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카이저그루프트

카이저그루프트의 모든 것

정준극 2013. 8. 6. 07:00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의 모든 것 - Imperial Crypt

비엔나 시내 카푸친 교회/수도원 지하의 황실납골당

 

비엔나 1구 노이어 마르크트의 한 쪽에 있는 카푸친교회/수도원. 2011년 7월 15일. 이날 오토 황태자의 시신이 카이저그루프트로 옮겨져서 영원히 안치되는 장면을 보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카푸친 교회 앞에 모여 있다.

 

거의 7백년동안 유럽의 맹주로서 군림하였던 저 유명한 합스부르크 황실에 대하여 좀 더 실감있게 알고자 하면 비엔나에서 다음 세 곳을 필견해야 한다. 우선은 호프부르크 궁전에 있는 제국보물박물관이다. 독일어로는 샤츠캄머(Schatzkammer)라고 부르며 영어로는 임페리얼 트레져리(Imperial Treasury)라고 부르는 곳이다. 말하자면 신성로마제국 황제들과 합스부르크 황실의 각종 보물들을 보관해 놓은 거대한 금고나 마찬가지인 곳이다. 세속적인 보물도 있지만 종교적인 보물들도 놀랍도록 간직되어 있다. 예를 들면 로마병사가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찌른 창도 전시되어 있다. 두번째는 역시 호프부르크에 있는 황실 아파트와 엘리자베트 기념관(씨씨 박물관: Sissi Museum)이다. 씨씨 박물관은 씨씨라는 애칭의 엘리자베트 황비를 기념하는 전시실이다. 그리고 세번째가 오페라극장(슈타츠오퍼)의 뒷편, 노이어 마르크트(Neuer Markt) 광장의 한쪽에 있는 카푸친교회의 지하에 있는 황실납골당(또는 황실 영묘: 카이저그루프트)이다. 황실납골당은 독일어로는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라고 부른다. 카이저(Kaiser)는 황제라는 뜻이고 그루프트(gruft)는 아치 모양의 지하 납골실을 말한다. 특히 왕실이나 명문귀족의 가문에서 세상 떠난 사람들의 시신을 모신 관들을 보관해 놓은 곳을 그루프트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지하의 납골실을 말한다. 이제부터 카이저그루프트에 대하여 소상히 알아보자. 비엔나에 있으면서 몰라서도 그렇겠지만 알면서도 찾아가지 않게 되는 곳이 바로 카이저그루프트이다. 오스트리아의 역사, 합스부르크 황실, 신성로마제국에 대하여 좀 더 알고 싶으면 카이저그루프트를 찾아가 보아야 할 것이다.

 

비엔나 시내, 카푸친교회/수도원의 지하에 있는 카이저그루프트. 아름답고 정교한 조각만 보아도 입장료를 지불하고 들어온 값어치가 있다.

 

