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개혁자 글룩

무엇을 개혁했다는 것인가?

정준극 2018. 2. 9. 09:14

무엇을 개혁했다는 것인가?

글룩의 생애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Christoph Willibald Gluck)이라고 하면 오페라를 개혁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무엇을 개혁했다는 것인가? 글룩은 18세기의 작곡가이다. 18세기 당시에 오페라를 개혁해야 할 필요가 있어서 개혁했다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글룩 당시의 오페라는 어떤 상황이었는가?  이런 궁금증들을 한꺼번에 풀어본다. 플로렌스에서 시작된 오페라는 쟈코포 페리,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등에 의해서 꽃을 피우게 된다. 세월이 흘러서 이탈리아의 오페라는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로 장르를 달리하여 발전한다. 오페라 세리아는 주로 비극적인 내용의 순수 오페라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당시에는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라는 사람의 대본을 오페라에 많이 이용하였다. 그의 대본은 주로 그리스나 로마의 신화에 바탕을 둔 비극적인 내용이었다. 그래서 오페라라고 하면 비극적인 내용을 우선 생각하게 되었던 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재미있게 즐길수 있는 내용의 오페라가 등장하게 되었다. 오페라 부파를 말한다. 그런데 글룩은 오페라 세리아가 되었던 오페라 부파가 되었던 이들이 표현하고 있는 목적과 형식이 원래 지향했던 오페라와는 다르게 변천되어 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유감으로 생각했다.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


글룩은 무슨 문제가 있기에 본래의 의도는 찾아볼수 없고 자꾸만 이상한 형태로 벗어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오페라 세리아에 있어서는 노래가 표면적인 효과만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노래를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도구로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듣기 좋게 할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기를 돋보이게 할수 있을 것인가에 치중한 것임을 상기했다. 오페라의 내용은 ? 맨날 신들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내용이 아니면 시대에 뒤 떨어진 진부한 스토리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페라 부파는 이미 오래전에 원래의 신선함을 상실했다고 믿었다. 오페라 부파에서는 스토리가 문제가 아니라 그저 주인공 한 사람을 돋보이게 하려고 별별 노력을 다 기울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주인공이란 인물들이 신이나 왕이었으므로 그런 인물들을 돋보이게 해줄 필요가 있기는 있었다. 하지만 지나쳤다. 주인공들은 무조건 무대의 중앙에 위치하여 노래를 부르도록 설정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편, 오페라 부파에서는 노래를 부르면서 보컬 라인을 어찌나 화려하게 꾸미려고 하는지 원래 그 노래가 표현코자 했던 아이디어는 찾아볼수 없다고 보았다. 글룩은 오페라는 오페라 다워야 한다고 믿었다. 오리지널 아이디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페라는 인간적인 드라마와 열정에 초점을 두어야 하며 가사와 노래가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에우리디체가 지하세계의 사자에게 붙잡혀 가는 장면


글룩은 다행하게도 비엔나에 있을 때에 자기와 같은 심정의 오페라 관련 인사들을 만날수 있었다. 궁정극장장인 자코모 두라쪼(Gacomo Durazzo) 백작이 대표적이다. 두라쪼 백작은 이탈리아가 아닌 프랑스의 무대 음악을 대단히 찬미하는 사람이었다. 대본가인 라니에리 데 칼차비기(Ranieri de' Calzabigi)도 글룩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었다. 칼차비기는 당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으로 만들어지는 진부한 내용의 오페라 세리아에 대하여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새로운 사상을 불어넣어 주는 오페라 대본을 만들겠다고 다짐한 사람이었다. 안무가인 가스파로 안졸리니(Gasparo Angiolini)도 글룩과 마찬가지로 오페라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감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교육을 받은 카스트라토인 게타노 과다니(Gaetano Guadagni)도 당시의 오페라에 대하여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글룩은 '오르페오'의 신화를 그의 오페라에서 해피엔딩으로 만들었다. 현대적 연출


