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불행했던 말러

지휘자에서 작곡가로

정준극 2016. 5. 31. 06:06

지휘자에서 작곡가로


유화로 남아 있는 말러 초상화. 1908년


말러의 음악경력은 지휘자로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곡으로부터 완전히 손을 놓고 지휘만 한것은 아니었다. 말러는 라이바흐와 올뮈츠에서 지휘활동을 할 때부터 기회가 있는대로 시를 읽고 그 시에 음악을 붙이는 작업을 하였다. 그 때에 말러가 즐겨 읽은 시들은 리하르트 레안더(Richard Leander)와 티르소 데 몰리나(Tirso de Molina)의 작품들이었다. 말러는 훗날 이들의 시에 멜로디를 붙여서 '노래와 아리아'(Lieder und Gesänge)라는 가곡집을 펴냈다. 말러의 첫번째 연가곡인 '방랑하는 영혼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도 카셀에서 지휘자로 활동할 때에 완성한 것인데 이 연가곡의 가사는 말러 자신이 쓴 것이다. 다만, '방랑하는 영혼의 노래'의 첫번째 가사인 '내 사랑이 결혼할 때에'(Wenn mein Schatz Hochzeit macht)는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의 텍스트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으로 볼수 있다. 한편, 두번째와 네번째 노래의 멜로디는 교향곡 1번에 인용되었다. 교향곡 1번은 말러가 라이프치히에서 친구 칼 폰 베버(칼 마리아 폰 베버의 손자)의 부인인 마리온과 뜨거운 관계에 있을 때에 작곡한 것이다. 말러는 교향곡 1번을 완성한 후에 '죽음의 축제'(Totenfeier)라고 불리는 장송곡을 작곡했다. 이 장송곡의 멜로디는 나중에 교향곡 2번의 1악장에 그대로 사용되었다. 이처럼 말러는 지휘자 생활을 하면서도 작곡에 열심을 보였는데 그의 초기 작품 중에서 몇몇 작품들은 악보가 분실되었거나 또는 말러 자신이 폐기했다는 얘기도 있다. 


말러가 라이프치히에서 거처했던 건물

               

1888년 10월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한 말러는 보수적인 헝가리 국민음악파들과 문화적인 갈등을 빚어야 했다. 헝가리 국민음악파들은 마쟈르민족의 전통을 살리는 작품의 공연을 선호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부다페스트 국립오페라의 경우에 더욱 두드러졌다. 부다페스트 국립오페라의 음악감독인 산도르 에르켈(Sandor Erkel)은 오페라 공연에 있어서 헝가리 전통의 민속적이면서도 역사적 내용의 오페라만을 무대에 올리기를 고집하였다. 그러한 때에 말러는 바그너의 '링 사이클' 전편을 공연하겠다고 나섰다. 다만, 대본은 헝가리어로 번역하여 사용하겠다는 조건이었다. '라인의 황금'과 '발퀴레'는 그런대로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나머지 두 편의 공연은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헝가리의 보수적인 인물들이 독일적 오페라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말러는 독일적이 아닌 오페라를 염두에 두어야 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 눈을 돌린 말러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를 발견하였다.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는 대성공이었다. 1889년 2월에 말러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이어 그 다음 해에는 말러의 여동생인 레오폴디네와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말러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많은 고생을 했다. 이처럼 여러가지 괴로움이 있는 때에 교향곡 1번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반응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는 '말러가 작곡가가 되면 안된다는 것을 입증해준 작품이다'라는 혹평까지 있었다. 1891년에 헝가리 국립오페라에는 새로운 음악감독이 임명되었다. 겔라 치히()는 헝가리 국민주의 작품들을 무대에 올리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러자니 자연히 말러와 부딪치지 않을수 없었다. 말러는 겔라 치히의 콘트롤을 받기가 싫어서 함부르크 국립극장으로 떠나기로 했다. 말러는 1891년 5월에 '돈 조반니'를 마지막으로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돈 조반니'는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브람스도 이 공연을 직접 보고서 말러를 치하했다. 


