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이탈리아의 오페라

오페라의 원조

정준극 2013. 8. 19. 21:15

오페라의 원조 이탈리아

 

라 스칼라. 세계 최고의 오페라의 전당.

 

이탈리아의 오페라라고 하면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이 작곡했고 이탈리아에서 공연된 오페라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페라라는 것은 두 말하면 잔소리이지만 이탈리아에서 비롯되었다. 플로렌스에서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종래의 것보다는 다른 개념의 음악극을 오페라라고 부르기로 하자고 해서 오페라라는 장르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종주국이며 원조이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가 성행하자 다른 나라에서도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수입해서 공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기 나라 사람들이 이탈리아어로 된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아예 이탈리아의 오페라 공연팀을 초청해서 공연토록 했다. 이탈리아 오페라단들은 멀리 러시아까지 가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연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로 된 오페라이기 때문에 이탈리아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라서 답답하기만 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면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돈 주고 관람했다. 그러다가 오페라를 수입해서 공연하는 것도 좋지만 차라리 오페라 작곡가까지 수입해서 국내산 이탈리아 오페라를 생산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들을 했다. 그리하여 한다하는 이탈리아의 작곡가들이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등지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수출되어 가서 오페라를 작곡하며 수입을 올리고 이름도 날렸다. 예를 들면 로시니와 벨리니는 프랑스에 가서 활동했고 베르디도 그랬으며 살리에리는 오스트리아에 가서 활동했다. 작곡가 뿐만 아니라 대본가들도 외국으로 진출했고 성악가들과 악기 연주자들도 열심히 다른 나라에 가서 공연을 하고 돈을 벌었다. 그런가하면 다른 나라의 작곡가들이 일부러 이탈리아에 가서 오페라를 공부하고 어느 정도 실력이 되면 오페라를 작곡해서 이탈리아에서도 발표하고 자기 나라에 와서도 발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독일의 헨델이 이탈리아에 가서 공부하고 작곡하였으며 모차르트도 긴 기간은 아니지만 이탈리아에 가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공부했고 프랑스의 마이에르베르는 아예 이름도 자코모라고 이탈리아 식으로 바꾸어 활동한 것은 간단한 예이다.

 

플로렌스(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본고장이며 오페라의 발상지이다.

 

그런가하면 파리음악원에서는 그랑 프리 드 롬(Grand Prix de Rome)이라는 상을 만들어서 작곡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학생들을 선정하여 이탈리아에 파견하기도 했고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영주나 군주들이 국비를 들여 작곡가들을 이탈리아로 보내 공부하도록 했던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솔직히 말해서 유럽의 오페라 무대는 온통 이탈리아 오페라가 장악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논함에 있어서 비록 이탈리아인이 아니더라도 이탈리아 스타일에 이탈리아어로 작곡한 오페라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범주에 포함토록 했다. 예를 들어서 헨델, 글룩, 모차르트도 모두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든 경력이 있다.

 

자코포 페리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고 있는 오페라들은 거의 모두 이탈리아 제품들이다. 주로 19세기와 20세기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작품들이다. 대표적인 오페라 작곡가들로서는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 베르디, 푸치니 등을 꼽을수 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이들의 오페라들이 공연되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인 것을 보면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들의 영향력이 대단하긴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거듭되는 설명이지만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나라이다. 웃기는 얘기로서 이탈리아의 거리는 오페라로 포장되어 있고 다른 나라들의 거리는 돌맹이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웬만한 도시면 당연히 오페라 극장이 있다. 심지어는 작은 마을에도 다른 것은 없어도 오페라극장이 있는 곳이 허다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누구든지 오페라 아리아 한 두 곡 쯤은 문제 없이 부를줄 안다. '라 돈나 에 모빌레'를 모른다거나 '바 펜시에로'를 모른다면 이탈리아 사람이 아니다. 이탈리아에는 오페라 작곡가들이나 또는 오페라 주인공들과 관련된 거리 이름, 호텔, 식당-카페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심지어는 음식에도 오페라 작곡가들이나 오페라 주인공들의 이름을 붙인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로시니 스테이크'(Tournedos Rossini), '노르마 스파게티'(Spagetti alla Norma) 등이다. 오페라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활이다. 이제 그런 오페라가 이탈리아에서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살펴보자. 별로 재미는 없겠지만 공부하는 셈 치고 읽어주기 바란다.