진부하고 구태의연한 포맷에서 벗어난 글룩의 첫번째 작품은 발레 '돈 주안'(Don Juan)일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작품이 곧 나타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1763년 10월 5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의 초연이 무대에 올려졌다. 대본은 칼차비기였다.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는 글룩이 시도한 개혁오페라의 첫 작품이었다. 오페라에서 안무는 안졸리니가 맡았고 주인공인 오르페오 역은 카스트라토인 과다니였다. 글룩이 주안점을 둔 것은 과거의 오페라들이 주인공의 노래에 많은 비중을 둔 것과는 달리 오페라를 드라마틱하게 이끌어 나가는데 더욱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지루하기만 한 레시타티브도 과감히 삭제하였다. 마치 물이 흐르는 듯한 드라마의 전개는 앞으로 등장할 바그너의 음악 드리마(악극)의 선구자의 역할이었다. 글룩과 칼차비기의 합동작전은 '오르페오'에 이어 '알체스테'(Alceste: 1767)와 '파리데와 엘레나'(Paride ed Elena: 1770)에서 더욱 꽃을 피웠다. 칼차비기는 '알체스테'의 서문을 썼다. 어찌하여 개혁적인 오페라를 만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래서인지 글룩의 개혁오페라의 시초는 '오르페오'가 아니라 '알체스테'라는 주장이 있다. 글룩의 '오르페오' 또는 '알체스테'가 과거의 오페라와 현저하게 다른 점은, 우선 지나치게 주인공 한사람 위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 사람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도록 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은 극의 진전에 중점을 둔 것이다. 또한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콘티누오 악기로서 반주를 삼는 레시타티브를 지향하고 음악이 물 흐르듯이 흘러가도록 했다.


루르트리엔날레 2016의 '알체스테'


이제 글룩의 이력을 살펴보자. 글룩의 풀 네임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리터 폰  글룩이다. 리터(Ritter)라는 단어는 귀족을 말하는 것으로 글자그대로는 기사(騎士)이지만 작위로 보면 남작에 준한다. 글룩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귀족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이름에 '리터 폰'을 써도 무방하였다. 글룩은 1714년 7월 2일 오늘날 독일 바바리아 지방에 속하는 베르힝(Berching)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그 지방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수 있는 선제후의 영토였다. 공식적으로는 오버활츠(Oberfalz)라고 부르는 지역이었다. (영어로는 Upper Palatinate). 베르힝은 당시에 노이마르크트(Neumarkt)라고 불렀는데 글룩이 실제로 태어난 마을은 노이마르트크 인근의 에라스바흐(Erasbach)라는 곳이었다. 글룩의 아버지 알렉산더는 에라스바흐 마을의 삼림관이었다. 그러다가 글룩이 세살 때부터는 오늘날 북부 보헤미아 지방의 차쿠피(Zakupy), 크리브스카(Chrisbska), 예체리(Jezeri)의 삼림을 관할하는 삼림관으로 활동했다. 차쿠피는 당시에 라이히슈타트(Reichstadt)라고 불리는 마을이었고 크리브스카는 크라이비츠(Kreibitz)였으며 예체리는 아이젠버그(Eisenberg)라는 마을이었다. 글룩은 여덟살 때부터 이 지방의 코마타우(Komatau: 오늘날의 Chomutov)에 있는 예수회 김나지움에서 처음으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러다가 글룩이 열세살 되던 해에 글룩의 식구들은 아이젠버그로 이사했는데 그것은 글룩의 아버지가 로브코비츠 가문의 필립 히아친트 공자 저택에 집사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글룩은 나중에 사람들에게 보헤미아의 시골에 살 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삼림관이 될 생각이었으나 음악에 눈을 뜨게 되어 결국 음악의 길로 인생의 항로를 바꾸게 되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아이젠버그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음악을 좋아해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한다. 특히 교회에서 미사를 드릴 때에는 마을 사람들의 성가대가 직접 악기를 연주하며 찬미를 불렀는데 글룩도 소년이었지만 당연히 함께 했다고 한다. 나중에 글룩은 그 때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회상하였다.