부다페스트의 헝가리국립오페라


함부르크 국립극장의 감독은 베른하르트 폴(Bernhard Pohl)이라는 사람이었다. 말러는 수석지휘자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베른하르트 폴은 말러에게 오페라 공연은 예술적으로도 성공해야 하지만 상업적으로도 성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말하자면 오페라 공연으로 수익도 올려야 한다는 얘기였다. 말러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고 이어 바그너의 '탄호이저'와 '지그프리트'를 지휘하여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말러는 바그너를 가장 잘 해석하는 지휘자 중의 하나라는 평을 받았다. 말러는 이어 차이코브스키의 '유진 오네긴'의 독일 초연을 지휘했다. 함부르크 공연에 직접 참석했던 차이코브스키는 말러의 지휘를 보고 '놀랍다. 정말로 천재적인 재능이 있는 지휘자이다'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찬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케스트라와는 문제가 많았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말러의 지나친 독재적인 지휘 스타일과 완벽성을 기하려는 거듭되는 리허설 때문에 피곤해 있었다. 오케스트라 멤버들은 말러를 존경하면서도 증오하였다. 다만, 말러를 카셀 시절로부터 지지해온 한스 폰 뷜로프가 함부르크 시당국이 주관하는 콘서트의 지휘를 맡고 있으면서 말러를 적극 후원하였다. 1894년 한스 폰 뷜로브가 세상을 떠나자 말러는 함부르크 시당국이 주관하는 콘서트의 지휘를 넘겨 받았다.


19세기 말의 함부르크 시립극장(슈타트테아터)


1892년 여름에 말러는 함부르크 국립오페라의 멤버들을 이끌고 런던 공연의 길을 떠났다. 런던에서는 6주에 걸친 독일 오페라 페스티발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말러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였다. 이 자리에는 마침 젊은 랄프 본 윌리엄스도 참석했다. 본 윌리엄스는 말러의 지휘에 너무 감동하여서 정신이 차릴수 없는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갔으며 이틀밤이나 한 잠도 못자고 말러의 지휘만을 생각했다고 한다. 런던을 비롯해서 다른 도시에서 말러에게 지휘 요청이 들어왔지만 그는 작곡을 위해 휴식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지휘요청을 거절하였다. 말러는 오베레 외스터라이히주의 아터제(Attersee) 호반 마을인 슈타인바흐(Steinbach)에 작은 집을 하나 구하고 작곡에 전념하였다. 말러가 이처럼 작은 오두막집에 혼자 들어 앉아서 자연을 벗삼아서 작곡을 하는 습관은 그후로도 계속되었다. 말러는 슈타인바흐에서 여러 가곡들을 작곡했고 아울러 교향곡 3번도 완성했다. 말러는 작품들을 계속 썼지만 연주되는 경우는 드믈었다. 1893년 10월에 함부르크에서 교향곡 1번을 연주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었다. 교향곡 1번은 오리지널의 5악장으로 연주되었다. 말러는 교향곡 1번을 '음조시'(Tondichtung)이라고 불렀고 여기에 '거인'(Titan)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말러가 지휘자라기 보다는 작곡가로서 처음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마도 1895년 12월 베를린에서 교향곡 2번의 연주회를 가진 것이었을 것이다. 교향곡 2번을 지휘했던 브루노 발터는 '이제로부터 말러를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드높이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해에 말러의 남동생인 오토가 자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로 인하여 말러는 정신적은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헤어나지를 못했다. 


