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스페인의 오페라

스페인의 오페라

정준극 2013. 7. 22. 22:27

스페인의 오페라

사르수엘라(Zarzuela)의 세계 - 스페인 고유의 민속오페라

위대한 성악가들의 보고, 수많은 스페인 배경의 오페라

 

스페인은 유럽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오페라에 있어서는 유럽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스페인에서도 17세기 초반에 오페라가 발달했지만 같은 라틴 가족들인 인근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 비하면 상당히 늦게 발달한 것이었고 심지어 조금 떨어져 있는 독일에 비해서도 그다지 빠른 발달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스페인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대화체의 대사와 노래와 스페인의 민속 춤이 혼합된 스페인 특유의 공연예술 형태가 발전해 왔기 때문이다. 사르수엘라(Zarzuela)라고 부르는 장르이다. 그래서인지 스페인에서는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처럼 오페라가 크게 가치있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르수엘라가 귀족사회는 물론 일반 대중으로부터도 폭넓은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스페인의 오페라가 완전히 사르수엘라의 그늘에 묻혀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스페인에서도 자랑스러운 오페라 작곡가들이 나왔다. 토마스 브레톤, 마누엘 데 활라, 엔리크 그라나도스, 페데리코 토로바 등은 세계에 스페인의 오페라를 널리 알린 위대한 작곡가들이다. 뿐만 아니다. 스페인은 세계적인 오페라 성악가들을 무수히 배출하여 세계 오페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몇 사람만 내세워보면, 플라치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몽세라 카바예, 알프레도 크라우스, 마누엘 가르시아, 마리아 말리브란,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콘치다 수페르비아, 필라 로렝가, 테레사 베르간사, 엘비라 데 히달고, 자코모 아라갈, 루크레시아 보리 등등이다. 그러므로 스페인의 오페라 문화가 미진하다고 평가절하했다가는 큰일 날수가 있다.

 

스페인 특유의 오페라(오페레타)인 사르수엘라의 한 장면. 화려한 플라멘코 춤이 일품이다.

 

스페인이 세계의 오페라에서 또 한가지 자랑으로 삼을 사항이 있다. 불후의 걸작 오페라 중에서 스페인을 무대로 삼은 것들이 상당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생각나는대로 우리가 알만한 오페라들을 짚어보면,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베토벤의 '휘델리오', 마스네의 '르 시드', 비제의 '카르멘', 도니체티의 '라 화보리타', 그리고 오페라의 황제인 베르디의 '운명의 힘'(1835), '에르나니'(1844), '일 트로바토레'(1853), '돈 카를로스'(1860)이다. 베르디의 작품 중에서 유난히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것들이 여러 편이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그중에서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은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Teatro Real)에서 세계 초연을 가졌다. 테아트로 레알이 1850년 개관기념으로 공연한 오페라는 도니체티의 '라 화보리타'였다. 위대한 작곡가들은 어째서 스페인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를 즐겨 작곡했을까? 베르디는 어찌하여 스페인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인가? 그 이유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 편에 조금 설명해 놓았으니 참고 바란다.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 베르디의 '운명의 힘'(La forza del destino)이 초연된 곳이다. 뒷 건물은 왕궁

                            

이제 다시 스페인의 오페라로 돌아가보자. 스페인에서는 전통적으로 사르수엘라가 강세를 보이는 바람에 순수 오페라가 별로 각광을 받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초부터 연극에 노래를 붙인 작품들이 간간히 선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독일의 징슈필 스타일이었다. 그런 작품을 선도한 작곡가가 스페인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후안 델 엔시나(Juan del Encina: 1468/1469-1529/1530)이다. 가톨릭 신부이기도 한 후안 델 엔시나는 원래 시인 겸 극작가였다. 그래서 혹자들은 그를 '스페인 드라마의 아버지'(Padre del drama español)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자기의 연극에 노래를 작곡하여 첨가하는 시도를 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은 '트리바지아(Tribagia) 또는 '예루살렘의 성스러운 길'(Via Sacra de Hierusalem)이다. 반응이 좋았다. 그후에 다른 작곡가들도 연극에 음악을 붙이는 시도를 하였고 그것이 발전하여 오페라의 수준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스페인 드라마/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후안 델 엔시나