우선 카푸친교회/수도원에 대하여 잠시 소개코자 한다.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예를 들어 비엔나의 교회편)에서 소개되었긴 하지만 복습하는 의미에서 소개코자 한다. 잘 아는대로 1517년에 마르틴 루터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을 일으켰다. 독일을 중심으로 동구와 북구의 여러 나라에서 부패한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는 불길이 요원하게 번졌다. 로마 가톨릭인 합스부르크가 관장하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인 독일에서의 종교개혁 운동은 합스부르크에게 아주 난처한 입장을 만들어 주었다. 신성로마제국에 속하여 있는 여러 나라들이 로마 가톨릭의 전횡에 반대하여서 개신교로 돌아서자 합스부르크는 로마에 있는 교황청에 대하여 얼굴을 들지 못할 처지가 되었다. 로마 교황청으로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어떤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회를 중간에 넣어서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운동을 펼치도록 했다. 로마 교황청은 비단 예수회가 아니더라도 로마에 있는 여러 종단들의 수도승들을 종교개혁의 물결이 퍼지고 있는 지역으로 보내어 개신교로 개종했던 사람들을 다시 로마 가톨릭으로 돌아오게 하는 운동을 펼쳤다. 아무튼 그같은 노력의 일환으로 1599년에 로마에 있던 일단의 카푸친 수도승들이 반개혁운동을 이끄는 사명을 띠고 개신교가 활발한 프라하로 발길을 향했다. 이들은 프라하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비엔나에 머물면서 사정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러나 예수회 사람들은 프라하에 갔다가는 공연히 개신교도들로부터 '여긴 왜 왔느냐?'는 질문과 함께 몽둥이 찜질을 받을 것 같고 또한 여러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계속 비엔나에 눌러 앉아 있게 되었다. 그러는데 마침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마티아스의 황비 안나(1585-1618: 티롤의 안나)가 유언으로 카푸친 수도승들을 위한 교회와 수도원을 건축해 달라고 당부했다. 안나 황비와 마티아스 황제는 기왕에 카푸친 교회/수도원을 짓고 나면 지하에 황실납골당을 별도로 만들어서 우선 자기들이 요단강을 건너간 후에 입주하게 되기를 소망했다. 카푸친 교회와 수도원의 위치를 현재의 장소로 택한 것은 호프부르크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안나 황비는 유언장에서 상당한 기금을 카푸친 교회/수도원 건축과 황실납골당 설립 비용으로 남겨 놓는다고 적었다.

 

티롤의 안나. 카푸친 교회/수도원을 건축토록 했다. 합스부르크 여인이다.

 

카푸친 교회/수도원의 건축 계획은 안나 황비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해인 1618년부터 착수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저 유명한 '프라하의 창문 던지기' 사건이 벌어졌고 이로 인하여 세계사의 한 대목을 기록하는 '30년 전쟁'(1618-1648)이 일어났기 때문에 연기될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안나 황비의 부군인 마티아스 황제는 부인 안나가 세상을 떠난 바로 그 다음 해에(1619) 자기가 무슨 순애보의 주인공이라고 역시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공사를 적극 주도할 사람이 없었고 공사는 지연될수 밖에 없었다. 카푸친 교회/수도원 및 황실납골당은 안나 황비가 유언을 남긴 때로부터 4년 후인 1622년에 마티아스 황제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2세 황제에 의해 정초식을 가졌고 또 그로부터 10년 후인 1632년 7월 25일에 완공되어 봉헌되었다. 1632년이라고 하면 아직도 30년 전쟁의 전화가 꺼지지 않고 있던 때였다. 그 다음해인 1633년 부활절에 마티아스 황제와 안나 황비의 간소한 석관을 카푸친 교회의 지하납골당으로 이전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석관들은 간소하였지만 의식은 대단한 규모의 것이었다. 마티아스 황제와 안나 황비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는 장소를 '설립자의 납골당'(Die Gründergruft: Founder's Vault)이라고 부른다. 기왕 얘기가 나온 김에 덧 붙인다면, 안나 황비와 남편인 마티아스 황제는 4촌간이었다. 즉, 마티아스의 아버지인 막시밀리안 2세 황제와 안나의 아버지인 오스트리아 대공인 페르디난트 2세는 형제간이었다. 안나와 마티아스가 결혼한 것은 1611년으로서 그때 안나는 26세였고 마티아스는 54세의 노년이었다. 한마디 더 덧붙인다면, 카푸친 수도회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수도회의 수도승들이 외투에 후드가 달린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다. 후드가 달린 겉옷을 카푸친이라고 불렀다. 카푸친이라는 말은 어쩐 일인지 커피에 약간의 우유를 섞은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되고 있다. 카푸치너가 바로 그것이다. 아마 카푸친 종단의 수도승들이 이탈리아에서 자주 마셨던 모양이다.

 

카이저그루프트에 있는 마티아스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안나 황비의 석관. 이 두사람이 처음으로 카푸친납골당을 만들었고 첫 입주자가 되었다. 이 장소를 ''설립자의 납골당'(그륀더그루프트)라고 부른다.