아터제의 슈타인바흐에 있는 말러의 작곡의 집


말러는 함부르크 국립오페라에서 여러 오페라들을 새롭게 소개하였다. 예를 들면 베르디의 '활슈타프'를 비롯해서 엥겔버트 훔퍼딩크의 '헨젤과 그레텔', 그리고 스메타나의 오페라들이었다. 말러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목표를 비엔나 궁정오페라(Hofoper: 현재의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잡았다. 말러는 유태인 신분으로서는 비엔나 궁정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해서 1897년 2월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말러는 궁정오페라 음악감독에 대한 황제의 최종 재가가 있기 전까지 우선 요제프 헬메스버거(Joseph Hellmesberger),  그리고 바그너 오페라의 최고 해석자로 알려진 한스 리히터(Hans Richter)와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다. 요제프 헬메스버거(주니어)는 비엔나음악원장을 지낸 요제프 헬메스버거(시니어)의 아들이었다. 한스 리히터는 1876년 바이로이트에서 오리지널 '링 사이클'의 전편을 지휘했던 경력이 있는 명지휘자였다. 그런데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는 그 즈음에 보수적인 반유태주의자로 알려진 칼 루에거(Karl Lueger)를 새로운 시장으로 선출했다. 칼 루에거 시장은 겉으로는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비엔나시와 관련한 공직에서 유태인들을 추방하는 일에 솔선하다시피 했다. 말러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에서 유태인으로 활동하기 보다는 비엔나 시민으로서, 그리고 독일문화에 용해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인정받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말러가 1897년 5월에 궁정오페라에서 우선 지휘한 오페라는 바그너의 '로엔그린'과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였다. 높은 찬사를 받은 것이었고 말러를 독일적 지휘자로 부각시켜준 계기였다. 


말러가 음악감독으로 있을 당시의 비엔나 호프오퍼(슈타츠오퍼). 1900년경.


말러는 '마술피리'의 지휘를 마친후 아무래도 건강이 좋지 않아서 몇주간의 병가를 냈다. 말러의 간호해준 사람은 누이동생인 유스티네와 비올라 연주자로서 말러와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냈던 나탈리 바우어 레흐터(Natalie Bauder-Lechner)였다. 어느정도 건강이 회복된 말러는 궁정오페라에서 바그너의 '링 사이클' 전편을 컷하지 않은채 처음 시도하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비엔나로 돌아왔다. '링 사이클'은 8월 24-27일간 공연되었고 많은 호평을 받았다. 후고 볼프는 말러 지휘의 '링 사이클'의 전편을 보고 난후 '나는 오래전부터 링 사이클의 전편을 보고 싶었다. 이제 그 소원을 풀게 되었다.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말러때문에 가능했다'고 말했다. 말러는 1897년 10월에 궁정오페라의 음악감독으로 정식 임명되었다. 그가 음악감독으로 취임하고 나서 처음으로 지휘한 작품은 체코의 국민주의 오페라인 스메타나의 '달리보르'(Dalibor)였다. 하지만 원작과는 달리 피날레에서 주인공인 달리보르가 살아 있는 것으로 각색한 것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말러에 의해 '달리보르'가 무대에 올려지게 되자 비엔나의 독일국수주의적 인물들이 말러를 비난하고 나섰다. '체코와 같은 열등국가를 높이 평가하였고 아울러 반합스부르크적인 분위기를 조장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잘 아는대로 당시 체코는 합스부르크에 소속된 영토였다. 비엔나는 1등 도시였고 체코의 프라하는 2등 도시였다. 훗날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스테판 츠봐이크(Stefan Zweig)와 같은 사람도 '어제의 세계'(The World of Yesterday: 1942)라는 저서를 통해서 말러와 같은 젊은이를 호프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임명한 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당시에 말러는 38세였다. 그리고 당시의 풍조는 '젊은이들은 신뢰할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쨋거나 말러가 호프오퍼에 있는 동안 33편의 새로운 오페라가 소개되었다. 말하자면 비엔나 초연이었다. 뿐만 아니라 수정된 작품들은 55편이나 공연되었다. 1905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를 공연키로 되어 있었으나 검열당국이 허락을 하지 않아서 공연을 하지 못했다.


오페라 '달리보르'의 한 장면. 말러는 이 오페라를 비엔나 호프오퍼의 무대에 올렸으나 구설수가 많았다.


