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아름다운 봐하우

자연과 역사와 문화의 계곡 봐하우

정준극 2020. 3. 12. 15:40

자연과 역사와 문화의 계곡 봐하우


봐하우 지역의 대표적인 명소인 멜크 대사원의 위용. 수도원과 교회가 있다. 수도원의 도서실은 역사적인 장소로 유명하다.


오스트리아에서 잘츠캄머구트에 못지않게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의 지역이 있다면 도나우를 안고 있는 봐하우(Wachau) 계곡을 들지 않을수 없다.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에 속한 봐하우는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이다. 봐하우 계곡은 대체로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에서 크렘스(Krems)와 멜크(Melk) 사이의 지역을 말한다. 자연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깊은 역사가 있으며 전통적인 문화가 풍성한 지역이다. 게다가 품질 좋은 포도주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크렘스에서 시작하여 멜크까지의 거리는 약 36 km 에 이른다. 봐하우 지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관광지는 뒤른슈타인(Dürnstein)과 멜크이다. 뒤른슈타인의 언덕 위에 폐허로 남아 있는 고성은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가 오스트리아의 레오폴드 5세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멜크에는 중세의 수도원과 교회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괴트봐이히(Göttweig) 수도원도 필견의 장소이다. 봐하우 계곡이야 말로 성채와 고성과 장엄한 수도원이 아름다운 마을들과 함께 도나우 강을 따라 펼쳐져 있는 곳이다. 언덕마다 포도밭이 들어서 있는 것도 아늑하고 한적한 시골을 연상케 해주는 풍경이다. 오스트리아에서 강과 계곡이 이처럼 매력적으로 복합되어 있는 곳도 찾아보기 힘들다. 잘츠캄머구트가 호수와 산으로 유명하다면 봐하우는 계곡과 강으로 유명하다. 봐하우는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그림 같은 봐하우 계곡의 마을과 도나우


봐하우 지역에 언제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는지 그리고 어떤 연혁을 지녔는지 등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아니 또 무슨 역사 타령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혹시 봐하우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간략히 설명코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구석기 시대에 이미 이 계곡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흔적이 남아 있다. 갈겐버그(Galgenberg)와 빌렌도르프(Willendorf)에서 사람 형상의 조각과 같은 모습들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이 계곡에 사람들이 살았었다는 증거이다. 그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3만 2천년에서 2만 6천년전이라고 보고 있다. 그후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4천 5백년부터 1천 8백년 사이에 크렘스(Krems)와 멜크(Melk) 지역에 사람들이 정착해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경작과 주거를 위해 숲을 개간하였음이 밝혀졌다. 기원전 15년에 켈트 왕국에 속해 있던 노리쿰이 로마제국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그로부터 로마제국의 국경은 도나우를 따라 봐하우 지역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시에 로마제국은 봐하우 지역의 남쪽 도나우의 강안에 요새 또는 망루들을 설치하였다. 그것을 라임스(Limes)라고 부른다. 아직까지도 폐허가 남아 있는 라임스는 지금의 마우테른 안 데어 도나우(Mautern an der Donau)이며 당시에는 카스트룸 화비아니스(Castrum Fabianis)라고 불렸던 망루이다. 봐하우 계곡의 도나우 끝자락에 있다. 꼬한 오늘날의 바하른스도르프(Bachrnsdorf)에도 망루가 남아 있는 것을 볼수 있다. 규모가 작은 망루이다. 그런 것을 부르기(Burgi)라고 부른다. 로마제국이 도나우 하안을 점령하고 통치하였던 것은 주후 488년 바바리아의 지도자인 오도아커(Odoaker: Flavius Odoacer: 433-493)이  당시 서로마제국의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폐위시키고 이탈리아 왕좌를 차지했다. 이 사건은 사실상 서로마제국의 종말을 그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주민둘은 모두 이 지역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와 함께 로마제국의 봐하우 시대도 이 싯점으로서 막을 내렸다.


