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팔라멘트

링슈트라쎄를 압도하는 위용

정준극 2013. 11. 4. 07:25

링슈트라쎄를 압도하는 위용 팔라멘츠게보이데(Parlamentsgebäude)

오스트리아 의사당 건물

덴마크 출신의 건축가 테오필 한젠의 작품

 

팔라멘트의 위용

                      

비엔나의 링슈트라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이 의사당 건물이다. 독일어로는 팔라멘트(Parlament) 또는 호에스 하우스(Hohes Haus)라고 불리는 건물이다. 오스트리아 제국시대에는 라이히스라츠게보이데(Reichsratsgebäude)라고 불렀다. 라이히스라츠는 제국의회라는 말이며 게보이데는 건물이라는 뜻이니 결국 의사당이란 말이다. 팔라멘트의 길 건너편은 폭스가르텐이며 팔라멘트의 위쪽으로는 라트하우스파르크(시청공원)이 자리잡고 있고 아랫쪽으로는 슈멜링플라츠(Schmerlingplatz)를 거쳐 대법원(Justizpalast)에 연결되어 있다. 팔라멘트 앞의 링슈트라쎄는 독토르 카를 렌너 링(Dr. K.-Renner-Ring)이며 뒷길은 라이히스라츠슈트라쎄(Reichsratsstrasse)이다. 독토르 카를 렌너는 '공화국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듣고 있는 인물이다.  비엔나의 팔라멘트건물은 관광명소이다. 특히 정면에 있는 팔라스 아테나 분수는 그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으로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비엔나 필견의 명소이다. 비엔나에 관광을 온 사람이거나 또는 비엔나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링슈트라쎄의 팔라멘트는 그저 차타고 지나칠 뿐이며 건물의 안에까지 들어가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는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국회의원들에 대한 인식이 너무 나뻐서 일반 백성들로서는 국회라고 하면 일단은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듯 싶다. 국회의원에 관한 진지한 농담으로서 이런 것이 있다. 만일 국회의원 300명을 커다란 보따리에 싸서 동해바다에 풍덩 빠트려 모두 익사하게 만들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이다. 대답은 '집단 살인죄로 사형에 처해진다'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누구 말대로 오스트리아 국회의원들은 우리나라 국회의원들처럼 치사하고 사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스트리아 국회의사당을 소개코자 한다.

 

팔라멘터의 건욱가 테오필 한센. 비엔나에서만해도 악우회, 증권거래소, 팔레 토데스코, 군사박물관 등 수많은 건물을 설계건축했다.

 

팔라멘트의 건축은 1874년에 시작되어 9년 후인 1883년에 완공되었다. 책임을 맡은 건축가는 덴마크 출신으로 비엔나에 와서 활동하고 있던 테오필 에드바르트 한센(Theophil Edvard Hansen: 1813-1891)이었다. 한센은 그리스 스타일의 건축에 있어서는 당대에 필적한 인물이 없을만큼 대단한 거장이었다. 한젠은 직접 그리스에 가서 공부하고 활동했다. 아테네국립도서관, 아테네과학아카데미 등 유명건물들은 그의 작품이다. 비엔나에서는 '군사박물관'(1856), '그리스정교회'(1861), 팔레 토데스코(1864), 비엔나 악우회(1870), 비엔나미술대학교(Academy of Fine Arts: 1876), 증권거래소(뵈르제: Börse: 1877), 그리고 팔라멘트(1883)가 그의 대표작이다. 한센은 건축물을 주로 성전 또는 신전 스타일로 짓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고로 아름답고 조화로운 건축물들이다. 비단 외양뿐만 아니라 내부에 있어서도 조각상, 그림, 가구, 샹들리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전체 건축물과 하모니를 이루도록 했다. 한센은 팔라멘트 건물을 완성한 공로로 프란츠 요셉 황제로부터 남작(프라이헤르: Freiherr)의 작위를 받았다. 프라이헤르는 평민에게 수여하는 귀족의 작위이다. 그로부터 한센은 테오필 에드바르드 프라이헤르 폰 한센(Theophil Edvard Freiherr von Hansen)이라는 기다란 공식 이름을 갖게 되었다. 다시 말하거니와, 팔라멘트에서 가장 유명한 파트는 정면을 장식하고 있는 팔라스 아테나(Pallas Athena) 분수이다. 한센이 1898년부터 1902년까지 4년에 걸쳐 완성한 분수로서 그야말로 비엔나 관광의 필수장소이다. 팔라멘트 건물은 2차 대전 중에 폭격을 받아 심하게 손상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전쟁이 끝나자 열심을 다하여 내부까지 말끔히 복구하였다. 그리하여 얼마후 과거의 영광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결실을 얻었다. 1945년에 비엔나를 나치로부터 탈환한 소련군 병사들이 폭격으로 폐허가 된 팔라멘트 앞의 광장에서 비엔나 시민들과 함께 춤을 춘것은 잊지 못할 장면으로 남아 있다.