1902년에 말러는 화가이며 디자이너인 알프레드 롤러(Alfred Roller)를 만났다. 알프레드 롤러는 비엔나 분리주의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다. 이듬해에 말러는 알프레드 롤러를 호프오퍼의 수석 무대디자이너로 임명했다. 롤러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무대를 새로운 감각과 새로운 각도에서 디자인하였다. 전통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무대였을지 모르지만 비엔나의 사람들은 다행히도 변화를 받아들일줄 알았다. 이후 롤러와 말러는 20여편에 이르는 오페라의 제작을 통해서 비엔나의 오페라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대표적인 제작은 베토벤의 '휘델리오', 글룩의 '얼리드의 이피제니',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등이었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말러가 3막에서 몇가지 레시타티브를 추가하였다. 보수적인 음악팬들은 말러가 모차르트의 오리지널을 훼손했다고 하면서 비난하는 일도 있었다. 호프오퍼에서 말러의 공연활동은 대부분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었지만 일상 운영에서는 난관이 많았던 것이었다. 성악가들과의 분규가 끊임없었으며 극장 기술자들과의 다툼도 쉴 틈이 없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말러의 지나치게 독재적이며 히스테리컬한 지휘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1903년에는 무대 기술자들이 일을 하지 못하겠다며 사보타쥬를 한 일이 있었다. 이들의 요구는 근무환경 개선과 임금인상이었다. 그러나 말러는 이들이 극단주의자들의 사주를 받고서 극장운영을 오렵게 만들고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 타협은 보았지만 아무튼 말러도 한 고집하는 사람이어서 극장운영에 어려움이 자주 보였다. 


헝가리 출신의 지휘자 한스 리히터


비엔나 사회에서는 반유태주의가 점차 노골적으로 되고 있었다. 그런 풍조에 편승하여서 말러를 호프오퍼에서 공공연히 쫓아내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07년에는 말러를 호프오퍼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언론 캠페인까지 벌어졌다. 그 즈음에 말러는 극장의 운영이나 오페라 제작에 시간을 보내기 보다는 작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제는 호프오퍼를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끼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1907년 중반에 말러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과 4개 시즌을 지휘한다는 계약을 맺을수 있었다. 여름이 끝날 때 쯤에 말러는 호프오퍼에서 마지막으로 '휘델리오'를 지휘하고 비엔나를 떠났다. 그의 648번째 오페라 지휘였다. 말러는 비록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에서 호프오퍼를 떠나게 되었지만 그가 재임하였던 10년 동안 호프오퍼는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으니 그것은 모두 말러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호프오퍼의 음악적인 수준이 크게 높아졌음은 물론이고 호프오퍼가 지고 있던 빚도 다 정리되었다. 그만큼 입장 수입이 많았다는 의미이다. 말러는 호프오퍼를 떠나기에 앞서서 사임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게시판에 직접 붙였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누군가 찢어서 버려 바닥에 버렸다. 말러의 공적을 인정하기 싫었던 사람들도 많았던 것이다. 말러는 1907년 12월 초에 뉴욕에 도착했다. 


막스 오펜하이머가 그린 '오케스트라'. 구스타브 말러가 빈필을 지휘하는 모습의 유화. 벨베데레 미술관 전시


테오 차셰(Theo Zasche)가 그린 캐리캐추어 '모던 오케스트라'(The Mordern Orchestra). 말러는 둥근 폭탄을 깔고 앉아서 지휘를 하고 있다. 지휘봉 대신에 달각달각 소리를 내는 장난감 악기를 손에 들고 있다. 세사람의 인물이 클로스업 되어 있다. 말러의 왼편에서 두개의 활로 더블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은 말러의 처남인 아르놀트 로제이다. 그위에서 무거운 저울추를 퍼블릭에게 내리고 있는 사람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이다. 오른쪽에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사람은 아르놀트 쇤베르크이다. 1907년 작품이다.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의 악보에 들어 있는 말러의 지휘모습.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부활'은 악보만 232페이지에 달한다.