                               

1657년에 레오폴드 1세 황제(1640-1705)가 교회 본당 회중석 아래쪽으로 납골당을 확장하였고 그의 아들 요제프 1세(1678-1711) 황제가 1710년에 납골당을 서쪽으로 더 확장하였다. 그후 요제프 1세의 동생인 칼 6세(샤를르 6세: 1685-1740: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가 1720년에 납골당을 카푸친 교회의 성단소와 콰이어있는 곳 까지로 확대하였다. 지금까지의 확장 공사에는 황실 소속의 일반 건축가들이 동원되었지만 칼 6세의 확장공사 때부터는 저명한 건축가인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brandt)가 참여하였고 이후 여러 명의 위대한 건축가들이 카이저그루프트의 확장과 보수에 동참하였다. 칼 6세의 뒤를 이은 마리아 테레지아가 1754년에 납골당을 서쪽으로 더 확장하였다. 그래서 사실상 교회 지하를 벗어나서 수도원의 정원까지 연결되는 납골당이 되었다. 책임을 맡은 건축가는 장 자도 드 비유 이시(Jean Jadot de Ville-Issey)였다. 그후 당분간은 확장공사가 없었다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손자가 되는 프란시스 2세 황제 때에 건축가 요한 아만(Johann Aman)의 주도아래 1824년에 이번에는 북쪽으로 확장하는 공사가 완료되었다.

 

카이저그루프트의 일반적인 모습

                                

세월이 흘러 카푸친교회/수도원을 건축한지도 200여년이 지났다. 그동안 교회와 수도원 건물들은 별다른 보수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당히 손상되고 황폐되었다. 그래서 1840년 페르디난트 황제 때에 피폐된 수도원 파트만을 완전히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그렇지만 교회 건물은 그대로 두었다. 다만 지하실이 새로운 구조로 완성되었기에 납골당도 추가로 마련하였다. 이때 마련된 납골당이 페르디난트 납골당(Die Ferdinandsgruft)과 투스칸 납골당(Die Toskanagruft)이다. 이어 1908년에는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의 황제 즉위 60주년을 기념하여 프란츠 요셉 납골당(Die Franz Josephs Gruft)이 완성되었고 또한 프란츠 2세 납골당과 페르디난트 납골당의 동쪽에 조그만 예배처(Gruftkapelle)를 완성하였다. 이와 함께 교회 양쪽으로 방문객들이 카이저그루프트에 들어갈수 있는 출입구도 마련되었다.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관.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의 아버지이다. 무능한 황제라는 소리를 들었으나 관만은 높은 자리에 있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에 이르러서 보니 카이저그루프트의 환경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카이저그루프트의 실내 온도와 습도를 조절할 필요가 절실했다. 관람객들이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그들이 내뿜는 온도가 금속관들의 부식에 기여를 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에어콘 시설이나 난방시설이 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부 온도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영향도 있었다. 장마철이나 눈이 많이 내리면 습기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 투스칸 납골당의 북쪽에 있는 새로운 볼트와 페르디난트 볼트 및 프란츠 요셉 볼트는 건축가 칼 슈봔처(Karl Schwanzer)가 설계하고 건축한 것이다. 이 세 볼트가 전체 납골당의 2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각 볼트에 있는 관들을 대폭적으로 다시 정리하고 이동하여 공간을 최대로 정리하고 활용할 필요가 생겼다. '설립자의 볼트'는 비교적 공간이 협소하였다. 이곳에는 설립자인 마티아스 황제와 안나 황비의 관, 그리고 10여명 황실 어린아이들의 관들이 비좁게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린아이들의 관이 있는 곳은 '천사의 볼트'(Angel's Vault: Children's Columbarium)라고 불렀다. 아무튼 어린아이들이 관들은 새로 만든 레오폴드 볼트(Die Leopoldsgruft)로 옮겼다. 각 볼트에 있는 관들도 선별해서 새로운 볼트로 보내어 밀집을 최소화했다. 그리고 그룹별로 정리하기도 했다. 즉, 비숍의 볼트, 마지막 황제의 직계 선조들의 볼트, 아슈페른의 용장 샤를르 대공의 직계 가족들의 볼트 등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의 관. 관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품이다.

