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불행했던 말러

베토벤 이후 가장 위대한 작곡가

정준극 2016. 5. 27. 18:46

베토벤 이후 세계를 빛낸 가장 위대한 작곡가

오스트리아 후기 낭만주의의 거장


구스타브 말러


나는 말러의 음악을 참으로 좋아한다. 들으면 들을수록 신비한 기쁨, 그리고 번뇌와 고통 속에서의 즐거움을 느낀다. 말러의 음악에는 철학과 사상과 이즘과 전통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오래전에 미국 워싱턴에 갔을 때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워싱턴에는 '말러연구회'가 있어서 말러의 작품을 한소절, 한소절 분석하고 왜 이렇게 작곡을 해야 했는지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고 했다. 미국만해도 말러 연구회가 여럿이나 있어서 서로 의견을 주고 받는다고 한다. 물론 유럽에도 말러 연구회가 여럿이나 있다. 당연히 비엔나에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과문이지만 아직 동호인들의 모임이 없는 것 같다. 한국예술가곡연구회라는 것이 있기는 있다. 말러의 가곡도 연구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말러의 생애를 조명해보고 그의 작품들을 집중분석해 보는 단체는 아직 없는 것 같다. 나는 말러야 말로 말할 필요도 없이 20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음악가 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베토벤 이후에 등장한 음악가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보고 싶다. 사실상 구스타브 말러는 작곡가로서 보다는 지휘자로서 더 유명했다. 오페라 해석의 혁신을 이룬 지휘자였다. 그렇지만 나로서는 말러의 지휘를 본 적이 없으니 무어라 말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지휘자로서보다 작곡가로서의 말러가 어떤 생애를 살았는지, 말러의 작품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말러가 20세기 음악에 끼친 영향은 어떤 것인지 등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물론, 본 블로그의 이곳 저곳에 말러에 대한 이야기가 기술되어 있고 또한 그의 부인인 알마 말러 베르펠에 대하여도 비교적 자세히 소개되어 있지만 빠진 부분도 있고 추가해야 할 내용도 있어서 늦게나마 다시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상, 본 블로그에서는 오페라에 주안점을 두고 여러 설명들을 전개하였다. 오페라 5백년의 연혁,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5백인, 위대한 오페라 성악가 5백인, 그리고 오페라 5백편을 소개한다는 생각으로 본 블로그에서 오페라 항목을 설정하였지만, 구스타브 말러는 오페라를 한편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소개에 포함되지 못했었다. 그러나 말러와 같은 뛰어난 작곡가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한다는 것은 송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서 언필칭 말러 집중탐구를 시작한다. 한정된 스페이스로 인하여 부족한 점이 많이 있을 것이다. 말러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수많은 음악학자들이 연구서적을 발간한 일이 있으니 그에 대하여 더욱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전문 서적을 구해서 탐독해 보실 것을 권면한다.


구스타브 말러 탄생 150주년 기념 우표. 오스트리아 정부 발행. 2010년.


우선 말러의 성장과정부터 살펴보자. 말러는 지금부터 150여년 전인 1860년 7월 7일, 보헤미아의 칼리쉬테(Kaliste)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보헤미아는 오늘날의 체코공화국이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영토여서 실상 말러는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났다. 말러의 아버지 베른하르트 말러(Bernhardt Mahler)는 이름은 독일인 스타일이지만 유태인이었다. 그러므로 말러도 유태계였다. 말러의 아버지는 보헤미아의 동부에서 살다가 보헤미아의 서부인 칼리쉬테로 흘러 들어와 살게 되었고 이곳에서 처음에는 마차로 짐을 실어 나르는 마부의 일을 하였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개인용달업 또는 이삿짐 센터를 운영한 것이었다. 칼리쉬테(또는 칼리슈트)는 보헤미아의 프라하와 모라비아의 브르노 중간 쯤에 있는 마을이다. 말러의 아버지가 보헤미아의 동부에서 서부로 온 것은 언어 때문이기도 했다. 보헤미아의 동부에서는 거의 모든 주민들이 보헤미아어, 즉 체코어를 사용했다. 간혹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말러의 가족들은 독일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많은 보헤미아의 서부로 이사를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리쉬테가 되었건 지흘라바가 되었던 보헤미아에서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소수민족으로 취급을 받기 마련이어서 체코어를 쓰는 주민들로부터 따돌림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말러의 집안은 유태인이었다. 말러의 아버지가 보헤미아의 서부로 옮겨온 것도 유태인에 대한 보이지 않는 박해를 조금이라도 피해보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나중에 말러는 이때를 회상하면서 '우리는 언제나 어딜가도 마치 침입자와 같아서 환영을 받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구스타브 말러 6세때. 1866년.


