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독일의 오페라

바그너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정준극 2013. 7. 11. 13:48

바그너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후기 낭만주의, 현대주의, 제2 비엔나 학파...

 

[리하르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은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혁신적인 그리고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작곡가이다. 그는 오페라의 진행과정에 변혁을 주었다. 그는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나아가서 세계의 오페라에 괄목할 만한 변화와 개혁을 던져 주었다. 바그너의 음악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더구나 필자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터이므로 이만 생략키로 한다. 다만, 한가지 덧붙인다면 바그너는 이른바 '총체적예술작품'(Gesamtkunstwerk)를 주창했다는 것이다. 음악, 시, 그림(무대)이 혼연일체가 되어야 공연예술로서 성과를 거둘수 있다는 주장이다. 바그너의 초기 실험적인 작품들은 베버 또는 마이에르베르의 영향을 받았다. '요정들'(Die Feen)은 베버의 독일 낭만주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리엔치'(Rienzi)는 마이에르베르의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바그너가 가장 심도 있는 영향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베토벤으로부터일 것이다. 바그너의 관현악적 효과는 베토벤의 음악적 개념을 도입한 것이라고 한다. 바그너는 작곡가로서 자기의 경력이 1843년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 후 '탄호이저'와 '로엔그린'이 나왔다. 바그너는 이 두 오페라를 '독일 낭만파 오페라의 최고봉'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상 그 다음에 올 보다 극단적인 오페라들의 서막에 불과했다.

 

바그너의 초기작품인 '요절들'(Die Feen)의 무대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니벨룽의 반지' '파르지팔'에서 아리아와 레시타티브의 구분을 없앴다. '끊임없는 멜로디'(endless melody)의 계속 이어지는 흐름을 위해서였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역할과 파워를 크게 중시하였다. 그리고 라이트모티프의 복잡한 구조를 갖는 스코어를 창조해 냈다. 또한 종래의 관습적인 음악에서 탈피하여 음악적인 표현에 주력하였다. 스토리는 주로 독일의 신화, 또는 아서왕의 전설에서 가져왔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바이로이트에 전용 오페라극장을 만들었다.

 

[후기낭만주의 오페라: 바그너 이후]

바그너의 혁신적인 조치는 그 다음에 등장하는 작곡가들에게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워 주었다. 물론 그들도 자기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바그너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바그너 이후의 시대에 가장 성공적인 작곡가는 엥겔버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이다. 그의 '헨젤과 그레텔'(1893)은 오늘날에도 세계 오페라 극장의 단골 메뉴 중 하나가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헨젤과 그레텔'이 어린이를 위한 동화 오페라라고 규정하지만 오케스트레이션을 보면 그렇게 복잡할수가 없다. 그리고 라이트모티프를 자주 사용하였다. 이런 것은 분명히 바그너로부터의 영향이다. 또 다른 작곡가로서는 휴고 볼프(Hugo Wolf: 1860-1903)와 바그너의 아들인 지그프리트(Siegfried)를 들수 있다. 휴고 볼프는 1896년에 '지방판사'(Der Corregidor)를 발표했다.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바그너의 영향을 크게 받은 작곡가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아버지는 '제발 바그너인지 뭔지를 닮지 마라!'라며 간곡히 당부했지만 그렇게 되지 못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이미 17세 때에 바그너의 '탄호이저' '로엔그린' '지그프리트'를 보고 깊이 감동했다. 그러다가 바그너의 또 다른 오페라, 즉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를 보고는 '와, 참으로 놀랍고도 놀랍도다.'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청년 시절에  그의 음조시(tone poem)으로서 유명했다. 이어 '살로메'(1905)와 '엘렉트라'(1907)로서 독일 오페라의 주도적인 인물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 두 오페라는 음악도 음악이지만 그로테스크한 스토리로 대단한 물의를 빚었다. 하지만 경탄의 눈으로 바라보는 측들도 많았다. 표현주의의 길을 닦아 놓은 작품들이라는 설명이었다. '엘렉트라'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인 휴고 폰 호프만슈탈(Hugo von Hofmannsthal)과 인연을 맺게 된 시작이었다. 두 사람은 협력하여서 1910년에 '장미의 기사'(Der Roosenkavalier)를 내 놓았다. '장미의 기사'는 '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런 방향으로 음악을 바꾸었나?'라고 궁금증을 가질 정도로 상당히 다른 음악이었다. 모차르트 스타일의 우아함과 비엔나 왈츠의 감미로움이 넘쳐 있는 작품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그너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배제한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장미의 기사'에 대하여 '영혼을 팔아 먹은 행위'라느니 하면서 자못 험난한 비난의 말을 퍼부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지 '장미의 기사'는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자기에 대한 비평들을 무시하였다. 그리고 코미디와 비극이 혼합된 '낙소스의 아리아드네'를 내놓았고 복잡한 비유를 담은 '그림자 없는 여인'을 발표했는가 하면 가정적인 드라마인 '인터메쪼'와 '아라벨라'를 내놓았다. 이어 신화를 내용으로 삼은 '이집트의 헬렌'과 '다프네'(Daphne)도 내놓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1942년에 '카프리치오'로서 음악무대와 작별했다. 오페라에서 단어와 음악의 관계를 새롭게 개발한 작품이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그밖의 후기 낭만주의 작품]