1898년 9월에 빈필의 수석지휘자인 한스 리히터가 사임을 하였다. 빈필은 이른바 예약콘서트(Subscription concerts)의 운영을 중단할수 없어서 새로운 지휘자가 필요했다. 콘서트 위원회는 만장일치로 말러를 새로운 지휘자로 영입키로 했다. 그런데 그렇게 결정되었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반유태주의 신문들은 유태인인 말러가 독일음악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빈필의 멤버들은 말러가 간혹 오리지널 스코어를 수정해서 마음대로 만든다면서 불평을 뱉어냈다. 또 다른 멤버들은 말러의 지나친 리허설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다. 그렇게 되자 일각에서는 한스 리히터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리히터는 흥미가 없다면서 그런 요구를 일축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말러의 위상이 약화된 일이 있었다. 1900년에 말러가 빈필을 이끌고 파리 만국박람회에 갔을 때였다. 어쩐 일인지 청중들이 오지 않아서 빈필의 콘서트는 큰 손해를 보았다. 말러는 단원들에게 줄 보수를 마련하기 위해 로트쉴드 돈을 빌려야 했다. 그 돈을 나중에 어떻게 갚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말러 때문에 빈필이 손해를 보았다는 인식이 있어서 말러에 대한 비난이 멈추지 않았다. 말러는 1901년 4월에 이제는 빈필을 떠나야 할 때라고 생각해서 사표를 던졌다. 하지만 말러가 지휘를 맡았던 세개 시즌 동안 빈필은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연주하여 빈필의 위상을 새롭게 만들기도 했다. 예를 들면 헤르만 괴츠(Hermann Goetz), 빌헬름 킨츨(Wilhelmm Kienzl), 이탈리아의 로렌초 페로시(Lorenzo Perosi) 등의 작품이었다.


비엔나 필하모니커(신년음악회 장면)


작곡에 보다 전념하기 시작한 말러에게 빈필과 슈타츠오퍼의 지휘를 동시에 맡는다는 것은 힘겨운 것이었다. 더구나 지휘자인 말러에게 향한 노골적인 반유태주의적 반감은 참기가 어려운 것이었다. 말러는 작곡에 전념키로 결심했다. 말러는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를 완성하는 한편 교향곡 4번의 작곡도 시작했다. 교향곡 4번은 1899년에 시작하여 1900년에 완성했다. 이때에 말러는 슈타인바흐에 있는 작곡의 집 대신에 카린티아의 뵈르터제(Wörthersee) 호반의 마이어니그(Maiernigg)에 새로 작곡을 집을 마련하고 이곳에서 집중 작곡하였다. 말러는 나중에 오두막집에 불과한 마이어니그의 작곡의 집 옆에 커다란 빌라를 건설하였다. 말러의 중기 작품은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말러는 1901년부터 1904년 사이에 프리드리히 뤼케르트(Friedrich Rückert)의 시에 의한 가곡들을 작곡하였다. 이들을 '뤼케르트 리더'라고 부른다. 이와 함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도 완성하였다. 교향곡 5번, 6번, 7번의 3부작은 1901년부터 190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다. 교향곡 8번은 1906년에 써졌다. 교향곡 8번은 불과 8주만에 불과 같은 열정으로 완성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간에 말러의 작품들이 비엔나와 기타 도시에서 자주 연주되었다. 1899년 4월에는 비엔나에서 교향곡 2번의 초연이 말러 자신의 지휘로 있었고 1901년 2월에는 그의 초기 작품인 '울리는 노래'(Das klagende Lied)의 수정본이 공연되었다. 그해 말에는 말러 자신의 지휘로 교향곡 3번이 뮌헨에서 초연되었다. 교향곡 3번은 1902년 6월에 크레펠트() 페스티발에서 초연되었다. 말러의 작품들은 이제 정규 콘서트에 자주 등장하는 것들이 되었다. 교향곡 5번과 6번은 쾰른과 에센에서 말러 자신의 지휘로 1904년과 1906년에 초연되었다. 그리고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의 일부 가곡들은 1905년 월 비엔나에서 소개되었다.


마이어니그에 있는 말러의 두번째 작곡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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