특히 장 필립 라모의 '음악이 있는 비극'(Tragédies en musique)을 자연적인 순수함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침 그때 이탈리아 순회극단이 파리에 와서 공연한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을 예로 들면서 '그 얼마나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내용이냐'면서 찬사를 퍼부었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에 영향을 받은 루소는 1752년에 Le devin du village(마을의  점장이)라는 간단한 오페라를 만들기까지 했다. 프랑스에도 음악적 간결함과 순수함을 도입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루소의 오페라가 대인기를 끌자 박람회 극장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듬해에 생로랑극장장인 장 모네(Jean Monnet)는 작곡가 안투안 도브르뉴(Antoine Dauvergne)에게 '하녀 마님'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물은 Les troqueurs(물물교환자: The Barterers)였다. 장 모네는 이 오페라를 비엔나에서 활동하고 있는 어떤 이탈리아 출신의 작곡가에게 전달했고 프랑스어에 능통한 그 이탈리아 작곡가는 이를 비엔나와 이탈리아에 소개하여 오히려 커다란 환영을 받았다. 도브르뉴의 '물물교환자'는 간단한 줄거리, 일상에서 보는 주인공들, 여기에 이탈리아 스타일의 멜로디여서 그 이후로 등장하는 오페라 코미크 작품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특히 과거의 오페라 코미크 작품들은 옛 노래들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도브르뉴 이후의 작품들은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여 포함시키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대화체의 대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녀 마님' 스타일로 대화를 레시타티브로 이끌었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의 한 장면

                      

보드빌에서의 노래를 대체한 짧고 간단하며 마음에 와 닿는 멜로디를 아리에트(ariettes)라고 불렀다. 18세기 후반의 오페라 코미크 작품들은 아리에트를 많이 이용하였다. 그래서 오페라 코미크를 코미디 멜레 다리에트(Comédie melée d'ariettes)라고 불렀다. 오페라 코미크 작품들의 대본은 연극대본을 쓰는 극작가들이 주로 맡아서 썼다. 극작가들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극장의 최근 추세에 부합하는 작품들을 썼다. 대표적인 극작가는 루이 앙솜(Louis Anseaume), 미셀 장 스뎅(Michel-Jean Sedaine), 샤를르 시몬 화바르(Charles Simon Favart) 등이었다. 1750년대와 1760년대에 활동했던 주요 오페라 코미크 작곡가들로서는 에지디오 두니(Egidio Duni), 피에르 알렉산드르 몽시니(Pierre-Alexandre Monsigny), 프랑수아 앙드레 다니칸 필리도르(Francois-André Danican Philidor)등을 꼽을수 있다. 파르마의 프랑스궁정에서 활동하고 있던 에지디오 두니는 1757년에 루이 앙솜의 대본으로 Le peintre amoureaux de son modéle(모델과 사랑에 빠진 화가)라는 작품을 작곡했다. 에지디오 두니는 이 작품이 대성공을 거두자 아예 파리에 정착하여 살면서 20여편의 오페라 코미크 작품들을 내놓아 환영을 받았다. 피에르 알렉산드르 몽시니는 극작가인 미셀 장 스뎅과 협동하여 코미디와 사회정치적 풍자가 혼합된 작품들을 만들었다. 1762년에 내놓은 Le roi et le fermier(왕과 소작농부)는 평민들의 소박한 생활을 그렸고 자유와 평등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한 이른바 '계몽주의' 작품이었다. 그 중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작품은 1769년의 Le déserteur(탈영병)이었다. 어쩔수 없이 병영을 이탈하는 바람에 사형선고를 받은 어느 병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프랑수아 앙드레 다니칸 필리도르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1765년의 Tom Jones(톰 존스)이다. 헨리 필딩(Henry Fielding)의 동명 소설을 오페라 코미크 작품으로 만든 것이다. 주인공들이 실존했던 인물들이라는 것이 특색이 있는 작품이었다.

 

프랑수아 앙드레 다니칸 필리도르의 '톰 존스' 음반 커버

                       

18세기 후반에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인기를 끌었던 오페라 코미크 작곡가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앙드레 그레트리(André Grétry)일 것이다. 그레트리는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멜로디와 프랑스어의 감칠맛 나는 요소를 혼합한 작품을 써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레트리는 대단히 재능이 많은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의 주제는 동양적인 동화에 기본을 둔 Zémire et Azor(체미르와 아초르: 1772)에서부터 풍자적 음악극인 Le jugement de Midas(미다스의 판단: 1778), 프랑스 국내의 익살극인 L'amant jaloux(질투심이 많은 정부: 1778) 등이지만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구원 오페라'인 Richard Coeur-de-lion(사자왕 리챠드: 1784)였다. '사자왕 리챠드'는 국제적인 인기를 끌어서 1786년에는 런던에서, 1797년에는 보스턴에서 공연되었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1724-62년에 푸아르 생제르멩(생제르멩 박람회장)에 있었다. 그러다가 1762년에 코메디 이탈리안느 극장과 통합되어 오텔 드 부르고느(Hotel de Bourgogne)로 옮겼다. 1783년에 새로 건물을 짓고 코메디 이탈리안느 극장이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건축가인 샤를르 화바르의 이름을 따서 살르 화바르(Salle Favart)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이 오늘날 파리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전신이다.

