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오백년의 발자취/이탈리아의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의 수출진흥

정준극 2013. 12. 22. 17:50

이탈리아 오페라의 확산

 

17세기로부터 이탈리아 오페라의 해외진출은 활발히 진행되었다. 언제 어떤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어디에서 처음 소개되었을까? 1628년 '갈라테아'(Galatea)라는 오페라가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바르샤바에서 공연된 것이 이탈리아 오페라의 첫 해외진출이라고 볼수 있다. 미안한 노릇이지만 '갈라테아'를 누가 작곡했는지는 알수 없다. 그해에 바르샤바 궁정에서는 프란체스카 카치니(Francesca Caccini: 1587-1641)의 '알치나로부터의 루지에로 해방'(La liberazione di Ruggiero dall'isola d'Alcina)이라는 오페라가 공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여성 작곡가인 프란체스카 카치니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블라디슬라브 바사 왕자를 위해 3년 전에 작곡해 두었던 것이었다. 이 오페라는 또한 여성 작곡가가 작곡한 오페라 중에서는 가장 처음으로 오페라의 역사에 등장한 작품이었다. 이어 1628년에는 산티 오를란디(Santi Orlandi)가 작곡한 '아치와 갈라테아의 사랑'(Gli amori di Aci e Galatea)이 바르샤바에서 공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나중에 블라디슬라브 바사 왕자는 블라디슬라브 4세가 되었으며 그의 치하였던 1630년대와 1640년대에 바르샤바에서만해도 10여편의 이탈리아 오페라가 공연되어 바르샤바를 동구 예술의 센터로 만들었다. 누가 작곡한 어떤 오페라들인지에 대하여는 기록이 없지만 아마도 당시 궁정교회의 음악감독이었던 마르코 스카치(Marco Scacci)에게서 배운 폴란드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생각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탈리아에서 온 작곡가들의 작품일지도 모른다. 당시에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를 드라마 페르 무지카(dramma per musica)라고 불렀다. 음악을 위한 드라마라는 의미이다. 이에 속하는 오페라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성서이야기에서 가져온 주디타(Giuditta: Judith)이다. 작곡자는 아마도 비르질리오 푸치텔리(Virgilio Puccitelli)일 것으로 보고 있다.

 

'알치나로부터의 루지에로 해방' 현대적 연출무대.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순회공연단이 프란체스코 카발리(Francesco Cavalli: 1602-1676)의 오페라를 공연해서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카발리의 '지아소네'(Giasone: Jason)는 17세기에 대중적으로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지아소네'는 비극이지만 익살풍자를 곁들인 것이어서 인기를 끌었다. 카발리의 오페라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부분은 여주인공으로 하여금 마치 베이스와 같은 저음으로 탄식의 노래를 부르도록 한 것이다. 나중에 그런 표현은 영국의 헨리 퍼셀의 오페라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인 예는 퍼셀의 오페라 '디도와 이니아스'(Dido and Aeneas)에서 '디도의 탄식'인 '내가 땅 숙에 누워졌을 때'(When I am laid in earth)이다. 카발리의 명성은 매우 높아서 1660년에는 마차린(Mazarin) 추기경이 그를 프랑스로 초청하여 루이 14세와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와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사실상 이탈리아의 오페라들은 1640년대에 이미 프랑스에서 공연되었다. 반응은 혼합된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기야 프랑스만큼 자체 문화와 언어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한 나라도 없을 터이니 이탈리아 오페라라고 해서 전적으로 환영만 받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발리의 프랑스 진출은 재앙으로 끝났다. 프랑스의 관중들은 1660년도 카발리의 오페라인 '세르세'(Xerse)에 대하여 별로 좋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1662년에 특별히 프랑스 관중들을 위해 작곡한 Ercole amante(사랑에 빠진 헤라클레스)도 마찬가지였다. 대신에 프랑스 관중들은 플로렌스 출신의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가 작곡한 오페라를 선호하였다. 륄리의 오페라에는 각 막의 사이에 발레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카발리는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지아소네'의 무대. 호주 오페라단. 현대적 연출.