글룩이 소년시절에 음악교육을 받았던 코모타우(오늘날은 체코공화국의 초무토프)


글룩은 보헤이마의 시골에서 음악가로서의 꿈을 펼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로 가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 글룩이 택한 행선지는 프라하였다. 당시에 프라하대학교는 음악활동에 있어서도 대단히 찬란했던 곳이었다.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가 오히려 비엔나보다 더 활발하게 연주되었던 곳이었다. 글룩은 17세에 프라하대학교에 입학하여 음악과 함께 논리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그러다가 프라하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지 않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후 23세가 될 때까지 어디서 무얼 했는지 종적을 찾을수가 없었다. 그건 그렇고 잠시 이야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려서 글룩의 모국어가 어떤 것이냐는 문제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과거에도 논란이 있었던 토픽이었기 때문이다. 글룩은 오늘날의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글룩을 독일의 작곡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므로 글룩의 모국어는 당연히 독일어야 한다. 그런데 글룩은 독일어를 잘 하지 못했다. 평상시의 대화야 할수 있었지만 웬만한 문장을 만들려면 힘들어했다. 오히려 체코어에 능숙했다. 보헤미아 지방에서 소년시절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다. 글룩은 프랑스에서 오랜기간을 지냈다. 그 전에는 이탈리아에서도 한동안을 지냈다. 그러나 프랑스어와 이탈리어도 체코어처럼 능숙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어떤 음악학자는 글룩을 체코의 오페라 코미크 작곡가로 분류한 일도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글룩은 다국적 인물이었다. 독일에서 태어났고 체코에서 자랐으며 영국과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활동했으며 말년은 오스트리아에서 보냈다.


18세기 밀라노의 테아트로 레지오 두칼(라 스칼라의 전신이다.)


글룩은 1737년, 그가 23세의 청년일 때에 밀라노에 도착했다. 조반니 바티스타 사마르티니(G. B. Sammartini)의 문하에 들어갔다. 사마르티니는 글룩에거 악기에 대한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런데 사마르티니는 기본적으로 오페라 작곡가가 아니었다. 글룩은 오페라의 도시 밀라노에 있으면서 오페라에 대한 많은 것을 보고 배울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밀라노에 온지 4년만인 1741년에 당시 밀라노에서 가장 화려한 극장인 테아트로 레지오 두칼(Teatro Regio Ducal)에서 그의 첫 오페라인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공연할수 있었다. 대본은 메타스타시오의 것이었다. '아르타세르세'는 이듬해 밀라노 카니발에서 리바이발되었다. 얘기에 의하면 관중들은 처음에 글룩의 아르타세르세를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글룩이 밀라노 스타일의 가벼운 아리아를 추가하자 그제서야 받아들였다고 한다. 글룩은 그의 첫 오페라가 밀라노 카니발 기간중에 공연되어 그나마 환영을 받자 그로부터 계속 4년 동안 밀라노 카니발을 위해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해서 무대에 올렸다. 글룩의 오페라가 밀라노에서 인기를 끌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카스트라토인 조반니 카레스티니(Giovanni Carestini)가 여러번이나 글룩의 오페라에 주인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글룩은 카니발 기간 이외의 시간에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들을 위해 오페라를 작곡했다. 예를 들면 토리노와 베네치아였다. 이런 도시에서 공연된 글룩의 오페라 중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것은 '이페르메스트라'(Ipermestra)였다. 이 오페라는 1744년 베네치아의 테아트로 산 조반니 크리소스토모에서의 공연에서 상당한 박수를 받았다. 이 기간 중에 글룩이 만든 오페라의 대본은 거의 모두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메타스타시오는 글룩의 작곡 스타일을 싫어했다고 한다.  