                                                       

개중에는 황실 가족이기는 하지만 황제나 황비와 촌수가 먼 사람들의 관들도 있다. 이들을 정리해서 페르디난트 볼트에 네개의 층으로 된 선반을 만들어 그곳에 얹어 두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이같은 대대적인 작업으로 인하여 전체 관들의 거의 절반 이상이 자리가 옮겨졌다. 대조직개편은 성공적이었다. 2003년에는 장애우를 위한 시설이 마련되었다. 그래서 지체부자유자들이 지하 납골당에 쉽게 출입할수 있게 했다. 또한 그동안 사용하지 않고 있던 출입문을 개방하여 출구로 삼았다. 그러므로 관람자들이 납골당을 모두 관람하고 처음 들어왔던 곳으로 되돌아 갈 필요가 없이 별도의 출구로 나갈수 있게 되었다. 2003년에는 납골당 전체에 에어콘을 설치했다. 관들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카이저그루프트에 대하여 개괄적으로 소개하자면, 앞에서 언급한 대로 카이저그루프트는 1633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장장 거의 380년의 역사와 운명을 함께 했다. 현재 이곳에는 145개에 이르는 합스부르크 황족들의 관이 있다. 관은 아니지만 황족의 심장 또는 화장을 지낸 후 남은 유분 및 유골을 담은 단지도 4개가 있다. 전체 145개의 관 중에서 황제의 관이 12개, 황비의 관이 18개이고 나머지는 왕자(대공), 공주(대공녀) 등의 관이다. 보관되어 있는 관들은 어떤 것은 청교도 스타일로서 밋밋한 디자인의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화려하기가 이를데 없는 로코코 양식의 조각으로 만들어진 것들도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 프란시스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합장관이 대표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답다. 카이저그루프트의 규모는 길이가 35미터이며 넓이가 16미터에 이른다. 그리고 아치형 볼트의 천장 높이는 10미터까지 이른다. 다만, 카이저그루프트에 대하여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관에는 물론 시신이 들어 있다. 그러나 온전한 시신이 아니다. 심장과 내장을 따로 분리한 시신이다. 이들의 심장은 아우구스티너키르헤의 지하납골당에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내장은 성슈테판서당의 지하납골당에 보관되어 있다. 부활의 날에 시체가 여러 곳에 나누어져 있으면 부활에 참여하기가 용이하다는 신통한 생각에서였다. 

 

로코코 양식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관

                       