 

오페라의 아버지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오페라의 역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항상 논란이 되는 토픽이 있다. 오페라의 연혁에 있어서 첫 오페라는 과연 누구의 어떤 작품이냐에 대한 것이다. 더러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를 오페라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 그의 '오르페오'가 역사상 첫 오페라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코포 페리(Jacopo Peri: 1561-1633)의 '다프네'(1597)야 말로 역사상 첫 오페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다프네'는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음악적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이며 더구나 스코어가 분실되어서 어떤 내용인지도 모른다. 어떤 학자들은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Emilio de' Cavalieri: c 1550-1602)의 '영혼과 육체의 대화'(La Rappresentatione di Anima e di Corpo)가 역사상 첫 오페라라고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영혼과 육체의 대화'는 오페라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설명이다. 오히려 종교적인 음악극에 더욱 가깝다는 얘기들이다. 그러는 중에 1600년에 자코포 페리가 오페라 '에우리디체'(Euridice)를 내놓았다. 메디치가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작곡한 것이다. 그전까지는 인테르메디오(Intermedio) 또는 인테르메쪼(Intermezzo)라는 형식의 음악극 비슷한 것이 있었고 마드리갈, 프로톨라, 빌라넬라 등의 초보적 수준의 음악극이 있었지만 1600년의 '에우리디체'는 우선 무대가 스펙터클해서 보는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고 여기에 음악적 요소가 상당히 포함되어서 귀도 즐겁게 해준 것이었다. 사람들은 '에우리디체'를 새로운 형태의 음악극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고 그로부터 궁전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그런 행사가 있으면 '에우리디체' 스타일의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를 우선 준비했다. 국왕이나 귀족들로서도 그렇게 해야 자기의 체면이 선다고 믿었기 때문에 스펙터클 무대를 선호했다. 그나저나 '에우리디체'가 처음 공연된 1600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는 조선조 선조시대로서 정유재란이 있었던 직후가 된다. 그 때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자코포 페리, 줄리오 카치니,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등이 오페라를 발전시키며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자코포 페리의 '에우리디체' 음반 커버

               

그런데 자코포 페리,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등에 의한 새로운 스타일의 오페라가 이탈리아의 궁정에서 인기를 끌게 된 것과는 별도로 '마드리갈 코메디'라는 작품들도 궁정에서 연예 프로그램으로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나중에 사람들은 '마드리갈 코미디'가 오페라와 연계되는 것이 바람직 하다고 생각하여서 '마드리갈 오페라'라고 불렀다. '마드리갈 코미디'는 드라마틱한 대사가 나오는 등 무대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지만 출연자들의 액션은 거의 없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그자리에 가만히 서서 노래만 열심히 불렀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고 있는 오페라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가하면 음악적 파스토랄(Pastoral)이라는 장르도 있었다. 목가적인 내용의 음악극이라고 보면 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서는 에밀라오 데 카발리에리(Emilio de'Cavalieri: 1550c-1602)의 Il Satiro(사티로스)와 La Disperazione di Fileno(필레노의 절망)이다. 두 작품 모두 1590년에 공연되었다. 이 두 작품의 경우에는 아리아가 몇개만 나올 뿐이고 레시타티브는 없지만 그래도 오페라의 원조 정도로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코포 페리 조차도 '에밀리오 데 카발리에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음악을 무대에서 들을수 있도록 해 주었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또 하나의 파스토랄 연극으로서 오래동안 공연되어 왔던 것은 안젤로 암브로지니 폴리치아니(Angelo Ambrogini Poliziani: 1454-1494)의 La fabula d'Orfeo(오르페오 이야기: 1480)이다. 여기에는 노래 세곡과 합창 한곡이 나온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그게 연극이지 무슨 오페라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만해도 대단한 변화여서 모두들 오페라라고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17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