아르타세르세의 한 장면. 아르타세르세는 페르시아의 아르타세르세스 1세를 말한다.


글룩은 1745년에 런던의 왕립극장의 상주작곡가로서 초청을 받았다. 그런데 글룩이 런던에 도착해보니 사정이 만만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코뱅당의 반란이 일어나서 런던은 그야말로 혼란상태였다. 그러다보니 왕립극장은 문을 닫고 아무런 활동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글룩의 오페라들이 겨우 공연된 것은 그 다음해인 1746년이었다. 왕립극장에서 '거인들의 몰락'(La caduta de' giganti)과 '아르타메네'(Artamene)가 공연되었다. 글룩은 갑자기 오페라를 만들어서 공연해야 하다보니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 결국 두 오페라의 음악들을 과거에 만들어 놓았던 오페라로부터 이 파트 저 파트를 빌려와서 만들었다. 그거야 당시 오페라계의 관례였으니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글룩은 런던에 있으면서 오페라 이외의 다른 작품들의 작곡에도 치중하였다. 대표적인 것은 여섯 편의 트리오 소나타였다. 글룩은 런던에 있으면서 헨델의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수 있었다. 그것도 런던 방문의 커다란 소득이었다. 글룩은 헨델의 '메시아' 악보를 일부러 사서 매일처럼 보고 연구하기도 했다. 과연, 글룩은 런던 이후에 그의 작품에 헨델 스타일을 즐겨 시용하였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헨델은 글룩의 음악으로부터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했던 것 같았다. 헨델은 글룩의 음악에 대하여 '그사람 대위법 하나는 잘 아는 것 같구만. 우리집 요리사도 그정도는 알고 있지만 말이네'라고 말했다. 한편, 글룩은 다른 사람의 오페라에서 주인공들이 자연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특히 데이빗 개릭(DAvid Garrick)의 연출 솜씨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훗날 글룩의 오페라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었다.


런던의 헤이마켓에 있는 왕립극장(King's Theater)


글룩은 1747년과 1748년에 그의 오페라 경력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두 작품의 위촉을 받았다. 하나는 드레스덴으로부터 의뢰받은 것으로 바바리아와 작소니 두 왕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부탁을 받은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온 피에트로 미뇨티 오페라단이 공연을 맡기로 했다. 글룩은 Le nozze d'Ercole e d'Ebe(에르콜레와 에베의 결혼)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그런데 바쁘다 보니 글룩이 전에 작곡해 놓았던 음악 중에서 상당량을 인용하였고 심지어는 글룩의 스승인 사마르티니가 작곡한 음악도 인용하였다. 아무튼 '에르콜레와 에베의 결혼'은 대성공이었다. 글룩의 이름이 유럽의 여러 왕실들에 알려진 계기였다. 드레스덴의 결혼식에 참석했던 비엔나의 합스부르크 왕족들도 글룩을 눈여겨 보게 되었다. 얼마후 비엔나 왕실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글룩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했다. 대본은 메타스타시오의 La Semiramide roconosciuta(정체가 밝혀진 세미라미데)라는 것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당시의 궁정 오페라 작곡가로서는 독일의 요한 아돌프 하쎄(Johann Adolph Hasse)가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비엔나 왕실은 하쎄를 제쳐두고 글룩에게 오페라 작곡을 의뢰했던 것이다. 이번에는 글룩이 이미 작곡해 놓았던 음악이나 또는 다른 사람의 음악을 빌려와서 오페라를 만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오리지널 음악을 창작해서 작품을 만들어냈다. 오페라는 대성공이었지만 대본을 제공한 메타스타시오는 자기의 대본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러쿵 저러쿵 글룩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심지어 그는 '세미라미데'를 '참담한 반달리즘의 음악'이라고 매도했다. 문화예술을 파괴하는 반달리즘적인 음악이라는 말이었다. 글룩은 메타스타시오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오페라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났다. '세미라미데'는 비엔나에서 27회나 공연되는 기록을 세웠다.