합스부르크 황실과는 혈연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들의 관도 3개가 있다. 하나는 카롤리네 폰 푹스 몰라르드(Karoline von Fuchs-Mollard) 백작부인의 것이다. 푹스 백작부인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낸 사람이었다. 푹스 백작부인은 부군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생을 함께 동반해준 친구였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푹스 백작부인이 자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코자 했다. 주위에서 반대가 있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푹스 백작부인은 가족 이상의 관계다'라고 주장하여 합스부르크 황실 사람들만 안치되는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토록 했다. 푹스 백작부인의 관 뚜껑에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직접 서명한 문구가 적혀 있다. Zum unsterblichen Angedenken eines wohlwollenden dankbaren Herzens für die edle Erziehung zur Tugend. Ich, Maria Theresia 라는 글이다. 평생을 함께 해서 고맙다는 내용이다. 또 한 사람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인 스테픈 프란시스 황제의 형으로서 트리어의 대주교인 로트링겐(로레인)의 칼 조셉(칼 3세)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동생을 만나기 위해 비엔나와서 지내던 중 성홍렬에 걸려 1715년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처음에는 칼 조셉의 석관을 미노리텐기르헤에 안치하였으나 이듬해인 1716년에 카이저그루프트로 이전하였다. 또 한 사람은 유명한 라데츠키 장군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으로 잘 알려진 바로 그 요한 라데츠키(Johann Radetzky: 1766-1858) 장군이다. 라데츠키 장군은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홀라브룬지역에 있는 헬덴버그(Heldenberg: 현충원)에 안치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1858년 세상을 떠나자 프란츠 요셉 황제는 '라데츠키 장군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일원이나 마찬가지로 영광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카이저그루프트에도 그의 묘소를 마련했다. 원래 라데츠키 장군은 유언으로 그의 친구인 요제프 고트프리트 파르그프리더에게 매장지 등 일체를 위임했었다. 요제프 고트프리트 파르그프리더는 제국의 군대에 군수품을 납품하던 부유한 상인으로서 1849년에 니어외스터라이히주의 클라인베츠도르프라는 마을에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군주들과 위대한 장군들을 기리는 판테온(일종의 현충원)을 조성한바 있다.

 

헬덴버그의 카이저알레(황제의 길). 합스부르크 제국 황제들의 흉상들이 양 옆에 세워져 있다. 헬덴버그에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헌신한 위대한 장군들의 흉상들이 있으며 아울러 납골당도 마련되어 있다. 합스부르크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곳을 반드시 한번 방문해야 할 것이다.

                              

나폴레옹과 합스부르크의 마리 루이제 사이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프란츠 보나파르트(Napoleon Franz Bonaparte: 1811-1832)의 관은 1940년까지 카이저그루프트에 있었다. 그러다가 히틀러가 그것을 프랑스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는 바람에 프랑스로 보내어 현재 파리 앵밸리드에 안치되어 있다. 비엔나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프란츠 보나파르트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비명에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조피는 아르스슈테텐 궁전에 별도로 납골당을 만들어 안치하였다. 이들의 세 자녀들도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합스부르크 황실의 일원으로서 다음번 황위 계승자로 지정되었던 사람이지만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되지 못하고 다른 곳에 안치된 특별한 경우이다.

 

니더외스터라이히주 봐하우 계곡 부근에 있는 슐로쓰 아르트슈테텐의 지하 납골당에 있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조피 부부의 석관. 두 사람이 1914년 사라예보에서 총탄에 숨지는 바람에 4년에 걸친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가장 최근에 안치된 합스부르크 황족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오토이다. 2011년 7월 15일에 이곳에 안치되었다. 오토(Otto: 1912-2011)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칼(Carl)의 아들로서 1916년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1918년 1차 대전의 종말과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제가 되는 바람에 아버지 칼 황제와 함께 추방 생활을 하였다. 칼 황제는 일찍이 스페인 영토인 대서양의 마드라 섬에서 세상을 떠났고 오토는 향년 98세로서 독일 남부의 푀킹에 있는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합스부르크 황실 소속의 오토를 존경하여서 그의 시신을 비엔나로 옮겨와서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초록 하였다. 오토는 아마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되어 있는 합스부르크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이 들어서 입주한 경우일 것이다. 향년 99세였다. 그리고 물론 합스부르크의 가장 마지막 인물이다. 오토의 부인이 레지나도 2011년 7월 16일에 카이저그루프트에 입주하였다. 오토 황태자 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입주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비인 치타(Zita)일 것이다. 오토의 어머니이며 칼 황제의 황비이다. 향년 97세로서 카이저그루프트의 멤버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여인으로서 그렇게 오래 살았던 것은 드믄 일이다. 합스부르크의 왕자와 공주들 중 거의 4분의 1 이상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다. 당시에는 유아사망률이 대단히 높았었다.

 

슈테판스돔 중앙제단 앞에 안치되어 있는 오토 황태자의 관. 2011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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