1597년에 공연했다는 자코포 페리의 '다프네'는 스코어가 없다. 분실되었다. 스코어가 남아 있는 최초의 오페라는 자코포 페리와 줄리오 카치니가 공동으로 음악을 붙이고 리누치니(Rinuccini)가 대본을 쓴 '에우리디체'이다. 1600년에 프랑스의 앙리 4세와 메디치가의 마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오페라이다. 오페라 '에우리디체'의 스토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아리아라고 생각되는 노래는 실은 일반적인 평범한 대사를 과장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혹자는 일반적인 대사를 고상하게 표현했다고 말했지만 그게 그거였다. 그리고 드라마틱한 레시타티브는주로 현악기가 반주를 하여 뒷받침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당시의 레시타티브는 오늘날 말하는 아리아의 전신이라고 말할수 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극중에 별도의 노래들을 만들어 넣거나 또는 대사가 없는 장면에서는 악기들이 간주곡 형식의 연주를 하게 했다. '다프네'와 '에우리디체'에서는 각 막의 끝에 합창을 두어서 그 막의 내용을 종합하여 설명해 주거나 또는 앞으로 어떤 일이 예상된다는 식의 노래를 들려주도록 했다. 이것은 어찌보면 고대 그리스의 비극 공연에서의 스타일을 계승한 것이다. 어쨋거나 이상하게도 당시 오르페오 이야기는 상당한 인기를 끌어서 얼마후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가 진정한 의미에서 최초의 오페라라고 할수 있는 '오르페오 전설'(La Favola d'Orfeo: The Fable of Orpheus)을 작곡하여 1607년에 만투아 궁전에서 공연했다. 오르페오는 음악의 신이나 마찬가지의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인간이므로 오페라의 주인공으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던 것 같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전설'은 간단히 '오르페오'(L'Orfeo)라고 부른다.

 

그러면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전설'보다도 페리의 '다프네' 또는 '에우리디체'가 먼저 공연되었는데 어찌하여 '오르페어 전설'을 역사상 최초의 오페라로 간주하는 것일까? 몬테베르디는 가사와 음악의 관계를 강조하였다. 그리고 활기있는 드라마를 추구했다. 만투아에서 '오르페오 전설'이 공연될 때에는 오케스트라 멤버들이 38명이나 되었다. 종전에는 5-6명이 고작이었던 것과 비교해 보면 대단한 규모가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음악적인 효과를 높일수 있었다. 여기에 합창을 크게 강화하였다. 과거의 관례에 의하면 합창은 각 막의 마지막에 등장할 뿐이었으나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전설'에서는 합창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자유스럽게 등장토록 했다. 레시타티브도 극적인 뉘앙스를 더욱 충분히 가지도록 했다. 하여튼 종전의 오페라에 비해서 모든 것이 풍부하고 다양했다. 특히 무대배경을 이국적으로 만들어서 흥미를 갖게 했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오케스트라가 음악적으로 강력한 클라이막스를 표현토록 했고 성악가들도 높은 기교의 노래를 부르도록 한 점이다. 과연! 오페라는 몬테베르디의 손에 의해 성숙한 무대를 처음으로 마련해 주었다.

 

몬테베르디의 '오르페오' 음반 커버

                      

플로렌스와 만투아를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오페라는 불과 몇 십년 후에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기에 활동했던 작곡가들의 면모를 보면 루이지 로시(Luigi Rossi), 미켈란젤로 로시(Michelangelo Rossi), 마르코 마라쫄리(Marco Marazzoli), 비르질리오 마쪼키(Virgilio Mazzocchi), 스테파노 란디(Stefanor Landi) 등이다. 대본가로서는 줄리오 로스필리오시(Giulio Rospigliosi)를 꼽을수 있는데 그는 고위성직자로서 나중에 교황 클레멘트 9세가 된 인물이다. 17세기 당시에는 오페라의 주제들이 대체로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것들이었다. 그러다가 1730년대부터는 취향이 바뀌어서 목가적인 내용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아르카디아에 대한 내용은 대표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성서적인 내용이나 성인들의 이야기도 자주 다루었다. 대표적인 대본가들로서는 루도비코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와 토르쿠아토 타소(Torquato Tasso)가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일종의 순회극단이 있어서 주로 기독교적인 내용을 연극과 음악을 합하여 공연하는 것이 성행했었다. 그런 극단들, 또는 그런 내용의 음악극을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라고 불렀다는 것은 참고사항이다.