 

팔라멘트 전경

                                    

오스트리아의 의회는 상하원의 양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원의원은 61명이다. 오스트리아의 9개 주(Bundesländer)에서 인구비례에 따라 선출된 의원들이다. 상원을 분데스라트(Bundesrat)라고 부른다. 인구가 가장 많은 니더 외스터라이히주가 12명의 상원의원을 선출한다. 그 다음은 비엔나로서 11명이고 다음은 오베레 외스터라이히 10명, 슈티리아 9명, 티롤 5명, 카린티아 4명, 잘츠부르크 4명, 부르겐란트 3명, 포아아를버그 3명이다. 하원은 나치오날라트(Nationalrat)라고 부른다. 183석이다. 오스트리아 연방헌법(B-VG)에 따라서 상원인 분데스라트보다 더 강력한 결정권을 갖고 있다. 팔라멘트 건물은 건평이 1만 3천 5백 평방미터에 이른다. 건물에는 100개 이상의 방이 있다. 가장 중요한 회의실은 분데스라트(상원)와 나치오날라트(하원)의 전체회의실이다. 그리고 제국시대에 국민대표로 구성된 의회(Abgeordnetenhaus: 아브게오르드네텐하우스)의 회의실도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아브게오르드네텐이라는 말은 아브오르덴(aborden)이란 단어에서 나온 것으로 국민들이 선출하여 의사당으로 파견한다는 뜻이다. 건물에는 각종 위원회를 위한 회의실이 있으며 이밖에 도서실, 로비, 식당, 바, 체육관 등이 있다. 팔라멘트 건물에서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행사들이 거행된다. 오스트리아 연방대통령의 취임선서식이 열리며 매년 10월 26일 '국가의 날'(Nationaltag)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이 교서를 발표한다. 팔라멘트 건물을 호에스 하우스(Hohes Haus)라고도 부르는 것은 이 건물에서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들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팔라멘트 건물은 대단히 넓은 규모이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더욱 사무가 많아져서 인근 건물들을 빌려서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팔레 에프슈타인(Palais Epstein)이 대표적이다.

 

팔라멘트의 나치오날라트(하원) 회의장

                            

오스트리아에서 국민들의 대표인 의회가 정식으로 출범한 것은 1861년 헌법에 의해서였다. 이 헌법을 페브루아르 파텐트(Februar-Patent)라고 부른다. 1861년 2월에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그 전에는 라이히스라트(제국의회: Reichsrat)라는 것이 있었으나 대체로 귀족들이 멤버였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지 않는 체코나 헝가리의 대표들은 참여기회가 거의 없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새로운 헌법에 의해 구성되는 국민의회를 위한 건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원래의 계획은 두 개의 별도 건물을 짓는 것이었다. 상원이라고 할수 있는 헤렌하우스(Herrenhaus: 귀족원: 상원)를 위한 건물과 하원이라고 할수 있는 아브게오르드네텐하우스(Abgeordnetenhaus: 국민대표의회: 하원)가 사용하는 별개의 건물을 계획했었다. 그러다가 1867년에 헝가리와 대타협(아우스글라이히: Ausgleich)이 이루어져서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고 아울러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하나의 군주 아래에 있지만 의정활동을 별개로 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원래대로의 상하원을 수용하는 별개의 건물이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1860년대에 배링거슈트라쎄에 있었던 임시의사당 건물

