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의 글룩, 그리고 개혁
글룩은 1753년에 마침내 비엔나에 정착하였다. 글룩은 궁정오페라의 지휘자(카펠마이스터)로 임명되었다. 글룩은 1754년의 비엔나 페스티발을 위해 '중국 여인'(Le cinesi)을 작곡했고 이듬해에는 나중에 레오폴드 2세가 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셋째 아들인 페터 레오폴드의 생일을 기념해서 '춤'(La danza)을 작곡했다. 글룩의 오페라 '안티고네'(Antigone)는 1756년 2월에 로마에서 공연되었다. 글룩은 이 오페라로 당시 교황 베네딕트 14세로부터 '황금박차 기사'로 서품되었다. 글룩은 그로부터 이름에 Ritter von Gluck 또는 Chevalier de Gluck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후부터 글룩은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를 쓰지 않고 대신에 프랑스 스타일의 오페라 코미크(Opera comiques)를 쓰기 시작했다. 글룩은 1756년에 그의 작품에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준 발레곡 '돈 주안'(Don Juan)을 완성했다. 안무는 당대의 안무가인 가스파로 안지올리니(Gasparo Angiolini)가 맡았다. 이후로 글룩은 주로 오페라 코미크를 작곡했으며 그런 그의 오페라 코미크 시도에 정점을 찍어준 작품은 1764년의 La rencontre imprévue(일명 '메카 순례'(Die Pilgrime von Mekka: Les Pélerins de la Mecque)였다. 그해 1월 비엔나에서 초연되었다. 글룩은 이 시기에 이미 오페라 개혁에 대한 생각을 머리에 담고 있었다.
'안티고네'의 한 장면
글룩은 사실상 오랫동안 오페라의 형식과 내용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를 깊이 생각해왔다. 글룩은 이탈리아 오페라의 두 장르, 즉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가 오페라라는 것은 이래야 된다는 것으로부터 너무 멀리 이탈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었다. 글룩은 오페라 부파가 이미 오래전부터 원래의 신선함을 상실했다고 보았다. 오페라 부파에서 대사로 나오는 우스개 소리, 즉 조크는 이미 내용이 빈약하고 초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주인공들의 면모라는 것도 이 오페라에도 나오고 저 오페라에도 나오는 이름잔 반복에 불과해서 진부하기가 이를데 없다고 보았다. 오페라 세리아에 있어서는 노래가 진실성이 없고 겉으로의 효과만을 노리는 것같다고 보았다. 그리고 스토리는 허구헌날 신화 또는 영웅들의 얘기여서 재미도 없거니와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오페라 세리아의 주인공들은 노래와 연기에 있어서는 한가닥하는 대가들일지 모르지만 전체적인 스토리의 흐름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그저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노래와 연기에만 치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청중들도 그 오페라다 무슨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것인지 도무지 판단하기 어려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글룩은 당시의 오페라들을 처음 오페라가 탄생했을 당시의 아이디어를 품도록 돌려놓고 싶어했다. 테크닉을 자랑하는 노래만을 내보이는 오페라가 아니라 인간적인 드라마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열정도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결국 노래와 대사가 똑같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작품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글룩의 '터리드의 이피제니'. 메트로폴리탄. 수잰 그레이엄과 플라시도 도밍고. 2011년