마우테른 안 데어 도나우의 화비아니스 망루(카스트룸 화비아니스)


그건 그렇고 봐하우라는 명칭이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아무래도 서기 800년대 중반인듯 싶다. 왜냐하면 서기 853년의 기록에 의하면 이 지역을 Iocus Wahowa(이오쿠스 봐호봐)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봐호바라는 명칭에서 봐하우가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크렘스(Krems)라는 명칭은 그보다 훨씨 후인 서기 900년대 말의 기록에 Urbs Chremisa(우르브스 크레미사)라고 되어 있었던 것이 뿌리이다. 아무튼 봐하우 일대는 서기 1000년 이전에 모두 융성했던 것이므로 오스트리아에서도 가장 오래된 도시에 속한다. 서기 976년부터는 바벤버그 왕조의 레오폴드 1세가  봐하우의 처음 왕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렸다. 당시에는 왕이라가 보다는 변경백(Margrave: 신성로마제국의 후작)이라고 불렀다. 12세기에는 바벤버그의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오스트리아 공국에 속하게 되었다. 원래 봐하우 지역에는 오렌 전통의 왕가가 있었다. 이 왕가가 소멸되자 봐하우는 1430년에 바벤버그의 알브레헤트 2세에게 완전히 예속되었다. 한편, 1150년부터 1839년까지 장크트 미하엘(St Michael), 뵈젠도르프(Wösendorf), 요힝(Joching), 봐이센키르헨(Weissenkirchen)의 네 마을은 마치 독립적인 지역처럼 운영되었다. 마치 백작이 다스리는 영지와 같았다. 이들 네 마을이 하나의 봐하우 또는 탈 봐하우(Tal Wachau)로 구성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72년이었다.


봐하우 계곡의 뒤른슈타인 마을


봐하우의 역사에 있어서 한가지 흥미로운 사항은 12세기에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Richard the Lion Heart)에 대한 것이다. 십자군 전쟁에 참전했다가 영국으로 돌아가던 사자왕 리챠드는 오스트리아를 거쳐 갈때에 바벤버그의 레오폴드 5세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서 뒤른슈타인의 퀸링거부르크(Kunringerburg) 성에 감금되었다. 퀸링거부르크 성은 현재 폐허로서 뒤른슈타인 언덕에 남아 있다. 사자왕 리챠드가 체포된 것은 기록으로는 오스트리아 국기에 대하여 예의를 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사자왕 리챠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혹시나 위험한 일이 생길지 몰라서 수염을 기르고 변장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지금은 비엔나에 속한 에르드버그(Erdberg)의 어떤 여관에 잠시 머물 때에 마침 그를 알아본 사람이 있어서 당국에 보고되어 체포되었다고 한다. 사자왕 리챠드는 은 3만 5천 kg의 몸값을 치루고 나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석방된 데에는 그의 프랑스인 보좌관인 블론델의 노력이 컸다고 한다. 그러나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에서는 색슨의 기사 아이반호의 도움이 컸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다. 그건 그렇고 레오폴드 5세는 막대한 몸값을 받아 주로 지금의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를 조성하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뒤른슈타인 마을이며 왼쪽 산정의 고성이 사자왕 리챠드가 감금되었던 곳이라고 한다.


봐하우 지역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여러 침략을 당한 일이 있다. 도나우가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며 기후가 온난하여 살기가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15세기에는 헝가리인들이 이곳까지 침공해 왔다. 그리하여 1477년에는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크렘스와 슈타인을 점령하였다. 한편, 1530년으로부터 1620년 사이에는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의 여파로 로마 가톨릭을 배척하는 교회 개혁주의자들의 활동이 컸었다. 그러나 결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향으로 로마 가톨릭에 복속될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과에는 특히 괴트봐이크 수도원장인 게오르크 활브 2세(Georg II Galb)의 기여가 컸었다. 이 지역에서 로마 가톨릭이 확고하게 되자 로마 가톨릭의 각 종파는 이 지역에 대한 전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베네딕트 종파의 활동이 매우 컸다. 이 지역에 오스트리아 베네닉트 수도원이 무려 11개나 설립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러다보니 봐하우 지역만큼 교회가 많고 종교적인 문화가 융성했던 곳도 찾아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하기야 역사를 거술러 올라가보면 서기 453년에 '노리쿰의 사도'라고 불리는 성세베리누스(St Severinus)가 마우테른 성밖에 이 지역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한 것도 간과할수 없는 배경이다. 아무튼 성세베리누스의 활동으로 이후 마우테른은 오스트리아에서도 알아 주는 신앙의 중심지가 되었다. 


