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불행했던 말러

결혼, 가족, 비극

정준극 2016. 6. 6. 09:48

결혼, 가족, 비극


알마 쉰들러(나중에 알마 말러 베르펠)


지휘자로서 경제적으로 비교적 윤택하게 된 말러는 비엔나의 3구 아우엔브루거슈트라쎄(Auenbrugerstrasse) 2번지 건물의 3층에 넓직한 모던 아파트를 거처로 삼게 되었으며 마이어니그의 작곡의 집에서 가까운 제키른(Sekirn) 호반에 새로운 여름 빌라를 가질수 있었다. 말러는 1901년 11월에 알마 쉰들러(Alma Schindler)를 처음 만났다. 어떤 사교 모임에서였다. 알마가 화가인 칼 몰을 계부로 삼고 지내던 때였다. 알마의 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의 제자인 칼 몰(Karl Moll)과 재혼하였던 것이다. 알마는 처음에 말러에 대하여 별로 호감을 갖지 못했다. 왜냐하면 말러는 오페라에 주역으로 출연하고 싶은 여성들과의 스캔들이 심심치 않아서 알마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가깝게 된 것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의 발레곡에 대하여 두 사람 모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어서였다. 남을 비판하는데에 의견이 맞으면 친해지기 마련이다. 그나저나 알마는 실은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의 제자였다. 그래서 알마는 쳄린스키와 섬싱이 있을 뻔했던 일이 있다. 그러는 중에 말러를 만났던 것이다. 알마는 작곡에도 상당한 재능을 갖고 있었기에 말러와 가깝게 지낼수 있었다. 일단 마음이 맞는 사람이라는 것을 서로 인식하자 두 사람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다. 곧이어 말러가 알마에게 청혼하였다. 말러와 알마는 이듬해인 1902년 3월 9일 칼스키르헤에서 친지 몇 명만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그때 말러는 42세의 노총각이었고 알마는 23세의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19년이었다. 알마가 말러와 결혼식을 올릴 때에 알마는 이미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첫 딸 마리아 안나(Maria Anna)는 그해 11월 3일에 태어났다. 그리고 둘째 딸 안나(Anna)는 2년 후인 1904년에 태어났다. 


알마와 말러의 두 딸인 마리아 안나와 안나. 그러나 큰 딸 마리아 안나는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말러와 알마의 친구들은 두 사람이 갑자기 결혼하자 놀람과 함께 과연 이들이 부부로서 행복하게 지낼지 미더워하지 않았다. 지혜롭지 못한 처사였다고 걱정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어떤 친구는 말러를 '퇴폐적인 유태인'이라고 부르며 도대체 집안 좋고 인물 좋은 알마가 어째서 말러와 같은 별 볼일 없는 사람, 그것도 유태인과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면서 노골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에 말러의 가족들은 알마를 '바람끼가 많고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으며 젊은이들을 홀리는데에만 정신을 쏟는 그런 여자'라면서 못마땅해 했다. 말러는 성격이 감상적이면서도 또한 가부장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타협을 모르고 고집이 세었다.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때에도 독재적인 행동으로 비난을 많이 받은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말러의 먼저번 애인인 소프라노 나탈리 바우어 레흐너는 '말러와 함께 지낸 것은 풍랑에 흔들려서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같은 보트를 타고 있는 것과 같았다'고 술회한바 있다. 그만큼 위태위태했다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알마는 작곡에도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그렇지만 말러는 알마가 결혼후에도 작곡을 계속하겠다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한 집안에 두 사람의 작곡가가 있을수는 없다'는 주장이었다. 말러는 알마에게 작곡을 그만두라고 강요하였다. 나중에 알마의 일기를 보니까 '어쩌면 사람이 이렇게 무자비하단 말인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빼앗고자 하니..'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 말은 안해도 속으로는 무척 섭섭했었을 것이다. 아무튼 두 사람은 열정으로 부부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로가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지내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기야 나이차이가 많으니 그럴 법도 했다. 