후기 낭만주의에 속하는 작곡가들로서는 프란츠 슈레커(Franz Schreker: 1878-1934)가 있다. 그는 1912년에 '먼 곳으로부터의 소리'(Der ferne Klang), 1920년에 '도굴꾼'(Der Schatzgraber)을 내놓아서 관심을 끌었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 1871-1942)는 1917년에 '플로렌스 비극'(Eine florentinische Tragodie), 1922년에 '난장이'(Der Zwerg)를 내놓았다. 에리히 코른골트(Erich Korngold: 1897-1957)은 1920년에 '죽은 도시'(Die tote Stadt)를 내놓았다. 이 작품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또는 '엘렉트라'와 비슷한 영역의 작품이다. 슈레커, 쳄린스키, 코른골트 등은 바그너적이 영향을 결합하였다. 예를 들면 관능적이고 화려한 오케스트레이션, 이상하고 괴기하기까지 한 하모니와 불협화음, 그리고 퇴폐적인 주제를 포함한 작품들을 내놓았던 것이다. 당시 표현주의 예술의 속성이 그러했었다. 여기에 당시 대단한 관심을 끌었던 프로이트의 심리분석학적인 기법도 포함하였다. 이 세사람의 작곡가들은 나치가 집권하자 하나같이 박해를 받았다. 나치는 이들의 음악을 '퇴폐음악'(entartete Musik: degenerate music)이라면서 핍박하였다.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 1869-1949)도 또 하나의 바그너 이후의 후기 낭만주의에 속하는 작곡가였다. 그러나 그는 대체로 보수적인 노선에서 음악을 만들었다. 그의 대표작인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917)는 현대주의적인 음악보다는 전통적인 분위기의 작품이다.

 

슈레커의 '먼 곳으로부터의 소리'

 

[비엔나 오페레타]

19세기 말에 비엔나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경쾌한 오페라 형태가 인기를 끌게 되었다. 오페레타이다. 오페레타는 매력적인 멜로디와 코믹한 스토리(어떤 경우에는 유치하기까지 한 내용)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노래와 노래 사이에는 레시타티브 대신에 대화체의 대사를 사용했다. 비엔나 오페레타는 자크 오펜바흐에 의한 프랑스 오페레타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독일어로 된 비엔나 오페레타의 첫 중요한 작품은 프란츠 폰 주페(Franz von Suppé: 1819-1895)의 '기숙학교'(Der Pensionat: 1860)이다. 그러나 비엔나 오페레타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Jr: 1825-1899)의 '박쥐'(Die Fledermaus: 1874)이다. 프란츠 레하르(Franz Lehar: 1870-1948)의 '메리 위도우'(Die lustige Witwe: 1905)도 선풍적인 인기를 끈 비엔나 오페레타이다. 수많은 작곡가들이 비엔나 오페레타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왈츠의 꿈'의 오스카 슈트라우스(Oscar Straus: 1870-1954)와 '황태자의 첫사랑'의 지그문트 롬버그(Sigmund Romberg: 1887-1951)는 기억해야 할 작곡가들이다.

