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독일의 오페라

독일 오페라의 연혁

정준극 2013. 7. 10. 09:09

독일 오페라의 연혁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도전으로 시작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세부인과 타미노 왕자와 파파게노

 

모차르트, 베버,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쇤버그, 베르크...세계의 오페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독일-오스트리아의 작곡가들이다. 세계에서 독일-오스트리아처럼 오페라극장이 많은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 웬만한 도시마다 그럴듯한 오페라극장이 있다. 이탈리아에도 웬만한 도시라면 오페라극장이 있지만 그래도 숫자 면에서는 독일에 뒤떨어진다. 오페라극장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오페라 공연이 많다는 것이며 아울러 그만큼 오페라단이 많고 오페라 성악가들을 비롯해서 오페라로 밥먹는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아무튼 독일-오스트리아는 세계에서 오페라가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나라로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독일-오스트리아만큼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행사가 많이 열리는 나라도 없다. 예를 들면 잘츠부르크 음악 페스티발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마치 하나의 나라처럼 표현했지만 절대로 같은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다만, 언어가 같기 때문에 '독일의 오페라'에 '오스트리아의 오페라'도 포함하는 것이니 양해바랍니다.) 이제 그러한 독일-오스트리아의 오페라는 어떻게 발전하여 왔으며 어떤 상황에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세계 최고의 오페라 수준을 보여주고 있는 비엔나의 슈타츠오퍼

 

'독일의 오페라'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의 오페라를 말한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오페라를 말한다. 스위스의 일부에서도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스위스의 오페라를 독일의 오페라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역사적으로 과거에 독일 제국 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여 있던 나라로서 지금은 다른 나라의 영토가 되어 있는 지역의 오페라는 당연히 독일의 오페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런 지역에서 아직도 주민의 대다수가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해도 그 지역 작곡가들의 오페라는 독일의 오페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모라비아, 슬로베니아의 브르노 등이다. 독일의 오페라는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작곡가들의 오페라를 말하지만 외국인이 독일어 대본으로 만든 오페라도 독일의 오페라로 간주한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의 페루치오 부소니(Ferruccio Busoni: 1866-1924)의 오페라이다. 마이에르베르는 독일의 베를린 인근에서 태어나고 청년시절에 독일에서 상당한 활동을 하였으나 나중에 프랑스에 가서 활동했기 때문에 독일의 작곡가로 간주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게오르그 프레데릭 헨델의 경우에도 분명히 독일 작곡가이지만 나중에 영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영국의 작곡가로 간주한다. 영국의 에드워드 저맨(Edward German: 1862-1936)은 이름이 German 이라서 혹시 독일계가 아닌가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웰쉬 출신으로 웰쉬 이름인 Garmon을 영국식으로 편하게 German 이라고 고친것 뿐이다.

 

베버의 '마탄의 사수'

 

독일의 오페라(독일어 오페라)는 이탈리아에서 플로렌스 카메라타에 의해 오페라라는 것이 본격 등장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발전해 왔다. 음악학자들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오페라가 나타난 것은 1598년 자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의 '다프네'(Dafne)라고 한다. 혹자는 1607년에 공연된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의 '오르페오'(L'Orfeo)가 역사상 첫 오페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독일의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ütz: 1585-1672)가 야코포 페리의 '다프네'의 대본을 입수하여 동료에게 독일어로 번역토록하여 여기에 자기의 음악을 붙여서 오페라로 만들었다. 아마 그것이 독일 오페라의 첫 케이스일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악보가 분실되어서 어떤 오페라인지 알수가 없다. 17세기와 18세기에 독일의 작곡가들은 이탈리아 오페라가 너무나 압도하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해서든지 독일 자체의 오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의 그늘에 가려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예를 들면 함부르크 출신의 라인하르트 카이저(Reinhard Keiser: 1674-1739)와 같은 바로크 작곡가들이 이탈리아 오페라에 도전하였지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였다. 헨델과 글룩 조차도 이탈리아의 전통에 따라 오페라 세리아를 내놓을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모차르트가 등장했다. 모차르트는 독일어 오페라의 새로운 전통을 수립하였다. 종전의 징슈필을 보다 정교하게 세련되고 재치있는 작품으로 발전시켰다.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징슈필 형식이기는 하지만 과거의 징슈필에 비하여 고도로 정교하고 세련된 작품이다.

 

베토벤의 '휘델리오'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뒤를 이었다. 베토벤의 '휘델리오'는 독일 오페라는 이래야 한다는 이상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베버가 있다.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 1786-1826)의 '마탄의 사수'(Der Freischütz)는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독일 오페라의 특별한 형태이다. 그런데 베버의 혁신적인 노력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 때문에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 바그너야 말로 세계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혁명적이고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곡가이다. 바그너는 '뮤직 드라마'(악극)라는 그의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위해 바그너는 대단히 복잡하게 짜여 있는 라이트모티프를 사용하였고 아리아와 레시타티브의 구분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대단히 중시하였다. 바그너는 또한 그의 악극의 주제를 독일의 신화에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은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이다. 바그너 이후, 독일이든 어디든, 오페라는 과거와 같을수가 없었다. 새로운 형식의 오페라가 계속 추구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바그너의 뒤를 잇는 작곡가 중에서 가장 성공한 케이스이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독일어 지역에서의 오페라는 더욱 번성했다. 주도적인 인물들은 파울 힌데미트, 페루치오 부소니, 쿠르트 봐일 등이었다. 이들의 활동은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잡을 때까지 왕성했으나 나치의 치하에서는 숨을 죽이고 있거나 추방되거나 또는 스스로 독일 땅을 떠났다. 수많은 재능있는 작곡가들이 미국으로 갔거나 그렇지 않으면 저 멀리 남미까지 가서 신세를 보존해야 했다. 2차 대전후 세계의 젊은 작곡가들은 독일-오스트리아의 아놀드 쇤버그, 알반 베르크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아 현대적인 작품들을 만들어 냈다. 이들은 무조주의(atonality) 또는 병렬주의(serialism)에 있어서 선구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에서 '라인의 황금'. 라인의 세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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