말러가 태어난지 다섯 달 후인 12월에 말러의 식구들은 인근 이글라우(Iglau 또는 이흘라바: Jihlava)로 이사를 갔다. 이글라우는 칼리쉬테로부터 25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교적 큰 도시이다. 이곳에서 말러의 아버지는 양조장을 운영했고 조금 돈을 벌자 관찮은 집을 하나 사서 여관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원래 말러의 집안은 넉넉하지를 못했다. 말러의 할아버지는 보헤미아의 동부에서 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말러의 할머니가 남은 식구들을 책임져야 했다. 말러의 할머니는 거리에서 좌판을 깔고 행상을 하여 아이들을 길렀다. 말러의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보헤미아의 동부에서 마리라는 여자와 결혼하고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보헤미아의 서부로 옮겨 살기로 했다. 칼리쉬테에 정착한 말러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큰 아들 이시도르를 생산하였지만 이시도르는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1860년에 구스타브 말러가 태어났다. 일단 두 아들을 가진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새로운 사업을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말러가 태어난지 겨우 다섯 달 되던 12월에 인구 2만명이나 되는 인근의 이글라우이(이흘라바)로 이사를 갔던 것이다. 말러의 부모는 이글라우에서 무려 12명의 자녀를 생산하였다. 그러니까 일찍 세상을 떠난 큰아들 이시도르까지 포함하면 모두 14명의 자녀를 둔 것이다. 아무튼 말러는 그 중에서 두번째였다. 이글라우에서 태어난 12명의 자녀 중에서 장년까지 성장한 자녀들은 여섯 명에 불과했다. 당시에는 자녀들을 많이 생산하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어린이들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그저 많이 나서 그중에서 몇명이라도 생존하여 장성하면 자식농사는 잘 지은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시대였다. 말러는 어릴 때에 이글라우에서 사촌 형인 오토로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보다도 이글라우는 칼리쉬테에 비해서 큰 도시여서 말러는 거리에서, 여관에서, 식당에서 보헤미아의 민속음악과 춤곡 등을 듣는 기회가 많았다. 이글라우에는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침에 기상나팔 소리로부터 훈련중인 병사들을 위한 군악대의 행진곡 연주를 많이 접할수 있었다. 그리고 이글라우에는 유태교 회당이 있어서 유태인들의 전통적인 음악이나 제례음악을 접할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훗날 말러의 음악적 표현을 성숙하게 만든 바탕들이 되었다. 한편, 오토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서 혼자서 클라피어(피아노)를 배웠고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다. 물론, 아버지는 어린 말러에게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클라피어를 연주하는 것이 밥 먹여 주느냐면서 반대했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말러는 계속 그길로만 나아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재능이 많았던 오토는 음악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지도 못한채 30여세의 젊은 나이로 자살하였다.


보헤미아의 칼리쉬테에 있는 말러의 생가. 근년에 새로 단장했다. 벽면에 기념 명판이 붙어 잇다. 