 

스페인에서 오페라라고 부를수 있는 본격적인 작품은 17세기 중반에 모습을 보였다. 유명 문학작품을 대본으로 삼은 오페라들이 나왔기 때문에 상당한 환영을 받았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후안 히달고 데 폴란코(Juan Hidalgo de Polanco: 1614-1683)이다. 그는 스페인의 문호인 칼데론 데 라 바르카(Calderon de la Barca) 또는 로페 데 베가(Lope de Vega)등의 작품을 대본으로 만든 것을 바탕으로 하여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수많은 종교음악, 코미디, 세미오페라들을 작곡했으며 오페라는 두편을 남겼다. 두 편의 오페라는 1660년에 작곡한 '장미의 피'(La purpura de la rosa: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원작)과 Celos aun del aire mata(칼데론 데 라 바르카 원작)이다. La purpura de la rosa를 바탕으로 하여서는 토마스 데 토레혼 이 벨라스코(Tomás de Torrejón y Velasco: 1644-1728)가 동명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1701년에 초연한 것도 있다. 아무튼 후안 히달고 데 폴란코는 프랑스의 장 바티스트 륄리, 영국의 헨리 퍼셀과 같은 선상에서 평가할수 있는 위대한 작곡가였다. 그런데 이같은 초기의 오페라들은 이상하게도 일반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했다. 영국에서는 발라드 오페라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프랑스에서는 오페라 코미크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그 기간에 스페인에서는 대중들의 마음에 어필하는 작품들이 나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어 또는 프랑스어로 된 오페라를 수입해서 공연하는 노력도 기울여 보았지만 아무래도 언어가 어색하여서 큰 호응을 받지 못하였다. 스페인어로 된 흥미있는 오페라들이 나와야 했다. 스페인의 작곡가들은 간혹 지방 사투리까지 사용하는 스페인어 대본의 오페라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대화체의 대사가 나오는 것들이었다. 여기에 스페인의 전통 민속 춤을 가미하였다. 대단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사르수엘라였다.

 

스페인의 륄리 또는 퍼셀이라고 하는 후안 히달고 데 폴란코. 뛰어난 하피스트이기도 했다. 사르수엘라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후안 히달고 데 폴란코(간단히 히달고라고 부름)의 초기 작품들에는 이탈리아 오페라를 모델로 삼은 것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스페인 전통의 오페라를 창조해야겠다고 생각을 돌렸다. 스페인어로 된 대사와 스페인의 민속 음악에 기본을 둔 노래를 곁들인 작품이었다. 그리고는 사르수엘라라고 불렀다. 히달고의 첫번째 사르수엘라는 1657년에 발표한 '아폴로의 월계수'(El laurel de Apolo: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작품)였다. 마드리드의 궁전에서 공연되었다. 이를 바로크 시대였으므로 '바로크 사르수엘라'라고 부른다. 바로크 사르수엘라는 정교하게 구성된 시가 주축을 이루는 연극이며 여기에 대중들이 좋아하는 노래와 춤이 곁들이도록 되어 있다. 이로부터 사르수엘라는 거의 1세기에 걸쳐 스페인 궁전의 패션이 되었다. 여기서 잠시 사르수엘라라는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이며 어떻게 유래 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성가신 일만은 아닐 것이다.

 

중세에 마드리드 부근에 왕실 사냥숙사가 있었다. 말이 숙사이지 실은 규모가 큰 궁전이나 다름없는 시설이었다. 궁전의 담장은 들장미로 둘러쳐있었다. 스페인어로 들장미를 사라사스(Zarazas)라고 했다. 그래서 그 사냥숙사를 '사르수엘라 궁전'(Palacio de la Zarzuela)이라고 불렀다. 사냥숙사인 사르수엘라 궁전에서는 연회나 축제가 열리면 연극에 노래와 춤을 곁들인 재미있는 공연이 있었다. 그러부터 그런 공연을 사르수엘라라고 불렀다. 오늘날 스페인의 사르수엘라는 오페라에서 리릭 드라마틱 장르로 분류하고 있다. 

