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오스트리아 작곡가

Maria Theresia Paradis(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

정준극 2015. 11. 29. 06:48

Maria Theresia Paradis(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 -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시각상실의 여류 작곡가

 

마리아 테레지아 폰 파라디스

 

청각장애가 있는 작곡가들은 여러 명이나 있다. 베토벤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시각장애가 있는 사람이, 그것도 여성이 작곡가로서 활동했다는 것은 특별한 케이스이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가 그런 경우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Maria Theresia Paradis: 1759-1824)는 비엔나에서 태어나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여류작곡가이다. 그는 어릴 때에 시각을 상실하여 앞을 못보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활발한 작곡활동을 하였다. 그의 이름에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그의 아버지인 요제프 안톤 파라디스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황실에서 상공담당 자문관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존경하여서 그의 이름을 딸의 이름으로 지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요제프 안톤 파라디스의 딸이 태어나서 세례를 받을 때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대모가 되었다는 얘기를 했으나 그렇지는 않았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8번 B 플랫 장조는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를 위해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파라디스가 시각을 잃은 것은 아마도 너댓살이 되던 때였다고 한다. 파라디스는 17세 때에 1년 동안 유명한 안과의사인 프란츠 안톤 메스머에게서 집중 치료를 받았다. 시력이 회복되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에서 프란츠 안톤 메스머와 파라디스가 의사와 환자의 사이를 떠나서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스캔들이 돌았다. 파라디스의 귀에도 그런 소리가 들렸다. 파라디스는 당장 짐을 싸서 메스머로부터 떠났다. 그런데 그 후로 파라디스의 시력은 영구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그후 파라디스는 여러 훌륭한 음악가들로부터 음악이론, 작곡, 피아노, 성악 등을 공부했다. 워낙 영민하여서 비록 앞을 못보는 입장이지만 피아노 실력도 뛰어나고 노래도 잘 불렀으며 게다가 작곡실력도 보통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파라디스는 비엔나의 살롱이나 콘서트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소프라노로서 자주 연주를 하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나아가서 파라디스는 당대의 음악가들에게 자기가 연주할 음악의 작곡을 청탁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다음과 같은 작품이 파라디스를 위해 작곡되었다.

 

- 안토니오 살리에리는 오르간 협주곡을 작곡했다. 현재 2악장의 악보는 분실되어 있다.

- 모차르트는 1784년에 피아노 협주곡 18번을 작곡했다고 한다. K 456번이다. 그런데 이 피아노협주곡에 대하여 과연 모차르트가 이 곡을 파라디스를 위해 작곡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 하이든도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해 주었다. 1784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고 한다. 오리지널 악보는 분실. 

 

파라디스는 정말로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만 음악을 귀로 듣고서 정확히 암기하여서 연주를 했는데 무려 60여곡이나 되는 피아노 협주곡을 그렇게 암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파라디스는 피아노협주곡 뿐만아니라 대규모의 종교음악이나 솔로 레퍼토리들도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파라디스는 비엔나에서 태어났지만 연주를 위해 순회여행을 다니기를 좋아했다. 파라디스는 앞 못 보는 시각상실의 입장에서 1783년에 파리와 런던 연주여행을 가졌다. 여행에는 어머니와 대본가인 요한 리딩거(Johann Riedinger)만이 동행하였다. 요한 리딩거는 파리디스를 위해서 특별히 작곡판을 발명한바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아무튼 시각장애인이 작곡을 할수 있도록 고안된 기기라고 보면 된다. 파리디스는 그 해 여름에 잘츠부르크를 방문해서 모차르트를 만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등 독일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졌고 이어 스위스를 방문했다. 이렇듯 여러 곳을 다닌 후에 파라디스가 마침내 파리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3월이었다. 파라디스는 그의 첫 연주회를 1874년 4월에 파리의 콩세르 스피리투엘(Concert Spirituel)에서 가졌다. 파리의 신문들은 '파라디스의 연주를 보아야 했다. 그의 인상적인 터치,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도, 거침없이 이어나가는 연주, 활기에 넘친 연주를 보아야 했다'며 이구동성으로 찬사를 보냈다. 파라디스는 파리에서만 14회의 연주회를 가졌다. 모두 대성공이었으며 높은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파라디스는 파리에서 맹인들을 위한 특수학교의 설립을 후원하였다. 맹인학교는 1785년에 문을 열었다.

 

파라디스는 1784년 말에 런던을 방문하여 그후 몇 달 동안 궁전, 영국 왕세자의 저택인 칼튼 하우스, 하노버 스퀘어의 전문 연주회장 등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파라디스는 조지 3세의 앞에서 헨델의 푸가를 연주했고 첼리스트인 왕세자의 첼로 연주를 반주했다. 런던을 떠난 파라디스는 함부르크에 가서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를 만나기도 했고 이어 베를린과 프라하를 거쳐 1786년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후에는 이탈리아와 제정러시아에서 연주회를 가질 계획이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다만, 한참 후인 1797년에 그의 오페라 '리날도와 알치나'(Rinaldo und Alcina)의 프라하 공연을 위해 프라하를 방문한 일은 있다. 파라디스는 유럽 각지를 순회연주하는 중에 작곡에도 열성을 보였다. 주로 피아노를 위한 솔로 곡과 성악곡들을 작곡했다. 파라디스가 처음 작곡한 작품은 4편의 피아노 소나타로 알려져 잇다. 1777년에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피아노 소나타들은 실제로 피에트로 도메니코 파라디시(Pietro Domenico Paradisi)의 작품인 것으로 밝혀졌다. 파라디스와 파라디시라는 이름이 비슷하기 때문에 간혹 혼돈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파라디스의 첫번째 대표작은 1784-86년에 유럽을 연주여행을 다니면서 작곡한 12곡의 리더라고 보고있다.

 

그런데 파라디스의 대표작이라고 알려진 피아노 4중주를 위한 시실리엔느 E 플랫 장조는 불행하게도 위작이라는 얘기가 있다.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바이올린 소나타(작품번호 10번)에서 표절한 것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디스는 1789년부터 1797년까지 연주보다는 작곡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다섯 편의 오페라를 완성했다. 멜로드라마인 '아리아드네와 바커스'(1791), '수험생'(Der Schulkandidat: 1792), '리날도와 알치나'(1797), '그랜드 군대 오페라'(1805), '두 편의 시골 오페라'이다. 하지만 제목만 남아 있을뿐 악보는 모두 분실되어서 미안하게도 어떤 오페라인지 알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