  

'박쥐' 피날레 장면. 현대적 연출

 

[현대주의: 제2 비엔나 학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쳄린스키, 슈레커 등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뒤를 이어 전통적인 조성(tonality)을 절대 한계까지 밀고 올라간 사람들이다. 그후로 이같은 음악을 한단계 뛰어 넘는 그룹들이 등장했다. 오페라의 현대주의는 이른바 제2 비엔나 학파에 속하는 두 사람의 작곡가들에 의해 비로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아놀드 쇤버그(Arnold Schoenberg: 1874-1951)와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이다. 두 사람 모두 무조성 음악(atonality)를 추구했으며 그 이후의 12음 기법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쇤버그의 초기 음악드라마 작품인 '기대'(Erwartung: 1909, 초연은 1924)와 '행복한 손'(Die glückliche Hand)은 일반적으로 반음계 하모니와 불협화음을 강력하게 사용한 작품들이다. 쇤버그는 간혹 이른바 '슈프레헤슈팀메"(Sprechstimme)를 사용하였다. 슈프레헤슈팀메는 노래가 아니다. 다만, 사람의 음성을 미리 지정해준 인터발에 따라 높게 내기도 하고 낮게 내기도 하는 형태라고 할수 있다. 쇤버그는 '모세와 아론'(Moses und Aron)을 본인의 대표인 걸작 오페라로 생각하였으나 미완성으로 세상을 떠났다. 쇤버그의 제자인 알반 베르크는 두 편의 오페라로서 기억되고 있는 작곡가이다. '보체크'(Wozzeck)와 '룰루'(Lulu)이다. 그런데 '룰루'는 쇤버그의 '모세와 아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베르크가 미완성으로 남겨 놓은채 세상을 떠났다.

 

쇤버그의 '기대'

                               

[1918-1945: 봐이마르 독일, 전쟁에 시달린 오스트리아, 그리고 나치의 제3제국]

1차 대전 이후에 독일-오스트리아의 문화는 정치적인 혼돈 속에서도 오히려 찬란하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현대주의를 지향하는 쇤버그와 베르크가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지만 전통을 고수하는 작곡가들의 활동도 활발했다. 이탈리아 출신의 페루치오 부소니(Ferruccio Busoni)는 바흐와 아방 갸르드(전위)를, 그리고 지중해와 독일의 문화를 그의 음악에 혼합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부소니의 가장 위대한 작품은 '파우스트 박사'(Doktor Faust: 1925)이지만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는 비록 오페라 경력이 짧지만 대단한 스캔들을 일으킨 '살인, 여인들의 희망'(Mörder, Hoffnung der Frauen) 등을 남겼다. 그런 후에 힌데미트는 부소니가 했던 것처럼 바흐로 돌아가고자 했다. 힌데미트는 그 시대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리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그런 오페라를 '차이트오퍼'(Zeitoper: 시대오페라)라고 불렀다. 에른스트 크레네크(Ernst Krenek: 1900-1991)도 그러한 개념에 동조하였다. 크레네크의 '조니가 연주하다'(Jonny spielt auf: 1927)은 재즈 바이올리니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쿠르트 봐일(Kurt Weil)은 봐이마르 독일의 생활을 정치적인 방법으로 표현하였다. 그는 베르톨트 브레헤트(Bertolt Brecht: 1898-1956)와 협동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서푼짜리 오페라'(The Threepenny Opera: 1928)이다.