3구 아우엔브루커슈트라쎄 2번지에 말러가 살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명판. 벨베데레의 옆이다.


시간은 흘러서 1907년이 되었다. 말러는 비엔나에서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언론 플레이까지 벌이며 자기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는 것에 대하여 지쳐 있었다. 말러는 7월 초에 가족들을 데리고 여름 별장이 있는 마이어리그로 갔다. 그런데 마이어리그에 도착한지 며칠 안되어서 두 딸이 모두 성홍렬과 장질부사에 걸리는 불행한 일이 생겼다. 둘째 딸 안나는 다행히 회복되었으나 첫째 딸 마리아 안나는 7월 12일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마리아 안나가 겨우 네살 때였다. 이러한 비극적인 일이 있자 말러는 마치 정신이상자와 같은 상태가 되었다. 사실상 말러는 얼마전에 비엔나에서 정신과 의사의 진찰을 받은 일이 있다. 의사는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여서 지휘와 같은 힘든 활동을 하지 말고 특별한 요양을 해야 한다는 권고를 했다. 말러의 상태가 어느정도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알마가 남긴 글을 보면 말러는 거의 사형선고를 받은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말러는 '무슨 소리냐. 난 정상이야. 그저 잠시 현기증이 날 뿐이야'라면서 건강상태에 대하여 자신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말러의 건강상태는 생각밖으로 심각한 것이었다. 그것은 주로 절망감으로 생기는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고질인 심장병이 언제 터저 나올지 모를 형편에 있었다. 말러는 이 절망과 비탄의 기간에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를 완성하였다. 여름이 끝나자 말러는 마이어리그의 여름 별장을 폐쇄하였다. 아픈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다시는 마이어리그의 별장을 찾아가지 않았다. 


카린티아의 마리아 뵈르트에 있는 말러의 여름 별장. 제키른 호반이다.


말러는 1908년 1월 1일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지휘자로 데뷔하였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말러는 뉴욕의 첫 시즌에서 폭넓은 찬사를 받았다. 특히 1908년 3월의 '휘델리오' 지휘에 대하여는 뉴욕의 평론가들과 신문들이 너도나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휘델리오'는 말러의 주장에 따라 롤러의 비엔나 세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었다. 말러는 1908년 여름에 비엔나로 돌아왔다. 그리고 세번째 작곡의 집을 마련했다. 말러에게는 마지막 작곡의 집이었다. 티롤의 톨바흐(Tolbach)에서 가까운 숲 속에 지은 집이었다. 말러는 이곳에서 고대 중국의 시를 바탕으로 한스 베트게(Hans Wethge)가 마련한 대본으로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The Song of the Earth)를 작곡하였다. '대지의 노래'는 교향악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말러는 굳이 교향곡 몇번이라면서 넘버링을 붙이기를 거절하였다. 사실상 만일 '대지의 노래'에 교향곡 넘버를 붙인다면 9번에 해당하였다. 그러나 말러는 9번 교향곡에 대한 저주를 피하고 싶어서인지 넘버링을 붙이지 않았다. 말러는 베토벤, 슈베르트, 브루크너가 모두 제9교향곡을 마지막으로 생애를 마감한 것을 회상하고서 '대지의 노래'에 9번 교향곡이라는 넘버를 붙이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1908년 9월에는 교향곡 7번이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알마 말러는 7번을 보잘것 없는 작품이라면서 비하했지만 프라하의 초연은 대단한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메트로폴리탄은 1908-09년 시즌에 이탈리아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말러와 공동 지휘자로 계약했다. 말러에게 여유를 주자는 의도도 있지만 당시에 토스카니니의 인기가 날로 높아졌기 때문에 이탈리아인들이 많은 뉴욕에서 토스카니니의 등장은 흥행에도 기여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리하여 이 시즌에 말러는 다만 19회의 지휘를 했다. 그중에서 1909년 2월에 지휘한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는 '과연 말러야!'라는 높은 찬사를 받은 것이었다. 그런데 말러는 시즌 초반에 뉴욕 교향악단의 콘서트를 지휘한 일이 있었다. 말러는 메트에서 오페라를 지휘하는 것보다 뉴욕필을 지휘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메트로폴리탄의 지휘를 사임하고 뉴욕필의 지휘를 전적으로 맡게 되었다. 말러는 뉴욕필을 완전히 새로운 교향악단으로 만들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메트로폴리탄과 완전히 인연을 끊은 것이 아니라 간혹 객원지휘를 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10년 3월의 '스페이드의 여왕'을 지휘한 것은 큰 박수를 받은 것이었다. 이것이 말러로서는 메트로폴리탄에서의 마지막 오페라 지휘였다.