 

안토니오 체스티(Antonio Cesti: 1620-1669)의 경우에는 카발리보다는 운이 좋았다. 체스티는 1668년에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궁정으로부터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제작된 것이 '황금사과'(Il pomo d'oro)였다. 파리스 왕자와 트로이의 헬렌에 대한 이야기이다. '황금사과'는 대성공이었다. 비엔나의 암 호프(Am Hof) 광장에 커다란 무대를 만들고 공연했다. 어찌나 규모가 장대했던지 단 하루만 공연하고 무대를 치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어서 이틀에 걸쳐 공연되었다. 1668년의 7월 12일에는 서막과 1막, 2막이 공연되었고 이틀 후인 7월 14일에는 3막과 4막, 5막이 공연되었다. 원래 '황금사과'는 합스부르크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드 1세와 스페인의 마르가레트 테레사와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1666년에 공연될 예정이었으나 규모가 커서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려서 2년 후인 1668년에 마르가레트 황비의 17세 생일에 공연하게 되었다. '황금사과'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알프스 북부를 지배하게 된 발판이었다. 17세기에 독일과 영국의 작곡가들은 자기나라 고유의 전통을 살린 오페라를 작곡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미약하여서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들 나라들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오페라에 어쩔수 없이 무대를 내주어야 했다. 그것이 당시 유럽의 오페라 무대상황이었다.

 

'황금사과' 무대. 비엔나 국립도서관 소장.

 

영국에서는 헨델이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들어 냈다. 영국 사람들은 이탈리아어를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이탈리아 오페라를 관람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그저 좋아하는 척 하면서 구경을 하고 박수를 쳤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약간의 저항이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오페라의 발판을 마련해 놓은 사람도 역시 이탈리아 출신인 장 바티스트 륄리라는 것은 아이러니컬 한 일이었다. 아무튼 이탈리아 오페라는 19세기까지도 국제표준 모델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도나도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들어 냈다. 이탈리아 출신의 대본가들이 유럽의 여러 곳에 진출해서 오페라 대본을 만들어 낸 것도 그런 상황을 유지토록 만든 배경이었다. 보라! 독일-오스트리아, 영국, 프랑스에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도적으로 발전시킨 주역들은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헨델, 글룩, 모차르트였다. 그러다보니 자기나라 특유의 오페라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작곡가들은 이탈리아 오페라와 투쟁을 벌여야 했다. 나중에 모차르트가 독일어 대본에 의한 독일 징슈필 스타일의 오페라를 만든 것은 좋은 시도였다. 그리고 드디어 19세기가 되었다. 독일의 칼 마리아 폰 베버와 프랑스의 엑토르 베를리오즈는 이탈리아의 로시니의 엄청한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얘기는 독일과 영국, 프랑스의 오페라 편에서 다루었으므로 현재로서는 이탈리아 오페라에 집중코자 한다.

 

'여자는 다 그래'. 가싱턴 오페라 페스티발. 현대적 연출. 모차르트도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들었다.

 

[18세기]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

 

17세기 말에 오페라가 새로운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좀더 고상하고 순수한 오페라가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어떤 것이 고상한 오페라이고 어떤 것이 순수한 오페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과거의 오페라보다는 음악적으로도 좀 더 고상하고 내용적으로도 좀 더 충실하고 순수한 오페라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라고 여겨진다. 아무튼 그래서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였으니 사람들은 그것을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라고 불렀다. 오페라 세리아를 글자그대로 번역한다면 '심각한 오페라'(Serious opera)이다.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심각한 내용의 오페라여야 한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물론 당시에 공연되는 대부분의 오페라들은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그래서 '비극적 오페라 = 심각한 오페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오페라 세리아'는 오페라다운 순수한 의미의 오페라라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다른 오페라들은 순수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페라 세리아가 오페라 부파(코믹 오페라)와 견주어서 나온 용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페라 부파가 아닌 것은 내용이야 어떻든 오페라 세리아라고 볼수 있다. 사실상 오페라 세리아에도 코믹한 내용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바로크 시대의 여성오페라작곡가 프란체스카 카치니(1587-1641)

 

오페라 세리아는 18세기 말까지 유럽의 전역을 휩쓸다시피했다. 대표적인 작곡가는 카를로 프란체스코 폴라롤로(Carlo Francesco Pollarolo)와 놀랄만큼 다작의 작곡가인 알레산드로 스칼라티(Alessandro Scarlatti)였다. 한편, 18세기에 이탈리아의 예술과 문화 생활은 아카데미아 델라르카디아(Accademia dell'Arcadia)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아카데미아 델라르카디아는 고대 그리스에서 목가적인 아르카디아 생활을 이상으로 삼고 그러한 생활을 추구하는 그룹이다. 이들은 대체로 심미적이고 시적인 예술활동을 모델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저러나 아르카디아 시인들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를 여러 면에서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 내용은 스토리의 단순화, 코믹한 요소의 제거, 너무 많은 아리아의 축소, 그리고 충성, 우정, 덕성과 같은 가치관이 크게 높임을 받으며 군주의 절대권력이 지지를 받는 내용으로 집중된 것이었다. 그러한 가치관은 고대 영웅담이나 전설적인 기사의 스토리에 자주 등장하며 또한 프랑스 비극에서도 찾아 볼수 있는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 스타일의 대본으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698-1782)였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은 너무나 유명해서 하나의 대본으로 십여명의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작곡해도 관중들은 각기 다른 대사들을 구별할수 있을 정도였다. 모차르트도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이용해서 Il sogno di Scipio(스키피오의 꿈), Lucio Silla(루치오 실라), Il re pastore(목동 왕), La clemenza di Tito(티토의 자비) 등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메타스타시오 대본으로 모차르트가 작곡한 '스키피오의 꿈'. 고탐실내오페라