말러는 네살 때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쓰던 피아노를 집안 구석에서 발견했다. 어린 말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음악을 좋아해서 피아노까지 집에 두고 연주했다는 사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기야 유태인이라고 하면 어찌되었든 회당에서, 또는 가정에서 매일처럼 찬미를 불러야 하기 때문에 음악적인 소질이 다른 어느 사람보다도 높았을 것이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음악적 소양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말러는 네살때부터 피아노와 아코디온 반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피아노와 아코디온을 위한 소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말러는 10살 때에 이글라우 극장에서 일반인들을 위해 첫번째 리사이틀을 가졌다. 사람들은 말러를 천재(Wunderkind: 놀라운 아이: 원더 보이)라고 불렀다. 말러는 이글라우 김나지움을 다녔다. 그런데 음악적인 재능은 뛰어났지만 다른 과목의 성적은 미안하게도 형편없었다. 김나지움의 선생님들과 학교 친구들은 그런 말러에 대하여 학교 공부에는 '정신을 두지 않고' '착실하지 못한' 학생이라고 입을 모았다. 말러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무슨 수를 써야 겠다고 생각해서 말러가 11살 때에 프라하의 김나지움으로 전학시켰다. 그렇지만 말러는 그곳에서도 만족하지 못하여 결국은 이글라우로 돌아왔다. 말러는 14세 때에 가장 좋아하던 동생 에른스트가 병마와의 오랜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떠나자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말러는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난 동생 에른스트를 추모하기 위해 친구인 요제프 슈타이너와 함께 오페라 '슈봐비아의 에른스트 공작'((Herzof Ernst von Schwaben)이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오페라의 음악과 대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으므로 그렇다면 '슈봐비아의 에른스트 공작'은 말러의 유일한 오페라가 되는 셈이다.


구스타브 말러가 어린시절을 보낸 보헤미아의 이흘라바(이글라우) 중심가


말러의 아버지인 베른하르트는 여관경영으로 집안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자 이제는 장자인 말러의 앞길을 위해 과감한 후원을 아끼지 않기로 했다. 아버지 베른하르트는 말러가 음악가의 길을 걷는 것을 지지했다. 그래서 이글라우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는 음악을 제대로 공부할수 없으므로 음악의 도시 비엔나로 보내어 공부하게 했다. 그리하여 말러는 15세의 소년으로서 비엔나음악원에 가서 피아노 오디션에 합격하여 입학하였다. 오디션은 당대의 피아니스트인 율리우스 에프슈타인(Julius Epstein)이 직접 담당하였다. 우선은 1875-76의 2년 동안 에프슈타인의 레슨을 받는 것으로 했다. 말러의 피아노 실력은 뛰어나게 향상되었다. 말러는 매학기 말에 치뤄지는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항상 우승을 차지했다. 말러는 1877-78년의 2년을 더 공부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로베르트 푹스(Robert Fuchs)와 프란츠 크렌(Franz Krenn)의 지도로 주로 화성악과 작곡에 집중하였다. 말러는 비엔나음악원의 학생시절에 여러 작품들을 시작으로 작곡했지만 대부분은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고 하면서 휴지통에 넣었다. 특히 학기말에 제출해야하는 교향적 악장은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하지만 당시 권위적인 학장인 요제프 헬메스버거(Joseph Hellmesberger)가 사보가 잘못되었다는 구실을 잡아서 의도적으로 조롱섞인 거부를 하는 바람에 속이 상한 말러는 악보를 간직하지 않고 찢어 없앴다. 아무튼 이에 충격을 받은 말러는 작곡보다는 지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그나마 마음 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말러는 비엔나음악원 학생오케스트라에서 타악기를 연주하는 역할이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연습지휘도 맡았고 실제 연주지휘도 했다. 그렇게 해서 지휘경력을 쌓았다. 말러는 학생 시절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말러는 훗날 바그너 오페라 해석의 권위자가 되었다. 유태인인 말러가 지독한 반유태주의자인 바그너의 작품을 애지중지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항이었다. 


말러의 비엔나 필 지휘. 막스 오펜하이머 작품.