 

크레네크의 '자니가 연주하다'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독일-오스트리아 오페라의 여러 노력들은 파괴되거나 중단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1933년에 라이히스타그가 화재가 나자 독일 정부청사가 베를린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인 크롤오퍼(Krolloper)로 이전했다는 것이다. 당시 크롤오퍼의 음악감독은 오토 클렘페러(Otto Klemperer)였다. 클렘페러는 나치가 집권하기 전인 1920년대에 독일 오페라의 발전을 위한 여러 혁신적인 시도들을 직접 경험한바 있다. 예를 들면 힌데미트의 '오늘의 뉴스'(Neues vom Tage)였다. 힌데미트는 나치가 한창 기세를 올릴 때인 1938년에 '화가 마티스'(Mathis der Maler)를 완성했다. 힌데미트의 대표적인 이 작품은 독일에서는 공연하지 못하고 스위스의 취리히에서 초연을 가졌다. 정치적으로 핍박 받는 어떤 화가의 얘기를 담은 것이다. 힌데미트의 모든 작품은 독일에서 이미 1937년에 금지되었다. 힌데미트는 1940년에 스위스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당시에 여러 음악가들이 대서양을 횡단하는 엑소도스(출애굽을 비유한 표현)를 단행하였다. 그 중에는 아놀드 쇤버그, 쿠르트 봐일, 에리히 코른골트,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른스트 크레네크는 나치가 교수직을 박탈한 후인 1934년에 세상을 떠났다. 다른 작곡가들, 예를 들면 전도가 유망한 빅토를 울만(Viktor Ullmann: 1898-1944)은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칼 오르프(Carl Orff: 1895-1982), 베르너 에그크(Werner Egk: 1901-1983), 그리고 이미 연로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전쟁 중에 독일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종전을 맞이했다. 이들은 나치 치하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생존하려고 어쩔수 없이 나치에 협조해야 했다.

 

'화가 마티스'의 무대

                                       

[1945년 이후의 독일 오페라]

전후의 독일 작곡가들은 나치에 의해서 파괴된 독일의 오페라를 복구하기 위해 무슨 방법이든지 찾아야 했다. 쇤버그와 베르크의 현대주의는 젊은 작곡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현대주의를 추구하는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들은 대부분이 나치에 의해 '퇴폐음악'으로 규정되어 금지당했다. 이들은 과거 정권의 오욕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했다. 베른트 알로이스 침머만(Bernd Alois Zimmermann: 1918-1970)은 베르크의 '보체크' 스타일을 자기의 '병사들'(Die Soldaten: 1965)에 표현코자했다. 아리베르트 라이만(Aribert Reimann: 1936-)은 표현주의 전통을 계속코자 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Lear: 1978)이 대표적이다. 전후 독일의 작곡가 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나고 많은 활동을 한 작곡가는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1926-2012)이다. 그는 벨기에의 영향에 이탈리아의 베르디 스타일을 혼합하는 노력을 하였다. 그러한 경우에 속하는 다른 오페라들로서는 '고독대로'(Boulevard Solitude), '바싸리드'(The Bassarids), '배반의 바다'(Das verratene Meer) 등이 있다.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1928-2007)은 보다 전위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슈토크하우젠은 1주일 7일에 기본을 둔 대규모의 오페라 사이클을 만들었다. 1977년도의 '빛'(Licht)이다. 기젤허 클레베(Giselher Klebe: 1925-2009)는 문학작품을 바탕으로 한 폭넓은 오페라를 만들었다. 기타 작곡가들로서 아직도 오페라를 만들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칼스루에 출신의 볼프강 림(Wolfgang Rihm: 1952-), 그라츠 출신의 올가 노이비르트(Olga Neuwirth: 1968-) 등이 있다.

 

침머만의 '병사들'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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