 

프란츠 요셉 황제는 1861년 2월의 수정헌법에 따라 국민의회가 생기게 되자 의사당을 새로 짓도록 했지만 그러한 대작업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임시로 의사당으로 사용할 건물이 필요했다. 배링거슈트라쎄(Währingerstrasse)에 임시건물을 짓고 1861년에 프란츠 요셉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개관식을 가졌다. 당시에는 배링거슈트라쎄 2-6번지였다. 그 건물은 아브게오르드네텐하우스라는 정식 명칭이 있었지만 슈멜링하우스 또는 슈멜링테아터(Schmerlingtheater)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다. 첫 의장인 안톤 폰 슈멜링(Anton von Schmerling)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배링거슈트라쎄의 임시의사당은 1883년 새로운 팔라멘트 건물이 링슈트라쎄에 완성되기까지 사용되었다. 링슈트라쎄의 팔라멘트 건물이 완성된 것은 1883년이지만 정작 의회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1884년부터였다. 오늘날 배링거슈트라쎄에 있던 임시의사당은 자취도 찾아볼수 없게 되었으며 그 자리에는 1885년에 마리아 테레지엔호프(Maria-Theresienhof)라는 화려한 주거건물이 들어섰다. 현재의 주소는 콘코르디아플라츠(Concordiaplatz) 4번지이다.

 

콘코르디아플라츠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엔호프. 전에 임시의사당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건물이다.

 

링슈트라세에 장엄하게 서 있는 라이히스라츠게보이데(제국의회건물)는 1918년,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까지 제역할을 다하였다. 제국이 공화국으로 전환되는 날에는 시민 시위대들이 건물을 모두 장악함으로서 제국의회는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였다.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은 이 건물의 정문쪽 램프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되었다. 라이히스라츠게보이데라는 건물의 명칭은 그로부터 팔라멘트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새로 구성된 나치오날라트(하원)와 분데스라트(상원)가 과거의 아브게오르드네텐하우스(하원)와 헤렌하우스(상원)를 대체하였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의회는 오스트리아 파치스트의 독재가 시작되고 아울러 1938년에 나치독일과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합병(안슐르쓰)되는 바람에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였다. 2차 대전 중에는 전체 건물의 거의 절반 이상이 연합군의 폭격으로 대파되었다. 헤렌하우스가 사용하던 회의실, 기둥의 홀은 잿더미가 되었다. 전쟁 후에 새로운 수상인 독토르 칼 렌너가 새로운 공화국의 탄생을 선언했던 방은 과거 아브게오그드네텐하우스의 회의실로 사용하던 방이었다. 파괴된 의사당을 복구하는 계획이 수립되고 막스 펠러러(Max Fellerer)와 오이겐 뵐레(Eugen Wörle)가 책임건축가로서 임명되었다. 주로 헤렌하우스 회의실과 아브게오르드네텐하우스의 회의실을 복구하는데 열심을 다하였다. 그렇게 공사를 하면서 의회 회의실이 필요했기 때문에 새로 분데스라트 회의실을 현대식으로 설치하였다. 그후 다른 공사들도 완료되어 팔라멘트는 한센이 애초에 설계했던 대로의 제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기둥의 홀. 전쟁 중에 완전히 파손되었으나 전후에 오리지널대로 복구되었다.