 

이탈리아의 코메디아 델라르테 공연

 

초창기의 오페라들은 등장인물도 몇 명 되지 않았고 스토리의 전개도 단순한 편이었다. 그것이 다수의 등장인물이 등장하며 스토리도 복잡하게 전개되는 것으로 발전한데에는 로마의 오페라 운동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오페라의 내용이 보다 드라마틱해 졌으며 스토리도 복잡해 져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내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러다가 베니스의 오페라가 등장하였다. 베니스에서의 오페라야 말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앞날을 예비한 것이었다. 베니스의 오페라는 한마디로 말해서 '상업적 오페라'였다. 그 이전의 오페라 공연은 왕궁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주로 여흥목적으로 공연되는 것이었지만 베니스에서는 평민들도 누구나 오페라를 볼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아래에 처음으로 오페라극장을 오픈하였고 일반인들을 위한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공 오페라극장이 생긴 곳은 베니스로서 1637년에 문을 연 테아트로 디 산 카시아노(Teatro di San Cassiano)였다. 산 카시아노 극장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보니 과거의 귀족적인 오페라보다는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오페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과거 왕궁이나 귀족들의 저택에서 공연되었던 오페라는 내용이 주로 신화적이거나 종교적인 것, 또는 왕족이나 귀족들을 찬양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음악적인 면에 있어서고 단순함과 고상함을 우선적으로 생각한 것이었지만 베니스의 일반인을 위한 오페라극장에서는 오늘날의 오페라와 별로 차이가 없는 상당히 발전된 오페라를 공연하였다. 아무튼 베니스로 인하여 바야흐로 오페라의 대중화가 문을 열게 되었다. 베니스 오페라의 특징은 (1) 포멀한 아리아를 강조 (2) 벨 칸토 스타일의 시작. 드라마틱한 표현보다는 성악적 표현 강화 (3) 과거 스타일의 합창과 오케스트라 음악의 규모를 축소 (4) 복잡하거나 사실과 거리가 먼 스토리 (5)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장치 (6) 오페라를 시작하기 전에 팡파레 스타일의 짧은 기악곡 연주. 이것은 나중에 오페라의 서곡으로 발전하였다.

 

몬테베르디의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 무대. 현대적 연출

 

베니스의 산 카시노 극장이 상업적으로 이익을 내자 돈 버는데 있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베니스 사람들은 다른 극장들을 만들어서 오페라를 공연하기 시작했다. 베니스는 특별히 카니발이 유명했기 때문에 카니발 기간 중에 오페라를 공연하여 사람들을 많이 끌어 모았다. 오페라 극장들은 경비절감의 방책으로 소규모의 오케스트라를 상설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극장들은 당대의 뛰어난 성악가들을 섭외하여 출연토록 하는데에 많은 경비를 썼다. 오페라의 내용이야 어떻든, 누가 출연하느냐를 놓고 입장수입이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곧이어 카스트라토와 프리마 돈나의 시대를 열어 놓는 것이었다. 베니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곡가는 몬테베르디이다. 그는 1613년에 만투아에서 베니스로 주민등록을 옮기고 일반극장들을 위해서 오페라를 작곡했다. 몬테베르디는 베니스에서 세편의 오페라를 완성했다. Il ritorno d'Ulisse in patria(율리시스의 조국 귀환: 1640), Le nozze d'Enea con Lavinia(이니아와 라비니아의 결혼: 1641: 분실), 그리고 L'incoronazione di Poppea(포페아의 대관식: 1642)이다. 오페라의 아버지인 몬테베르디는 1643년에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에 활동했던 다른 작곡가들로서는 피에르 프란체스코 카발리(Pier Francesco Cavalli), 안토니오 사르토리오(Antonio Sartorio), 조반니 레그렌치(Giovanni Legrenzi) 등이 있다.

 

몬테베르디의 '포페아의 대관식'

                              

몬테베르디 등에 의한 베니스의 새로운 오페라들은 주로 로마의 역사 또는 트로이 전설을 스토리로 삼은 것이었다. 이런 내용들은 베니스 공국의 영웅적인 위대함을 찬양하고 고귀한 계보를 치하하기 위한 것이다. 이렇듯 고상하고 이상적인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와 코믹한 요소를 첨가하여 일반대중들이 흥미를 갖게 했다. 대부분의 대사는 레시타티브 스타일이지만 간혹 그럴듯한 아리오소 소절들을 노래 줄러서 박수를 받았다. 그런 아리오소들을 아리에 카바테(Arie cavate)라고 불렀으니 결국 아리아 또는 카바티나의 선구자라고 볼수 있다. 그후의 작곡가들은 아리아와 레시타티브를 분명하게 구별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레시타티브보다는 아리아를 더욱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스타일은 몬테베르디의 뒤를 이은 프란체스코 카발리와 안토니오 체스티(Antonio Cesti)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