 

마드리드 교외에 있는 사르수엘라 궁전. 예전에는 왕실의 사냥숙사였다. 이곳에서 공연되는 노래와 춤을 곁들인 연극을 사르수엘라라고 불렀다. 마드리드 시내에 있는 왕궁(Palacio Real)을 '사르수엘라 궁전'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사르수엘라는 18세기에 스페인에서 대유행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작곡가은 세바스티안 두롱(Sebastian Duron: 1660-1716)과 안토니오 리테레스(Antonio Literes: 1673-1747)이었다. 이들은 사르수엘라를 주로 작곡했지만 이탈리아 스타일의 일반 오페라도 작곡했다. 안토니오 리테레스의 오페라 '아치스와 갈라테아'(Accis y Galatea: 1708)는 특별히 인기를 끌었다. 18세기 말에 로드리게스 데 히타(Rodrigues de Hoita: c 1724-1787)는 그의 사르수엘라/오페라 Las labradoras de Murcia(1769)에서 기타, 만돌린, 탬버린, 카스타넷을 도입하였으며 여기에 스펙터클한 춤을 포함하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당시에는 토나디야 에스세니카(Tonadilla escenica)라는 간단한 여흥 프로그램이 있었다. 일반 서민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내용으로 삼은 음악을 곁들인 연극이었다. 사르수엘라도 서민들의 일상적인 스토리를 내용으로 하는 경우가 있지만 토나디야 에스체니카보다 훨씬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사르수엘라가 점점 내용이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지게 되자 극장들로서는 감당하기가 힘들에 되었고 또한 대중들도 외형적으로만 화려한 사르수엘라에 대하여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아마 오리지널 사르수엘라가 마지막으로 등장한 것은 1786년 루이지 보케리니(Luigi Boccherini)의 '클레멘티나'(Clementina)가 아닌가 싶다. 그후 약 60년 동안 스페인에서는 사르수엘라가 약세를 보였고 대신 이탈리아 오페라가 눈에 띠게 인기를 끌었다.

 

스펙터클한 사르수엘라의 무대. 전통적인 플라멘코 춤이 무대를 압도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사르수엘라에 대한 관심이 다시 고조되었다. 당시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국민주의가 기치를 높이 들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스페인에서도 오페라의 신토불이를 외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 은근히 작용했다. 그후 스페인에서는 1850년대 이래 20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약 1만 편의 사르수엘라가 쏟아져 나와 그야말로 사르수엘라의 천국으로서 손색이 없게 되었다.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데 라 사르수엘라(Teatro de la Zarzuela)는 스페인 사르수엘라의 총본부였다. 하지만 지방도시에서도 사르수엘라 열풍이 뜨겁게 불었으며 이밖에도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에서도 사르수엘라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 시기의 수많은 사르수엘라 작곡가 중에서 특히 관심을 끄는 사람은 프란치스코 아센호 바르비에리(Fraancisco Asenjo Barbieri: 1823-1894)이다. 그는 전통적인 토나디야와 옛부터 전해 내려오던 귀족적인 드라마를 융합하여 새로운 코믹 오페라 스타일을 만들었다. 바르비에리의 새로운 코믹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나바레 출신의 에밀리오 아리에타(Emillio Arrieta: 1823-1894)는 순수한 이탈리아 로맨틱 오페라와 유사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1855년의 사르수엘라인 '마리나'(Marina)이다. 두 사람의 경쟁적인 행동은 일반인들의 눈에 대단한 라이발로 보였다. 그로 인하여 사실상 사르수엘라는 더 유명해지고 더 인기를 끌었다.