 

팔라멘트가 세워진 장소는 중세로부터 비엔나를 감싸며 방호하는 요새와 성벽이 있던 곳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1857년에 저 유명한 '짐의 뜻이니'(Es ist Mein Wille)로 시작하는 칙령을 내리고 구시가지의 성벽들을 모두 허물어서 새로운 대로를 만들도록 했다. 링슈트라쎄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새로 조성되는 링슈트라쎄를 따라 제국의 중요한 건물들이 들어서도록 했다. 팔라멘트는 링슈트라쎄의 건물 중에서 가장 중심되는 뛰어난 건물로 만들 생각이었다. 팔라멘트를 호프부르크 및 라트하우스(시청)와 지척에 있도록 한 것은 그러한 아이디어의 산물이었다. 곧이어 팔라멘트 건축을 위한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위원회는 신축하는 팔라멘트 건물이고전적인 스타일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위원회는 건축책임자로서 그리스와 관련이 있는 건축가를 선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이었다. 고대 그리스 스타일의 건물을 짓는다면 고전적인 스타일로 지어야 한다는 원래 아이디어와 부합될 뿐만 아니라 그리스 출신의 건축가를 기용한다면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발상지이므로 그런 면에서 남들이 생각하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공모가 나갔다.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제국내무성은 1869년에 덴마크 출신이지만 그리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테오빌 한센에게 팔라멘트를 설계하고 건축하도록 결정했다.

 

팔라멘트 1백주년 기념 우표. 1883-1983.

 

기공식은 1874년 6월에 거행되었다. 그러나 정초석에는 1874년 9월 2일이라고 적혀 있다. 1874년에는 팔라멘트 이외에도 미술사박물관과 자연사박물과, 라트하우스(시청)와 비엔나대학교의 공사가 동시에 시작되었다. 그래서 정신이 없어서 팔라멘트의 정초석에 날짜를 잘못 적어 넣은 것이 아니겠느냐는 얘기다. 공사는 순조롭게 진척되었다. 9년 후인 1883년 11월에는 팔라멘트의 일부가 완성되어서 분데스라트의 회의실과 사무실등을 사용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883년 12월에는 나치오날라트의 첫번째 회의가 개회되었으며 프란츠 스몰카(Franz Smolka)를 첫 의장으로 선출했다. 제1회 회의에서는 의장만 선출하였을 뿐, 다른 안건은 처리하지 못했다. 정식으로 안건을 협의하고 처리하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1884년부터였다. 1884년 12월에는 분데스라트(상원) 회의실과 사무실들이 완성되어 분데스라트의 첫 회의가 열렸다. 상원의 첫 의장으로서는 트라우트만스도르프(Trauttmansdorff) 백작이 선임되었다. 그로부터 나치오날라트와 분데스라트는 1918년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역사의 장으로 사라질때까지 팔라멘트에서 회의를 가졌다. 팔라멘트는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시기에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했다. 특히 나치오날라트의 경우가 그러했다. 의원들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로 나뉘어 있어서 긴장감이 넘치고 있었다.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는 국수주의자들과 독일어가 아닌 외국어(체코어 등)를 사용하는 의원들 사이의 갈등도 컸다. 그런가하면 정부와 의회간의 갈등도 컸다. 그래서 회의 중에 청소는 자기들이 하지도 않으면서 서로 잉크병을 던지며 소란을 피는 것은 보통이었다. 비엔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이런 농담이 있었다. 의원들이 너무나 서로 분쟁을 일으키고 알륵을 하기 때문에 지혜의 여신인 아테나가 의사당에서 등을 돌렸다는 진지한 농담이었다. 아테나 여신은 의사당 쪽이 아니라 건너편 쪽을 바라보고 서 있다.

 

팔라멘트의 옆 길. 아름다운 조각들.

 

팔라멘트의 외관은 네오 그리스 스타일이다. 19세기 당시에는 고전을 리바이발하는 것이 인기였으므로 팔라멘트도 그런 추세에 따른 것이다. 테오필 한센은 당시 아테네에 머물고 있었다. 비엔나의 그리스 계 인사로서 팔라멘트 건축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된 니콜라우스 둠바(Nikolaus Dumba)가 한센에게 연락하여 결국은 팔라멘트의 설계건축을 맡게 되었다. 니콜라우스 둠바는 비엔나 사회의 저명인사로서 특별히 귀중한 음악자료의 수집에 헌신했던 사람이다. 오늘날 비엔나의 임페리알 호텔에서 비엔나악우회로 통하는 길의 이름이 둠바 슈트라쎄(Dumba Strasse)인 것은 그를 기념하여서이다.

