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부활 이야기/성묘교회

성모의 무덤은 어디에?

정준극 2015. 10. 9. 20:47

성모의 무덤은 어디에?

예루살렘의 기드론 골짜기? 터키의 에베소 부근?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

 

예루살렘 동쪽 성벽과 감람산 사이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성모교회 겸 성모의 무덤

                        

전설에 의하면 성모 마리아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 어느날 잠이 든듯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며 그후 영혼과 육신이 함께 승천하였다고 한다. 이를 어려운 말로 몽소승천(蒙召昇天: Assumption)이라고 한다.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어느 해인지는 모르지만 8월 15일에 몽소승천했다고 믿고 잇다. 그래서 8월 15일을 성모의 몽소승천 축일로 지키고 있다. 성모가 육신과 영혼이 함께 승천했기 때문에 무덤은 있을 수가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성모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성모가 잠을 자듯 숨을 거둔 후에 사흘 동안 무덤에 있다가 승천하였으므로 무덤이 있다는 얘기다. 특히 동방교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예루살렘 동쪽 성곽과 감람산 사이의 기드론 골짜기에 있다는 것이다. 기드론(Kidron) 골짜기는 일명 '여호사밧 골짜기'라고 부르는 곳이다. 여호사밧이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심판하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유태인들은 여호사밧 골짜기가 마지막 심판이 이루어지는 장소라고 믿고 있다. 유태인들은 죽은자들이 감람산에서 부활할 것으로 믿고 있으며 감람산 자락에 있는 기드론 골짜기가 바로 그 장소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유태인들은 죽은 후에 기드론 골짜기에 묻히기를 희망하고 있다. 기드른 골짜기에 수많은 묘지들이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연유때문이라고 한다. 기드론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어두운' 또는 '혼탁한'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역시 죽음은 어둡고 혼탁한 사항이라고 볼수 있는 모양이다. 기드론 골짜기에는 선지자 스가랴의 묘지 등등도 있다. 아무튼 성모 마리아는 세상을 떠난 후에 사흘 동안이지만 기드론 골짜기에 있는 무덤에 머물다가 승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참으로 그런데, 성경에는 어느 구석에도 성모가 승천했다니 기록이 없다.

 

기드론 골짜기. 스가랴 무덤이다. 그 뒤로 수많은 유태인들의 무덤이 보인다. 마지막 심판의 장소로 믿고 있다.

 

동방기독교(Eastern Christianity)의 전통적인 믿음에 따르면 성모는 요즘 말하는 의학용어로 자연사했다고 한다.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든지 또는 처형을 당했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특별한 사연이 없는 보통 사람들처럼 나이가 되어 노쇠하여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성모가 그저 조용히 잠든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성모가 숨을 거두자 그리스도가 성모의 영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성모의 육신은 사흘만에 부활하여 영혼과 함께 하늘로 올려짐을 받았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스스로 올라간 승천(Ascension)이 아니라 하늘이 올라가게 만든 승천(Assumption)이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성모가 숨을 거두자 사람들이 성모의 시신을 무덤에 장사지냈는데 사흘째 되던 날에 가보니 성모의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에서는 보는 관점이 조금 다르다. 성모가 세상을 떠나서 육신이 평소와 마찬가지의 모습 그대로 승천했다는 것은 알겠는데 다만, 일각에서는 성모가 일반 사람들처럼 육신적인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이 문제는 신학적인 문제라서 아직 명확한 단정은 없지만 오늘날에는 대체적으로 성모가 승천 전에 죽음의 과정을 겪었다는 쪽으로 견해가 집중되고 있다.

  

성모의 무덤에 있는 성모의 몽소승천 그림. 예수가 성모의 영혼을 안고 있다.

                                  

성경에는 성모를 장사 지냈다든지 무덤을 만들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고 했지만 다른 기록으로는 약간 관련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 5세기경에 그리스의 역사학자이며 기독교 수도사인 키릴 스키토폴리스(Cyril Schythopolis: 525-559)이라는 사람이 썼다고 생각되는 유티미아카 히스토리아(Euthymiaca Historia)라는 대화체 기록서에 따르면 비잔틴제국의 황제인 마르시안(Marcian: 392-457)와 그의 부인인 풀케리아(Pulcheria)가 451년에 소아시아의 캘시돈(Chalcedon)에서 열렸던 기독교공회에 참석한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유베날(Juvenal: 422년 부터 예루살렘 교구 주교, 나중에 총대주교)에게 성모 마리아의 유해가 있으면 조금이라도 전달해 달라고 요청하였더니 유베날이 대답하기를 성모가 세상을 떠난지 사흘만에 무덤에 가보았더니 무덤이 비어있었으며 다만 성모의 시체를 쌌던 수의는 겟세마네 교회가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성모를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성모가 세상을 떠나자 수의를 입혀서 무덤에 안치했었음을 알수 있다. 그런가하면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무덤에 남아 있던 것은 성모의 수의가 아니라 허리를 매는 띠였다고 한다.