1900년대 초반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말러는 1909년 여름에 시간을 내서 유럽으로 돌아왔다. 말러는 교향곡 9번을 준비하는 중에 네덜란드의 초청으로 네덜란드의 여러 곳에서 지휘를 했다. 그후 뉴욕으로 다시 갔다. 뉴욕의 1909-10년 시즌은 지루하고 힘든 것이었다. 말러는 리허설에 치중했지만 실제 콘서트는 대중들의 기호에 미치지 못하였다. 1909년 8월에 미국 초연을 가진 교향곡 1번은 실패였다. 뉴욕의 신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더구나 1909년 시즌은 뉴욕필에게 많은 재정적 부담을 안겨준 것이기도 했다. 말러는 1910년에 잠시 유럽으로 다시 돌아와서 뮌헨에서 교향곡 8번을 지휘했다. 이번에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아마 말러의 전생애 중에서 최대의 성공을 거둔 연주회였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러한 성공도 부인 알마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이게 되었다. 그때 쯤해서 알마는 알콜중독자가 되었고 이를 치료하기 위해 어떤 요양소에 있을 때 독일의 젊은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를 만나 염문을 뿌리게 되었다. 부인의 외도 사실을 알게 된 말러는 너무나 실망해서 친구인 지그문트 프로이드로부터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는 자문을 구했다. 프로이드는 알마가 그렇게 된 배경에는 말러가 작곡을 하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욕구불만으로 그렇다고 조언했다. 말러는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로부터 알마에게 작곡을 하라고 권유했고 심지어는 알마가 작곡한 것들을 수정해 주고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와주기도 했다. 이에 감동을 했는지 하여튼 알마는 말러에게 이제부터는 말러의 곁에만 있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알마와 그로피우스의 관계는 은밀하게 계속되었다. 


말러의 세번째 마지막 작곡의 집. 클라겐푸르트-마이어니그의 숲 속에 있다. 지금은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말러는 정신적으로 피곤해 있었지만 1910년 여름 동안은 교향곡 10번을 위해서 시간을 보냈다. 그후 11월에는 알마와 함께 뉴욕으로 다시 갔다. 말러는 뉴욕필의 지휘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쯤해서 말러는 후두에 염증이 생겨 고생을 하기 시작했다. 1911년 2월에 말러는 이상기온으로 더운 날씨이지만 카네기 홀에서의 연주를 강행하였다. 이때 페루치오 부소니의 '베르세우스 엘레지아크'(Berceuse elegiaque)의 세계 초연이 이루어졌다. 이것이 말러가 마지막으로 지휘한 콘서트였다. 말러는 카네기 홀에서의 지휘 후에 병상으로 옮겨졌고 일어나지를 못했다. 세균성 심장내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심장 판막이 제대로 작동을 하지 못하는 증상으로 생존률이 제로인 질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러는 삶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다가올 콘서트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었고 특히 3월 3일 있었던 콘서트에서 알마가 작곡한 노래를 소프라노 프란체스 알다(Frances Alda)가 연주한 것을 기뻐하였다. 4월 8일, 말러는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항해는 순탄치 못해서 고생을 했고 예정보다 10일이나 늦게 파리에 도착했다. 말러는 곧바로 뉠리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아무런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말러는 5월 11일에 기차를 타고 비엔나에 와서 9구 마리안넨가쎄(Mariannengasse) 20번지의 뢰브(Löw) 요양소에 입원하였다. 말러는 이곳에서 5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9구 알저그룬트의 마리안넨가쎄 20번지의 뢰브 요양소는 말러가 세상을 떠난 집이다. 이를 기념하여서 명판이 붙어 있다.