멜크 수도원


유럽에서는 근대라는 싯점을 대략 1700년 이후로 보고 있다. 이 시기에 봐하우의 여러 종교시설들이 보수확장되었다. 대표적으로는 1702년에 멜크 수도원이 대대적인 확장보수 작업을 가진 것이다. 그리고 뒤른슈타인의 수도원도 보수되었다. 괴트봐이크 수도원도 재건되었다. 그러나 18세기 말과 19세기에 이 지역의 종교적 중요성은 점차 퇴색되어 갔다. 바바리아의 세속적인 규정에 의해 수도원들을 문닫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자 봐하우는 경제를 발전시켜야 겠다고 생각했고 이에 따라 1900년대 초반부터 관광산업과 포도주 산업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크게 육성되었다. 그러다보니 교통업, 숙박업, 식음료업 등등도 따라서 발전하게 되었다. 이제 봐하우는 '골든 봐하우'라는 별명 답게 관광과 포도주 산업으로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전형적인 봐하우의 풍경. 마을과 교회와 포도밭 


봐하우 계곡은 어느 정도 규모의 지역인가? 다시 말하지만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에서 멜크와 크렘스 사이의 계곡을 봐하우 지역이라고 부른다. 봐하우 계곡은 알프스 자락의 여러 봉우리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여기에 인접한 둥켈슈타이너 봘트(Dunkelsteiner Wald)와 남쪽으로 봘트피어르텔(Waldviertel) 까지도 감싸고 있다. 도나우는 어떠한가? 도나우는 멜크로부터 뒤른슈타인까지 북북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도나우의 한 지류는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크렘스의 동쪽을 비껴간다. 도나우를 가운데 두고 서안에는 슈피츠(Spitz)가 자리잡고 있고 동쪽에는 멜크가 들어 앉아 있다. 아마 이 두 마을이 봐하우에서 가장  규모가 활발한 마을일 것이다. 봐하우 계곡에서 또 다른 중요한 마을들은, 뒤른슈타인, 봐이센키르헨 인 데어 봐하우(), 에머스도르프 안 데어 도나우() 등이다. 에머스도르프에는 6세기 중반에 세워진 아주 오래된 집들도 아직 있다. 이 지역의 기차는 에머스도르프와 크렘스를 연결하는 것으로 1909년에 개설되었다. 봐하우 계곡에 있는 가볼만한 마을들로서는 악스마흐(Aggabach), 바흐암스도르프(Bachamsdorf), 베르게른 임 둥켈슈타이너봘트(Bergern am Dunkelsteinerwald), 푸르트 바이 괴트봐이크(Furth bei Göttweig), 요힝(Joching), 마리아 라아흐 암 야유얼링(Maria Laach am Jauerling), 마우테른 안 데어 도나우(Mautern an der Donau), 뮐도르프(Mühldorf), 오버암스도르프(Oberamsdorf), 오버로이벤(Oberloiben), 로사츠 아른스도르프(Rossatz-Arnsdorf), 루르스도르프(Ruhrsdorf), 슈봘렌바흐(Schwallenbach), 쇤뷔엘 악스바흐(Schönbühlel-Aggsbach), 운터로이벤(Unterloiben), 뷜렌도르프(Wllensdorf) 등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운 산하와 함께 시골의 정취를 훔뻑 즐길수 있는 마을들이다.


한가로운 시골 마을인 로사츠 아른스도르프


도나우는 산과 계곡으로 구성된 지역에서 가장 좋은 교통수단이다. 그래서 봐하우 계곡의 역사적인 지점들은 배를 타고 가면서 둘러 볼수 있다. 지금도 증기선이 관광객들을 위한 유람선으로 운행되고 있다. 유람선을 타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당연히 5월부터 9월 사이이다. 오늘날에는 도로망도 잘 되어 있다. 지동차로 비엔나를 출발하여 봐하우의 이곳저곳을 마음 편하게 둘러 볼수 있다. 강변도로를 따라가면 내다보는 도나우와 봐하우 계곡의 경관은 말할 수 없이 빼어나다. 멜크는 비엔나에가 가장 선호하는 관광 1번지이기도 하다. 그런데 봐하의 도나우에는 다리가 하나도 없다. 도나우를 건너자면 페리 보트를 타야 한다.


 봐하우의 도나우 유랍선. 뒤른슈타인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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