  

성모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47 계단

 

그후 중세를 거쳐 근세에 이르기까지 성모의 무덤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극히 최근인 1972년에 이탈리아의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인 벨라르미노 바가티()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 가서 성모의 무덤이 있다고 생각되는 기드론 골짜기에 대한 발굴작업을 실시하였더니 1세기 경의 것으로 보이는 고대 무덤을 발견했다고 한다. 고대 무덤은 당시의 관습대로 세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태인의 관습에 따르면 세개의 무덤방 중에서 가장 안에 있는 방이 실제로 시체를 두는 방이라고 한다. 물론 이  발견 내용은 아직 고고학자계의 심도 있는 검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성모의 무덤인지 아닌지 무어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지만 하여튼 그러한 시도가 있었다는 것은 눈여겨 볼 일이다. 성모의 무덤이 있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는 5세기경에 예루살렘 총대주교인 유베날이 8각형의 작은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비잔틴 제국의 마르시안 황제시대였다. 이교회는 614년에 파사(이란: 페르시아)의 침공 때에 파괴되었다고 한다. 그후 몇 세기를 거치면서 여러번 교회가 세워졌다가 파괴되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하의 1세기경 무덤은 별로 손상되지 않은채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무슬림들은 이 장소를 선지자 이사(Isa)의 어머니를 매장한 곳으로 믿고 있다고 한다. 이사는 예수를 말한다.

 

성모 무덤 내부. 사람이 가는 곳으로 들어가면 성모의 무덤이 있다.

 

1130년에는 이 장소에 십자군이 베네딕트 수도원을 건축한 것으로 되어 있다. 여호사밧 골짜기의 성모 수녀원으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이 수도원과 교회는 1187년에 사라센의 살라딘(Saladin)이 파괴했다고 한다. 살라딘은 지하의 무덤만은 존중해서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교회는 석재들을 가져다가 예루살렘 성벽을 쌓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14세기에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다시한번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1757년에 그리스 정교회의 성직자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성지의 여러 지역들을 강압적으로 점령한 일이 있었다. 이를 종려주일 접수라고 한다. 이때 그리스 정교회가 프란치스코 수도사들을 쫓아내고 성모의 무덤 위에 세운 교회도 접수하였다. 그러자 오토만 제국이 중재에 나섰고 그로부터 성모의 무덤은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 사도교회(Armenian Apostolical Church)와 그리스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가 공동으로 관할하도록 했으며 겟세마네의 동굴은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계속 관리토록 했다. 이것이 성모의 무덤에 대한 지금까지의 약사이다.

 

성모의 무덤으로 들어가는 입구

 

성모의 무덤이라고 하는 곳의 내부는 어떻게 생겼는가? 교회는 십자가 모양으로 되어 있고 지하는 커다란 바위를 깍아서 만든 공간인데 몇 개의 채플(예배처)로 구성되어 있다. 교회 입구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데에는 넓직한 계단이 마련되어 있다. 12세기에 만든 것이라고 한다. 계단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점점 좁아진다. 47계단이다. 계단을 내려가다보면 왼편에 작은 채플이 있다. 성모의 육신의 남편인 성요셉의 채플이다. 오른편에는 성모의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인 요아킴(Joachim)과 안나(Anne: Anna)의 채플이 있다. 그 옆에는 성모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예루살렘 여왕 멜리센데(Melisende)의 무덤이 있다. 멜리센데는 예루살렘의 왕인 볼드윈 2세의 딸로서 자기의 어린 아들이 예루살렘 왕이 되자 오래동안 섭정을 했던 인물이다. 성모의 무덤은 교회의 동편에 있다. 그곳에는 그리스정교회와 아르메니아사도교회가 주관하는 제단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무덤의 남쪽에는 벽감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메카를 가르키는 미랍(Mihrab)이 설치되어 있다. 미랍은 무슬림들이 이 교회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한 이래 설치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오래전 이야기이고 현재는 무슬림들이 어 교회에 대하여 어떠한 권리도 주장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무덤의 서쪽에는 콥틱교회의 제단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성모의 무덤과 교회는 예루살렘의 아르메니아사도교회 총대주교와 예루살렘의 그리스정교회 총대주교가 공동으로 관장하고 있다. 이밖에도 시리아, 콥틱, 아비시니아교회(Abyssinians)도 조금이나마 연고권을 가지고 있다. 아비시니아교회는 에티오피아의 콥틱교회와는 다른 종파로서 알렉산드리아에 본거지고 두고 있다.