말러가 비엔나음악원(비엔나 콘서바토리움)에 다닐 때에 아주 가깝게 지낸 친구로서는 나중에 가곡 작곡가로 유명한 후고 볼프(Hugo Wolf)가 있다. 그런데 볼프는 음악원 당국의 지나친 엄격함에 순응하지 못하여서 최학을 당하였다. 말러도 음악원 당국의 엄격한 교육에 간혹 반기를 들어서 유쾌하지 못한 관계였지만 그럴 때마다 학장인 헬메스버거에게 조리있는 탄원서를 보내어서 퇴학당하는 것과 같은 운명은 겪지 않았다. 말러는 가끔씩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의 강의를 들었다. 그렇다고 공식적으로 그에게 사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브루크너의 관현악 영향을 상당히 받기는 했다. 말러는 1877년 12월에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3번의 초연에 참석했다. 그런데 연주회장은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야유하는 바람에 난장판이 되었다. 청중들은 거의 모두 연주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말러는 브루크너가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향곡 3번을 피아노 버전으로 만들어서 브루크너에게 헌정했다. 브루크너가 크게 감동했음은 물론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말러는 당시의 다른 수많은 음악도들과 마찬가지로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크게 매료되어 있었다. 그러나 말러가 바그너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진 것은 무대 연출이 아니라 음악 자체였다. 말러가 학생시절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보았는지의 여부는 알지 못한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무대. 비엔나 슈타츠오퍼. 말러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무대 연출보다는 음악으로부터 감명을 받았다.


말러는 1878년, 그가 18세 때에 비엔나음악원을 수료했다. 그러나 응당 받을 것으로 예상했던 우수 학생에게 주는 실버 메달은 받지 못했다. 말러는 아버지 베른하르트가 주장하는 대로 비엔나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마투라(Matura)라고 하는 어려운 시험을 거친 입학했다. 말러는 비엔나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말러는 1년 후에 비엔나대학교를 그만두고 나와서 피아노 레슨으로 생활비를 벌어 쓰면서 작곡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그래서 완성한 첫번째 작품이 칸타타인 '비탄의 노래'(Das klangende Lied: The Song of Lamentation)였다. 이 작품은 분명히 바그너와 브루크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평론가 또는 음악사학자들은 이 작품이 '순수한 말러 스타일'을 표현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말러는 이 곡을 1880년에 완성했지만 정작 초연을 본 것은 10년 후인 1901년이었다. 분량을 조금 축소하고 몇군데 수정한 것이었다. 말러는 독일 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인 지그프리트 리피너가 말러에게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프리드리히 니체(Firedrich Nietzsche), 구스타브 페흐너(Gustav Fechner), 헤르만 로체(Hermann Lotze)와 같은 철학자들의 저서들을 소개해 주었다. 훗날 말러의 전기작가인 조나단 카르(Jonathan Carr)는 '말러의 머리에는 보헤미아 밴드의 트럼펫 소리와 행진곡들, 브루크너의 합창곡들, 슈베르트의 소나타들로 꽉 차 있었지만 여기에 철학적인 문제들, 형이상학적인 사항들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말러의 작품들이 얼마나 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얘기였다.


말러가 다녔던 비엔나대학교. 본관 현관.


말러가 20세가 되는 1880년의 여름, 그는 지휘자로서의 처음 직장을 가졌다. 린츠 남쪽 바드 할(Bad Hall)이라는 작은 온천장에 있는 극장이었다. 레퍼토리는 순전히 오페레타 음악들이었다. 극장의 규모도 작고 더구나 목재로 지은 건물이어서 지휘하는데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스승인 에프슈타인이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큰 것에 도전할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 일을 받아 들였다. 그로부터 1년 후 말러는 라이바흐(Laibach) 주립극장의 지휘자로 초빙되어 갔다. 라이바흐는 오늘날 슬로베니아의 류블리아나(Ljubljana)이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열성으로 뭉쳐 있었고 모두 새로운 것을 추구코자 하는 열의가 있어서 말러는 비로소 지휘자로서의 보람을 느꼈다. 말러가 오페라 지휘자로서 처음으로 풀 스케일의 오페라를 지휘한 것도 류블리아나에서 였다. 베르디의 '일 트로바토'를 지휘했다. 그러나 말러는 계약에 의해 류블리아나에서 반년동안 지낸후 비엔나로 돌아왔다. 비엔나에서는 오늘날 네스트로이플라츠에 있었던 칼테아터(Carltheater)에서 합창 지휘자로 있었다. 말러는 1883년 1월에 올뮈츠(Olmütz)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올뮈츠는 오늘날 체코공화국의 올로무츠(Olomouc)이다. 올뮈츠 극장은 당장이라도 폐관해야 할 정도로 모든 사정이 열악한 곳이었다. 말러는 훗날 올뮈츠를 회상하면서 '나는 극장의 문턱을 건너는 순간 아 분노의 신이 나를 기다ㅣ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기술했다. 그만하면 형편이 어떠했는지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러는 열악한 오케스트라를 몰아부쳐서 비제의 '카르멘'을 비롯한 다섯 편 오페라의 올뮈츠 초연을 가졌다. 말러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던 올뮈츠의 신문들도 말러에게 찬사를 보내기에 바뻤다.