 

'정체가 밝혀진 세미라미데'의 한 장면, 비엔나에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처음 공연되었다.


글룩은 1748년 하반기와 1749년에 이탈리아에서 온 미뇨티 오페라단과 함께 유럽의 여러 지역을 순회하면서 오페라 공연을 도와주었다. 이 기간에 안된 얘기지만 글룩은 어떤 프리마 돈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성병에 걸렸고 그러는 한편 코벤하겐 궁정을 위해서 La contesa de' numi(독일어로는 Der Streit der Gotter: 신들의 분쟁)을 작곡했다. 글룩은 1750년에 미뇨티 오페라단과 결별하고 미뇨티 단원이었던 조반니 바티스타 로카텔리가 설립한 또 다른 오페라단을 위해서 일하였다. 그렇게 해서 글룩은 프라하로 돌아가서 활동할수 있게 되었다. 글룩은 1750년도 프라하 카니발을 위해서 오페라 '에치오'(Ezio)를 작곡했다. 그런데 이 오페라 역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 의한 것이었다. 그해에 글룩의 '임페르메스트라'(Impermestra)도 공연되었다. 1750년에 프라하에서 있었던 중요한 사건은 그해 9월 15일에 글룩이 18세밖에 되지 않은 안나 베르긴(Anna Bergin)과 결혼한 것이다. 글룩은 36세였다. 안나 베르긴은 비엔나의 부유한 상임이며 은행가의 딸이었으며 한때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시녀로 궁정을 드나들기까지 했던 자였다. 안나의 아버지인 요제프 베르긴은 글룩과의 결혼을 적극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더구나 당시에 글룩은 알만한 사람들로부터 '의학적으로 타협되었다'(medically compromised)는 소리를 들었다. 이 말은 '성병에 걸렸다'는 말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안나 베르긴의 아버지인 요제프는 사람들한테 글룩이 '의학적으로 타협되었다'는 소문을 일부러 퍼트리며 다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나와 글룩의 사랑을 막지는 못했다. 두 사람은 아무튼 나이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빠져 결혼했고 딸 하나를 두었다. 나중에 그 딸이 글룩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아무튼 글룩은 1750년과 1751년을 프라하와 비엔나를 수시로 오가며 지냈다. 비엔나에는 가족이 있었고 프라하에서는 오페라 일을 해야 했다.


글룩과 부인 안나


글룩은 1752년에 또 하나의 작곡의뢰를 받았다. 나폴리 왕국의 샤를르 7세의 명명일을 축하하기 위한 작품을 의뢰받은 것이다. 대본은 글룩이 선정토록 되어 있었다. 글룩은 메타스타시오의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선택했다. 메타스타시오에 대하여는 별로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의 대본인 '티토의 자비'는 군왕을 위한 것으로는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었다. 나폴리의 샤를르 7세는 나중에 스페인의 카를로 3세가 된 사람이다. '티토의 자비'는 그해 11월 4일에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주인공인 섹스투스의 역할은 당대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카스트라토인 카파렐리(Caffarelli: Gaetano Majorano)가 맡았다.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하여튼 글룩의 '티토의 자비'는 대성공을 거두었다.글룩은 카파넬리를 위해 고난도의 테크닉을 필요로하는 저 유명한 아리아인 Se mai senti spirarti sul volto를 작곡해 주었다. 이 아리아는 '참으로 하늘이 내려준 노래이다'라는 감탄을 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게 무슨 노래냐? 사람이 저런 걸 어떻게 부른단 말인가?'라는 책망과 질책을 들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노래는 당시의 작곡법으로 수용할수 없는 방법으로 작곡되었다'라고 말했다. 그 때문에 아무튼 오페라가 끝난 후에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서 일대 논쟁을 벌인 소동까지 있었다. 글룩은 나중에 이 아리아를 조금 손을 보아서 '터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Tauride)에 재사용하였다.


글룩의 '티토의 자비' 1막의 장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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