 

성모의 무덤의 한편에 있는 제단

 

성모의 무덤에 대한 또 하나의 전설은 성모의 무덤이 터키의 에베소에 있다는 것이다.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은 4세기경 그리스 신학자인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Epiphanius)에 의해서였다. 그는 성모가 생애의 마지막 몇년 동안을 터키의 에베소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에베소에 와서 지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며 그래서 사도 요한의 무덤이라는 것이 에베소 근교에 아직도 남아 있는데 사도 요한으로 말하자면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기 직전에 십자가 아래에 있던 요한에게 '요한아,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라는 부탁을 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에베소에 올 때에 성모를 모시고 와서 지냈음이 분명하다는 설명이다. 그렇지만 한가지 걸리는 것은 성경이던지 어느 기록이던지 성모가 요한을 따라서 에베소에 와서 살았다는 내용이 없으므로 에베소 거주 사실을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는 성모가 에베소 인근에 살았었다는 것을 믿고 있다. 현재 그 지점에는 '마리아의 집'(터키어로 메리에마나: Meryemana)이라는 오래된 건물이 있어서 순례자들의 발길이 그야말로 끊이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마리아의 집'은 에베서 인근의 코레소스 산자락에 있다. '마리아의 집'에 대하여는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무슬림들도 존경심을 가지고 순례하고 있다. 그런데 또 어떤 주장에 따르면 성모가 이곳에서 살기는 살았는데 다만 몇년 동안만 살았었고 그후에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세상 떠날 때까지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초대교회의 장로들이 그런 내용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는 주장도 있다.

 

에베소 교외에 있는 '성모 마리아의 집'

 

기독교인들은 성모의 마지막 생애와 세상 떠난 후의 무덤에 대한 기록이 성경의 어느 구석에도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온 여러 주장들을 완전히 믿지는 못하고 있지만 몇몇 경외서에는 성모의 마지막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혼돈을 주고 있다. 사실상 경외서 중에서 성모의 마지막을 설명한 구절이 있는 경외서는 지금까지 약 50권이나 되고 있다. 3세기에 써진 것으로 보이는 '요한서'(Book of John)에는 성모의 무덤이 겟세마네에 있다고 적혀 있다. 4세기에 써진 Treatise about the passing of the Blessed Virgin Mary(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서거에 대한 보고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395년에 기록된 Breviarius of Jerusalem 이란 책에는 예루살렘의 골짜기에 성모교회(Basilica of Holy Mary)가 있으며 여기에 성모의 무덤이 있다고 되어 있다. 훗날 여러 신학자들도 성모의 무덤은 예루살렘에 있다는 식으로 주장을 했다. 그렇게 되자 서방이건 동방이건 기독교 교회들은 거의 모두 성모의 무덤이 예루살렘에 있다는 것을 믿기로 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안에 있는 제단

 

색다른 주장도 있다. 성모의 무덤이 투르크메니스탄의 마리(Mary: Mari)라는 곳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도시 이름이 마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리에 갔던 사람들에 따르면 시내의 어디에도 성모의 무덤이 있다는 안내 표지가 없었다고 한다. 혹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후에 성모와 함께 인도로 여행을 갔다는 주장을 했다. 그래서 예수와 성모는 인도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인도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인도 북부 카시미르의 스리나가르(Srinagar)라는 마을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 마을에 성모의 무덤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스리나가르의 중심지역에는 로자 발(Roza bal)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와 성모의 무덤이 있는 건물이라는 것이다. 로자발이라는 말은 '선지자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건물에 붙어 있는 안내판에는 유즈 아사프(Yuz Asaf: Youza Asouph)의 무덤이라고 적혀 있다. 현지인들의 주장에 따르면 아사프는 예수을 뜻하는 이름이라는 것읻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학문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흥미가 있는 이야기이긴 하다. 그리고 현재 이 집은 외국인, 특히 유럽 사람들의 출입은 엄격히 금하고 있다.

 

카시미르의 스리나가르에 있는 '예수와 성모의 무덤'이라는 집. <방문자는 자물쇠로 잠근 상자에만 선물을 넣으시오>라는 안내문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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