글룩은 비엔나에서 글룩의 개혁에 대하여 뜻을 같이 하는 인물들을 만났다. 궁정극장장인 자코모 두라쪼(Giacomo Durazzo) 백작과 대본가인 라니에리 데 칼차비기(Ranieri de' Calzabigi), 창의적인 안무가인 가르파로 안졸리니(Gasparo Angiolini), 그리고 런던에서 교육받은 카스트라토 게타노 과다니(Gaetano Guadagni) 등이었다. 모두 이탈리아 출신들이었다. 두라쪼 백작은 프랑스 무대 음악에 대한 열정적인 찬미자였다. 대본가 칼차비기는 오페라 대본에 있어서 메타스타시오의 압도를 타도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글룩의 개혁 마인드를 처음으로 표현한 결과물은 발레곡인 '돈 주안'이었다. 하지만 '돈 주안'은 시작일 뿐이며 곧이어 더 중요한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글룩이 음악을 맡고 칼차비기가 대본을 쓴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Orfeo ed Euridice)였다. 1762년 10월 5일,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첫 선을 보였다. 춤파트의 안무는 안졸리니가 맡았고 주인공인 오르페오는 카스트라토 과다니가 맡았다. 글룩이 '오르페오...'를 통해서 강조한 것은 드라마가 주인공의 노래보다 더 중하요한 작품이라는 것이었다. 또한 글룩은 멋없이 드라이하기만 한 레시타티브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이전까지 레시타티브라는 것은 콘티누오의 반주로 대사를 말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무튼 글룩이 시도한 새로운 스타일, 즉 음악과 드라마를 똑같이 중요하게 처리한 작품은 훗날 리하르트 바그너의 뮤직 드라마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이었다. 이후 글룩과 칼차비기 콤비는 '알체스테'(Alceste: 1767), '파리데와 엘레나'(Paride ed Elena: 1770)로서 이들의 개혁정신에 박차를 가하였다. 칼차비기는 '알체스테'의 스코어에 서문을 썼다. 오페라 개혁의 원칙들을 담은 내용이었다. 글룩이 그 글에 연명하였다.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로레인극장
글룩의 자기의 아이디어를 프랑스에 전파히는 노력을 기울였다. 파리에서는 나중에 루이16세의 왕비가 되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후원을 받을수 있었다. 글룩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엔나에 있을 때에 음악선생이었다. 1770년에 글룩은 파리오페라 극장과 여섯 편의 무대작품을 공연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글룩은 1774년 '얼리드의 이피제니'(Iphigénie en Aulide)로부터 시작하였다. '얼리드의 이피제니'의 초연은 뜻밖에도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논쟁이라기보다는 마치 전쟁과 같은 광적인 후유증이었다. 나폴리 오페라에 익숙해 있던 파리 사람들은 글룩의 개혁 오페라에 대하여 엄청난 충격을 받고 반발했다. 파리의 오페라 역사에 있어서 '얼리드의 이피제니'로 인한 대단한 논쟁을 부퐁 논쟁(Querelle des Bouffons) 이후 처음 맞이하는 일이었다. 글룩의 반대파들은 이탈리아의 니콜로 피치니(Niccolo Piccini)를 데려와서 앞세웠다. 이들은 나폴리 오페라의 우수성을 보여주어서 글룩의 개혁 오페라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무튼 이로부터 파리는 글룩파와 피치니파로 나뉘어서 밥만 먹고 나면 싸웠다. 그런데 실제로 당사자들인 글룩과 피치니는 왜들 이렇게 죽어라고 싸우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싸울 이유가 없고 서로 의논해서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 될텐데 무엇때문에 미워하고 싸우는지 알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고 불구하고 피치나 추종자들, 정확히 말해서 나폴리 오페라 추종자들은 가만히 있을수 없다고 생각해서 피치니에게 오페라 한편을 대표적으로 만들어서 글룩주의자들에게 보여주자고 나섰다. 피치니에게 의뢰한 오페라는 '롤란드'(Roland)였다. 그런데 사실상 그 당시에 글룩도 은근히 '롤란드' 오페라를 작곡하고 있었다. 글룩은 피치니가 '롤란드'를 작곡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때까지 완성한 자기의 '롤란드' 악보를 모두 없애버렸다. 그러므로 오페라 '롤란드'는 글룩의 작품이 없고 피치니의 작품만 있다.