 

팔라멘트

 

테오필 한센은 그가 설계한 아테네의 자페이온(Zappeion)에서 영감을 받아서 팔라멘트를 설계했다. 자페이온은 아테네 중심가에 있는 국립식물원의 건물로서 회의장등으로 사용되는 신전 스타일의 건물이다. 자페이온은 그리스 국회의사당의 바로 뒤편에 있기 때문에 모르는 사람이 보면 국회의사당 건물로 오해하기가 쉽다. 자페이온은 물론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다. 자페이온이라는 명칭은 그리스의 애국지사이며 박애주의자이고 기업인인 자파스(Zappas)를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자파스는 그리스에서 올림픽경기를 주도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의 초기 올림픽을 자피안올림픽이라고 부른다. 그리스의 자피안올림픽이 현대 올림픽의 전신이다. 그러므로 자파스는 현대 올림픽 경기의 창시자라고 할수 있다.

 

아테네 중심지역에 있는 자페이온 건물. 회의장등의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비엔나 팔라멘트의 모델이 된 건물이다.

 

앞에서도 잠시 설명한대로 한센은 팔라멘트 건물을 두개로 나뉘어 건설할 생각이었다. 상원(헤렌하우스)과 하원(아브게오르드네텐하우스)이 따로따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과 함께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어서 결국은 하나의 커다란 건물에 상원과 하원이 동거토록 했다. 상원과 하원은 넓은 다주식 홀을 통해 연결되도록 했다. 기둥의 홀이다. 각기 다른 의회의 의원들이 이곳에서 공개적으로 만나서 토론도 하고 협의도 할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벽공(게이블)은 처음에 만들었던 것 그대로 남아 있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에 속한 17개 지역(Kronländer)을 상징하는 장식이다. 정면의 기둥들은 고린도 스타일이다. 팔라멘트 건물은 4층 높이의 빌딩이다. 지붕의 양쪽 끝에는 4두마차의 조각이 있다. 청동으로 만든 4두 마차는 승리를 상징한다. 그래서 승리의 여신인 나이크(Nike)가 끌고 있다. 건물의 상단에는 44개의 조각들이 있다. 인간 활동의 종류와 수준을 비유한 조각들이다. 이와 함께 32개의 인물상들이 있다. 고전시대로부터의 유명 인물들이다. 부조는 유명 인사들이 공공생활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상징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들이다. 규모가 작은 부조는 50개나 된다. 제국에 속한 지역의 주요 도시와 강들을 표현한 것이다. 지붕은 기본적으로 고대 그리스 양식을 참고로 했다. 청동으로 만든 캡과 야자수 모양의 장식으로 되어 있다. 청동으로 만든 말을 길들이는 사람들의 조각이 램프의 아랫쪽에 있다. 격정을 억제한다는 일의 상징이다. 격정이라는 것은 가지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서 지나치게 울분을 토로한다든지 또는 분노하는 것을 말한다. 격정을 억제한다는 것은 의회 활동에서 대단히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팔라멘트의 앞에 그런 조각을 설치하였다.

 

팔라스 아테네 분수 뒷면의 엘베와 몰다우 의인화 조작


팔라멘트를 비롯한 링슈트라쎄의 건물들에는 오스트리아산 대리석을 쓰도록 했다. 프란츠 요셉 황제의 희망사항이었다. 티롤 지방의 라아스(Laas)에서 생산되는 대리석이 주로 사용되었다. 여러 건물들 중에서도 특히 호프부르크와 팔라멘트는 티롤의 대리석이 전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건축가인 한센은 희고 단단한 석재를 선호했다. 그래서 특히 건물의 현관은 고대 그리스의 건물과 같은 느낌을 주도록 했다. 화강암 건물이던, 대리석 건물이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환경적으로 오염되는 것은 막을수 없다. 비둘기들의 기여가 컸다. 그런데 티롤의 대리석을 사용한 건물이 이탈리아 카라라의 대리석을 사용한 건물보다 덜 오염된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역시 국산품 애용이면 만사형통이다.

 

아테나 분수의 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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