말러의 장례식은 1911년 5월 22일 그린칭 공동묘지에서 거행되었다. 알마는 건강상의 이유로 의사의 지시에 따라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말러의 장례식에는 여러 인물들이 참석하였다. 아놀드 쇤베르크는 조화를 헌정하였다. 조화에는 '성구스타브 말러'(The Holy Gustav Mahler)라고 적었다. 말러를 성자처럼 존경해서였다. 브루노 발터, 알프레드 롤러, 구스타브 클림트 등이 참석했고 유럽의 여러 오페라 극장을 대표하는 사람들도 일부러 와서 참석하였다. 뉴욕 타임스는 말러의 서거 소식을 전하면서 말러를 '이 시대에 가장 위대한 음악가'였다고 말했다. 알마 말러는 말러가 세상을 떠난 후 50년이나 더 살다가 1964년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마는 말러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인 1915년에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했다가 5년 후에 이혼하였고 이어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과 1929년에 재혼하였다. 알마는 1940년에 말러와 함께 지냈던 세월을 회상하는 비망록을 발간하였다. 하지만 말러의 전기작가들은 알마가 그 비망록을 자기 위주로 좋게만 썼으며 말러의 생애를 왜곡되게 조명했다고 비판하였다. 말러와 알마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딸인 안나는 나중에 유명한 조각가가 되었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1955년에는 비엔나에 국제구스타브 말러협회가 설립되었다. 브루노 발터가 초대 회장을 맡았으며 알마 말러는 명예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린칭 공동묘지의 말러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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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러의 작품들은 오페라적이라기 보다는 교향악적이다. 말러는 10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모두 감성이 풍부한 것이며 또한 대규모이다. 그런데 교향곡 10번은 미완성이었다. 말러는 몇개의 연가곡(송 사이클)을 작곡했다. 대체로 민속적인 영향을 받은 가곡들이다. 말러의 작품들은 낭만주의(로맨티시즘)에 속한다고 볼수 있다. 그런데 상당수가 죽음과 내세에 대한 내용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합창곡인 '대지의 노래'와 연가곡인 '방황하는 영혼의 노래'는 말러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말러의 작품


[교향곡]

○ 1번. D장조. 원래는 추가 악장 '블루미네'(Blumine) 포함하여 '거인'(Titam)이라는 타이틀. 1884-1888

○ 2번. C단조. 프리드리히 클롭슈토크(Klopstock)의 대본에 의한 '부활'(Resurrection)이라는 타이틀. 솔로들과 합창. 1884-1894

○ 3번. D단조. 콘트랄토 솔로와 소년 합창, 여성 합창 포함. 1895-1896

○ 4번. G장조. 솔로 소프라노. 1899-1900.

○ 5번. C샤프 단조. 1901-1902

○ 6번. A단조. 1903-1905

○ 7번. B단조. 1904-1905

○ 8번. E플랫 장조. '1천 교향곡'(Symphony of a Thousand)이라고 함. 최소한 수백명 합창단과 솔로 포함. 1906-1907

○ 9번. D장조. 1909-1910

○ 10번. F샤프 장조. 미완성 1910. 1악장은 완성하였으나 나머지는 데릭 쿠크(Deryck Cooke)가 1964년에 작곡가가 남긴 스케치를 바탕으로 완성.


[칸타타]

○ 울려퍼지는 노래(Das klagende Lied). 1878-1880


[연가곡]

○ 방랑하는 영혼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 1884

○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Des Knaben Wunderhorn). 1888-1899

○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Kindertotenlieder). 1901-1904

○ 뤼케르트 시에 의한 다섯개의 노래(Fünf Lieder nach Rückert). 1905

○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 노래교향곡(Song Symphony).  1907-1909


'대지의 노래' 발레. 파리 갸르니에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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