청년 말러가 한때 지휘를 맡았더나 올뮈츠(올로무츠) 극장. 모라비아 국립극장이기도 하다.


말러는 그해 8월에 독일의 카셀(Kassel)에 있는 왕립극장(Königlich Preussisches Theater: 현재의 Staatstheater의 전신)의 음악 및 합창 감독이 되어 자리를 옮겼다. 카셀극장은 그다지 유명하지도 않은 처지에서 위대한 말러를 알아보지 못하고 1주일이 넘게 이것저것 테스트를 하면서 임명을 미루다가 겨우 임명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말러의 위대함을 발견하지 못했을 테지만 말이다. 음악 및 합창감독이라는 타이틀은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은 극장의 카펠마이스터(Kapellmeister), 즉 음악총감독인 빌헬름 트라이버의 휘하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빌헬름 트라이버는 사람이 고약해서 말러를 무조건 싫어했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못살게 굴었다. 빌헬름 트라이버는 말러의 젊은 인생을 비참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뛰어난 음악성으로 오페라 공연들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그중에서도 베버의 '마탄의 사수'는 아마 카셀 극장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오페라였을 것이다. 말러는 1884년 6월에 자기의 작품인 '재킹겐의 나팔수'(Der Trompeter von Säckingen)의 초연을 지휘했다. 실은 이 곡은 요제프 빅토 폰 셰펠의 연극을 위해 작곡한 극음악이었다. 극음악이 되었건 무엇이 되었건 카셀에서의 연주는 말러의 작품이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연주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말러는 오페라의 성공과 자기 작품의 초연 등으로 기분이 고상해졌다. 그러다보니 사랑에 눈을 뜨게 되었다. 말러는 요한나 리히터(Richter)라는 소프라노를 사랑'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객지에서 생활하고 있던 말러로서는 허전한 마음을 가라앉히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나온 작품이 연가곡인 '어느 지친 영혼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 방랑하는 젊은이의 노래)이다. 1884년 1월에 당시 독일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기 마이닝 궁정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카셀에 와서 연주회를 가졌다. 말러는 어떻게 해서든지 카셀에서 헤어나오려고 하던 참이었다. 말러는 폰 뷜르브에게 조수라도 좋으니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지휘자로 초빙을 받게 되었다. 말러는 1886년부터 6연간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지휘자로 계약을 맺었다. 그러는데 생각치도 않았는데 말러에게 프라하 신독일극장의 부지휘자 자리가 제안되었다. 말러에게는 '라이프치히냐 프라하냐, 그것이 문제로다' 였다.


카셀의 왕립극장. 현재는 사리지고 없다. 대신 카셀 시내에 국립극장(슈타츠테아터)이 있다.