 

오페라 코미크 천정의 위용

 

코메디 이탈리안느 극장이 오페라 코미크 극장으로 명칭변경 된것은 프랑스혁명이 일어난지 얼마후인 1793년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파리의 음악생활에도 여러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새로운 이름의 오페라 코미크는 대화체의 오페라를 더 이상 독점하여 공연하지 않았다. 라이발인 테아트르 페이도(Théatre Feydeau)가 생겨서 그런 오페라를 열심히 공연했기 때문이었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은 코믹한 내용보다는 보다 드라마틱한 오페라를 공연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음악적으로는 낭만주의(Romanticism)에 속하는 작품들이었다. 혁명기간 중에 오페라 코미크 극장의 중심되는 작곡가들은 에티앙느 메울(Etienne Méhul), 니콜라스 달라이락(Nicolas Dalayrac), 로돌프 크로이처(Rodolphe Kreutzer), 앙리 몽땅 베르통(Henri Montan Berton)등이었다. 반면에 라이발인 페이도 극장에는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 피에르 갸보(Pierre Gaveaux), 장 프랑수아 르 쉬르(Jean-Francois Le Sueur), 프랑수아 드비앙(Francois Devienna) 등이 포진하고 있었다. 메울, 케루비니, 라 쉬르 등의 작품들은 프랑스 오페라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었다. 예를 들면 메울의 Stratonice(스트라토니스: 1792)와 Ariodant(아리오당: 1799), 케루비니의 Lodoiska(로도이스카: 1791)와 Médée(메데: 1797), 그리고 Les deux journées(이틀간의 사건), 쉬르의 La caverne(동굴: 1793) 등이다. 이 작품들이 나중에 글룩의 개혁오페라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이다. 한편, 새로운 오페라들은 과거에 타부시되어 왔던 주제들을 과감히 다루기도 했다. 예를 들면 메울의 Mélidore et Phrosine(멜리도르와 프로생: 1794)에서는 근친상간을, 케루비니의 유명한 Médée(메데)에서는 영아살인을 거침없이 다루었다. 음악에 있어서도 오케스트레이션과 하모니가 전에 비하여 보다 복잡해 졌다. 그리고 대화체의 대사를 가급적 줄이려는 노력도 시도되었다. 그런가하면 '회상적인 모티프'를 사용하는 기법도 도입되었다. 어떤 주인공이나 사건을 상징하는 음악적 주제를 말한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과 페이도 극장은 1801년에 재정문제 등으로 통합하였다.

 

케루비니의 '이틀간의 사건'의 무대

 

나폴레옹 3세의 치하에서 정치적인 변화는 오페라 코미크의 공연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치가 안정되자 심각한 내용도 좋지만 가벼운 내용을 더 선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페라 코미크는 과거의 가볍고 코믹한 작품들을 리바이벌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새로운 작품들도 그런 경향의 것들이었다. 부엘듀(Boieldieu)의 Le calife de Bagdad(바그다드의 칼리프: 1800), 이수아르(Isouard)의 Cendrillon(센드리용: 신데렐라: 1810)은 대환영을 받았다. 당시의 파리 사람들은 이탈리아에서 직수입한 오페라들도 사랑하였다.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와 새로 등장한 벨 칸토 오페라들을 보기 위해 테아트르 이탈리안(이탈리아 극장)으로 몰려갔다. 로시니는 최고의 인기를 차지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오리 백작', '라 체네렌톨라' 등 로시니의 오페라는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로시니의 영향은 프랑스 오페라 코미크에 폭넓게 스며들었다. 로시니의 영향은 부엘듀의 La dame blanche(하얀 옷의 여인: 1825)와 그 이후에 나온 다니엘 오버(Daniel Auber)의 Fra Diavolo(프라 디아볼로: 1830), Le domino noir(검은 도미노: 1837), 에롤드(Hérold)의 Zampa(창파: 1831), 아돌프 아당(Adolphe Adam)의 Le postillon de Longjumeau(롱주모의 마부: 1836)를 보면 알수 있다.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의 '창파'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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