 

오페라 세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있던 17세기에 일각에서 코믹 오페라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속적인 현상은 아니었으며 또한 무슨 전통이 확립된 것도 아니었다. 코믹 오페라의 장르로서 오페라 부파(Opera buffa)가 나폴리를 중심으로 태어난 것은 18세기였다.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부파는 1730년 이후에 크게 인기를 끌게 되었다. 오페라 부파는 오페라 세리아에 비해서 여러 면에서 특징이 있었다. 우선 무대에서의 액션이 다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음악은 드라마의 변화에 따라 맞추어 주면 되는 형식이었다. 노래보다는 대사의 감정표현에 더욱 중점을 두었다. 그 다음으로는 주역급 성악가는 연기도 잘 해야 했다. 드라마를 확신을 가지고 끌어 나가는 성악가가 필요했다. 또한 오케스트라도 그렇게 많을 필요가 없고 그저 적당하면 되었다. 무대장치는 거창할 필요가 없었다. 배경의 변환을 위해 기계장치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출연인원은 최소한이면 되었다. 스토리는 간단해서 이해하기 쉬어야 했다. 예를 들면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La serva padrona)이다. 오페라 부파의 대본은 주로 코메디아 델라르테의 대본들을 참고로 삼은 것들이었다. 사실적인 주제, 일상적인 언어, 심지어 사투리의 사용도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래와 관련해서는 성악적으로 기교를 부리는 아리아들을 기피하였다. 그런 기교적인 노래를 부르다보면 대사를 분명하게 전달하기가 어려울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페르골레지의 '하녀 마님' 무대

                  

18세기 후반에 코믹 오페라가 인기를 끌고 성공을 거둔 배경에는 대본가 카를로 골도니(Carlo Goldoni)와 이탈리아 코믹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하는 작곡가 발다사레 갈루피(Baldassare Galupi)의 기여가 컸다. 이들에 의해서 코믹 오페라는 인터메쪼보다 더 품위 있는 작품으로 발전되었다. 과거에 극의 중간에 여흥으로 공연되던 인터메쪼 형식의 코믹 오페라는 대체로 단막이었으나 18세기 후반부터는 코믹 오페라도 독립적인 2-3막으로 구성되기 시작했으며 따라서 대본의 양도 길어졌다. 그러다보니 스토리가 더욱 복잡해 졌고 또한 과장되기만 한 인물보다는 신중한 역할의 주인공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용은 사회 계층간의 갈등이나 자아발견과 같은 자유주의적 사상도 포함되었다. 골도니와 갈루피 콤비의 합작 중에서 대표적인 작품은 아마도 Il filosofo di campagna(시골의 철학자: 1754)일 것이다. 갈루피는 오케스트라가 풀로 연주하는 가운데 출연자 전원이 등장하여 피날레를 장식하는 이른바 '앙상블 피날레'를 오페라에 도입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대본가 골도니가 콤비로 일한 또 다른 작곡가는 니콜로 피치니(Niccolo Piccini: 1728-1800)이다. 피치니는 오페라 세미세리아(opera semiseria)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간단히 말해서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코믹의 중간쯤 되는 작품으로서 출연자들은 대략 두명의 부포 인물, 두 명의 귀족, 두명의 중간 인물이 나오는 오페라라고 보면 된다. 한편, 단막의 화르사(farsa)라는 것도 코믹 오페라의 발전에 두드러진 영향을 주었다. 화르사는 글자 그대로 익살극이다. 길이가 긴 코믹 오페라를 축소한 음악드라마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지나간 세월에서 화르사는 코믹 오페라와는 별도의 새로운 장르로서 인정을 받아 왔다. 화르사에서는 노래의 기교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오케스트라도 더 세련되게 연주한다. 화르사에서는 서로간의 오해로서 코믹한 사건들이 발생하거나 생각치도 않았던 깜짝 놀라는 내용이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골도니와 갈루피 합작의 '시골의 철학자' 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