당시에 프라하에서 체코국민주의 리바이발 운동이 힘차게 일어나고 있었다. 결국 새로운 체코국립극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자 그동안 독일 오페라를 전문으로 했던 신독일극장은 무언가 활로를 개척하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 할 판이었다. 신독일극장이 말러를 지휘자로서 초청코자 한 것은 말러의 열정과 뛰어난 재능으로 수준 높은 독일 오페라들을 무대에 올려 기울어가는 신독일극장을 부흥시키자는 의도였다. 말러는 모차르트와 바그너의 오페라로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나왔다. 극장측은 말러가 지나치게 모차르트와 바그너에 집착하고 있다면서 아쉬움을 표시했다. 다른 독일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얼마던지 있으므로 골고루 무대에 올림이 타당하는 얘기였다. 또 한가지 문제는 말러의 지휘 습성이었다. 대단히 권위주의적인 지휘 스타일 때문에 점차 단원들과 의견의 충돌을 일으키는 일이 많았다. 결국 말러는 프라하를 떠나서 새로운 직장을 구해야 했다. 1886년 4월, 말러는 라이프치히의 신시립극장(Neues Stadttheater)의 지휘자로서 가게 되었다. 이 극장에는 상임지휘자로서 아르투르 니키슈(Arthur Nikisch)가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라이발 의식으로 갈등이 빚어지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침 라이프치히 신시립극장은 바그너의 '링 사이클'의 전편을 준비 중에 있었다. 니키슈와 말러는 공평하게 분담해서 지휘키로 했다. 그런데 이듬해 1월에 니키슈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지휘를 할수 없게 되었다. 말러가 전체 사이클을 지휘하게 되었다. 말러의 '니벨룽의 반지' 전편 지휘는 대대적인 찬사를 받았다. 찬사는 언론과 관객들로부터 받은 것이며 오케스트라 단원들로부터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말러의 독재적인 지휘, 그리고 과중한 리허설로 지쳐 있었다.


프라하의 신시립극장. 1800년대 말의 모습.


말러는 라이프치히에서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손자인 칼 폰 베버()와 친밀하게 지냈다. 두 사람은 칼 마리아 폰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인 '세사람의 핀토'(Die drei Pintos)를 무대 버전으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말러는 미완성 부분의 음악을 칼 마리아 폰 베버가 스케치 해 놓은 것을 바탕으로 하고 여기에 베버의 다른 작품 중에서 일부 파트를 가져다가 붙였으며 또한 어떤 파트는 말러 자신이 작곡한 음악을 사용하기도 했다. 1888년 1월 라이프치히 슈타트테아터(Stadttheater)에서의 초연은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유럽의 여러 오페라 극장장들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이코브스키 등 여러 음악가들도 참석하여 성황을 이룬 초연이었다. '세 사람의 핀토'는 대성공이었다. 칼 마리아 폰 베버가 세상을 떠난지 65년 만에 그의 미완성 오페라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아무튼 '세사람의 핀토'로 인해서 말러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인기가 높아졌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그런데 라이프치히에서 칼 폰 베버와 친밀하게 지다보니 바람직하지 않은 문제까지 생겼다. 28세의 미장가인 청년 말러가 칼 폰 베버의 젊은 부인인 마리온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다행히 갈데까지 가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정리되었지만 말러로서는 또 한번의 실연의 고배를 맛본 것이었다. 이때 쯤에서 말러는 독일 민속시집인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Des Knaben Wunderhorn)를 발견하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후 이 시집은 말러의 작곡 활동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되었음은 물론이었다. 말러는 1888년 5월에 라이프치히를 떠나 프라하로 가서 '세사람의 핀토'의 리바이발과 페터 코르텔리우스의 '바그다드의 이발사'(Der Barbier von Bagdad)의 제작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말러는 프라하에서 어떤 직책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말러의 성격이 괴상해서인지 또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말러의 지시를 듣지 않아서인지 하여튼 말러는 '바그다드의 이발사'의 리허설 중에 오케스트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바톤을 놓고 나가버렸다. 적당한 직장을 갖지 못했던 말러에게 비엔나의 친구인 귀도 아들러가 도움을 주었다. 1888년 10월부터 부다페스트의 헝거리왕립오페라의 감독자리를 제안 받은 것이다. 


라이프치히 노이에스 슈타트테아터. 말러의 지휘로 베버의 '세사람의 핀토'가 초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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