니콜로 피치니의 '롤란드' 음반 커버
피치니가 '롤란드'를 선보임으로서 이른바 글룩대 피치니의 전쟁은 평화협정에 들어간듯 했다. 그러던중 1774년 8월에 글룩의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프랑스 버전(Orphée et Euridice)이 파리에서 공연되었다. 1774년에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16세가 프랑스의 왕으로 즉위한 해이다. 또한 1774년에는 미국이 독립을 하였으며 우리나라는 정조가 즉위한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파리의 '오르페오...'는 종전의 공연에 비하여 대단한 변화가 한가지 있는 것이었다. 주역을 카스트라토로 쓰지 않고 테너가 부르도록 한 것이었다. 파리의 시민들은 피치니와의 전투 등 지난 날은 잊고 글룩의 '오르페오...'에 많은 찬사를 보냈다. 그해에 글룩은 비엔나로 다시 돌아왔다. 궁정작곡가로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글룩은 그후로 몇년 동안 비엔나와 파리를 오가며 활동했고 이에 따라 그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더 높아졌다. 1776년 4월에는 '알체스테'의 프랑스 버전이 파리에서 공연되어 또 다시 글룩의 이름을 드높혀 주었다. 글룩은 파리오페라를 위해 '아르미드'(Armide: 1777), '터리드의 이피제니'(Iphigenie en Tauride: 1779), '에코와 나르시스'(Echo et Narcisse: 1779) 등을 작곡했다. 1779년에는 글룩이 '에코와 나르시스'의 리허설을 보고 있는 중에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주위 사람들은 놀라게 했던 일도 있었다. 글룩은 파리에서 요양하면서 후계자를 생각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적임자라고 생각했다. 살리에리는 글룩이 비엔나에 와서 지낸 1767년부터 글룩의 제자로서 글룩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헌신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살리에리는 글룩의 말년에 글룩의 둘도 없는 친구로서 지냈다. 심장마비 사건 이후 글룩은 비엔나에 있는 살리에리늘 파리로 불러와서 그가 추진하려던 '다나에'(Les Danaides)의 작곡을 살리에리에게 인계하였다. '다나에'가 완성되자 이 작품은 글룩과 살리에리의 공동작품이라고 선전되었다. '다나에'는 1784년 4월에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대성공이었다. 그후 글룩은 Journal de Paris와의 인텨뷰에서 '실은 이 오페라가 공동작품이 아니라 온전히 살리에리의 작품'이라고 밝혀서 오해가 없도록 했다.
살리에리의 '다나에'. 파리음악원 연주. 합창 L'amour sourit au doux vainqueur du Gange.
1780년에 비엔나로 돌아온 글룩은 소품들을 썼지만 주로 은퇴의 생활을 하며 지냈다. 그래도 오페라 활동은 간간히 하였다. 예를 들어서 1781년에는 '터리드의 이피제니'의 독일어 버전(타우루스의 이피게니)을 비롯해서 몇개의 다른 오페라들이 비엔나의 무대에 올려지는 것을 엔조이했다. 글룩은 1787년 11월 15일 또 한번의 심장마비를 겪었고 그로부터 몇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향년 73세로 숨을 거두었다. 글룩이 세상을 떠난 집은 현재 비엔나 4구 뷔덴의 뷔드너하우프트슈트라쎄 32번지이다. 그 집에 글룩의 세상 떠난 집이라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글룩이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788년, 4월 8일에는 비엔나에서 글룩을 추모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글룩의 제자였으며 친구였던 살리에리가 글룩의 De profundis와 이탈리아 작곡가인 니콜로 좀멜리(Niccolo Jommelli)의 레퀴엠을 지휘했다. 글룩은 마츨라인스도르프 공동묘지(Matzleinsdorfer Friedhof)에 안장되었다. 그후 글룩의 유해는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로 이장되었다.
비엔나의 4구 뷔덴의 뷔드너하우프트슈트라쎄. 왼쪽 깃발이 걸린 집이 32번지로서 글룩이 살다가 세상을 떠난 집이다. 첸트룸 방향으로 가면 12번지에 호텔 트리에스테가 있다. 필자가 1980년대에 비엔나에 가서 자주 묵었던 호텔이다.
글룩은 생전에 약 35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완성했다. 이밖에도 10여편의 짧은 오페라와 수많은 발레곡, 기악곡을 남겼다. 단막 오페라를 및 수정작품을 포함해서 글룩이 남긴 오페라를 모두 계산해 보면 49편이 된다. 그의 오페라 개혁은 모차르트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Idomeneo: 1781)은 글룩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작품이다. 글룩은 파리에서 지내면서 여러명의 뛰어난 제자들을 두었다. 살리에리도 그중에 속한다면 속하며 이밖에도 케루비니, 메울, 스폰티니도 글룩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은 혁명시기와 나폴레옹 시기에 프랑스 오페라를 꽃피게 만든 주역들이었다. 프랑스 작곡가 중에서 글룩을 가장 찬미한 사람은 엑토르 베를리오즈일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는 글룩의 전통을 가장 높이 계승한 작품이다. 글룩은 독일에서 태어났으면서도 독일에서는 오페라를 하나도 작곡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독일의 오페라 학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표적으로는 칼 마리아 폰 베버, 리하르트 바그너 등이다. 이들의 뮤직 드라마는 실로 글룩이 지향했던 노선 그대로였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글룩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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