 

마드리드의 사르수엘라 극장

                   

다른 작곡가들, 예를 들면 살라만칸 출신의 지휘자 겸 작곡가인 토마스 브레톤(Tomás Bretón: 1850-1923), 그리고 발렌시아에서 이발사의 아들로 태어난 루베르토 챠피(Ruperto Chapi: 1851-1909)는 익살극 형태의 단막의 사르수엘라를 만들었다. 이를 제네로 치코(género chico)라고 불렀다. 제네로 치코는 주로 정치 사회에 대한 풍자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음악은 다른 사르수엘라에 비하여 노래의 비중이 대화체의 대사보다 상당히 적었다. 제네로 치코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 중심에는 마드리드의 신동이라고 불리는 페데리코 추에카(Federico Chueca: 1846-1908)가 있었다.

 

사르수엘라는 20세기에 들어와서 보다 대중적인 취향에 부응하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대화체의 대사와 오페라적인 음악이 거의 균형을 잡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다. 이런 스타일을 '오페레타 사르수엘라'(Operetta-Zarzuela)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De Espana vengo 로 유명한 파블로 루나(Pablo Luna: 1879-1942), '돈나 프란시스퀴타'로 유명한 아마데오 비베스(Amadeo Vives: 1871-1932)이다. 오페레타 사르수엘라 스타일이 활기를 보여주고 있는 한편으로는 레뷰(revue: 노래, 춤, 시국 풍자 따위를 호화찬란하게 섞은

공연) 스타일의 익살극이 유행하였고 다른 한편에서는 이탈리아의 베리스모 스타일의 센티멘탈한 사르수엘라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레뷰 스타일의 대표적인 작품은 프란치스코 알론소(Francisco Alonso: 1887-1948)의 Las Leandras(1931)이며 베리스모 스타일의 대표적인 작품은 호세 세라노(José Serrano: 1873-1941)의 La dolorosa(1930)이다. 1930년대에는 파블로 소로사발(Pablo Sorozabal: 1897-1988)이 1890년대의 풍자적인 스타일을 복구해 보려고 시도하였으나 스페인 내전이 있는 후부터는 스페인 특유의 사르수엘라는 어느덧 미국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닮은 이상한 형태의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1960년대 이후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통적인 사르수엘라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클래시컬한 사르수엘라가 그나마 노년층 사이에서 계속 인기를 끌었다.

 

사르수엘라 극장에서의 공연

                         

사르수엘라는 그렇다고 치고 순수 오페라는 어떠했는가? 20세기 중반 이후부터 대화체의 대사가 나오지 않고 모든 대사과 가사를 음악 반주에 맞추어 부르는 오페라도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누엘 데 활라(Manuel de Fall: 11876-1946)의 '아틀란티다'(Atlantida: 사후인 1962에 초연), 엔리크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 1867-1916)의 단막 오페라인 '고야의 사람들'(Goyescas), 토마스 브레톤의 '라 돌로레스'(La Dolores), 그리고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한 이삭 알베니즈(Isaac Albéniz: 1860-1909)의 런던을 위한 영어 오페라인 '멀린'(Merlin)과 '헨리 클리포드'(Henry Clifford), 뱌르셀로나의 그란 테아트로 델 리세우(Gran Teatro del Liceu)를 위한 '페피타 히메네즈'(Pepita Jiménez)는 이 시대의 스페인을 대표하는 오페라들이다. 그러나 스페인어로 된 스페인의 오페라는 아직 외국 공연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유명한 테너이기도 한 마누엘 가르시아(Manuel Garcia: 1775-1832)는 이탈리아어로 된 '교활한 애인'(L'amanate astuto)과 '바람의 딸'(La fignlia dell'aria)을 만들어 19세기에 뉴욕의 무대에 올린 일이 있지만 스페인어 오페라는 20세기까지 기다려야 했다. 미국에서 공연된 스페인어 오페라로서는 아르센티나의 알베르토 지나스테라(Alberto Ginastera: 1916-1983)의 '보마르초'(Bomarzo)가 1967년에 뉴욕에서 공연되었으며 멕시코 출신의 다니엘 카탄(Daniel Catán: 1949-2011)의 '아마존의 플로렌시아'(Florencia en el Amazonas)가 1996년에 휴스턴에서 공연된 것이 있다.

      

그라나도스의 '고야의 사람들' 공연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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