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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하우 필견의 관광명소

정준극 2020. 3. 23. 14:28

봐하우 필견의 관광명소


봐하우 지역은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이곳저곳 명소라고 할만한 곳이 무려 5천 군데나 된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명소는 아무래도 멜크의 베네딕도 수도원이다. 세계적인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이다. 괴트봐이크 수도원도 봐하우를 대표하는 명소이다. 정통 수도원이다. 이런 수도원들도 대단하지만 다른 장소들도 반드시 둘러 보아야 할 곳들이 많이 있다. 멜크에서 약 4km 떨어진 샬라부르크 성(Schloss Sxhallaburg), 크렘스의 슈타이너 토르(Steiner Tor: 슈타이너 성문), 뒤른슈타인 성, 후기 고틱 양식의 피아리스트 교회, 악슈타인 고성(Burgruine Aggstein) 등이다.


멜크 수도원의 위용. 봐하우 지역의 최대 명소이다.


우선 멜크 수도원(Stift Melk). 베네딕도회의 수도원이다. 베네딕도(Benedictus) 수도회는 서기 529년에 이탈리아의 노르자에서 태어난 베네딕도(베네딕투스)가 창건한 수도회이다. 이 수도회의 모토는 '평화'이며 생활 목표는'기도하고 일하라'이다. 베네딕도회는 한문으로 분도회(芬道會)라고 한다. 멜크 수도원은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수도원 중의 하나라고 할 정도로 장관이다. 멜크 수도원은 도나우가 내려다 보이는 해발 약 3백 미터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도나우 상류의 크렘스로부터는 약 40km 떨어져 있다. 암석으로 구성된 고지대에 세워진 멜크 수도원은 대지가 약 5천 3백 평에 이른다. 멜크 수도원은 1089년에 창설되었다. 당시에 오스트리아 변경백인 레오폴드 2세가 그의 성을 람바흐 수도원의 베데딕도 수도사들에게 하사함으로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멜크 수도원을 지켜왔다. 12세기에는 수도원 학교가 설립되었다. 수도원의 도서관은 오늘날 귀중한 장서들로 세계에서도 유명한 도서관이 되어 있다. 멜크 도서실에는 10만권의 귀중본들과 필사본들이 보관되어 있다. 서기 1500년 이전에 인쇄된 서적도 750 권이나 소장되어 있다. 이를 Incunabula 라고 부른다. 15세기에 멜크 수도원은 '멜크 개혁 운동'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남부와 독일에 있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의 생활을 개혁하자는 운동이었다.   


수도원 교회의 회랑과 중앙제단. 화려함의 극치이다.


멜크 수도원은 11세기에 창설되었지만 현재의 웅장한 겨자색 건물은 1702년에 시작하여 1736년에 완공한 것이다. 설계자는 오스트리아의 바로크 명장인 야콥 프란타우어(Jakob Prandtauer)였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특별하고 가장 웅장한 바로크 수도원 건물이 완성되었다. 전체 건물의 구내에는 일곱개의 내정(코트야드)이 있고 수도원 교회가 별도로 있다. 수도원 교회는 정교한 화려함이 가득차 있는 곳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회의 내부에 대하여 '바로크의 향기가 짙게 묻어 나는 곳, 천사들이 쉬지 않고 춤추듯 돌아다니며 즐거워하는 곳, 정금이 인간들을 압도하는 곳'이라고 말했다. 과연, 중앙제단의 성자상들도 모두 번쩍이는 금으로 되어 있어서 열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든다. 수도원 건물은 길이가 메인 현관으로부터 362 m 이며 높이는 돔이 64 m에 이른다. 교회의 천정 프레스코화는 1722년에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르가 그린 성베네딕도의 신성을 주제로 삼은 것이다. 카이저강(Kaisergang)이라고 불리는 긴 복도(190 m)는 화려한 갤러리이다. 과거에 간혹 황실 사람들이 멜크 수도원을 방문하여 묵고 간 일이 있다. 황실 사람들을 위한 방을 '제국실'이라고 부르며 모두 88개나 된다. 나폴레옹도 한때 이곳에서 머물렀었다고 한다. 이들 제국실의 대부분 방들은 현재 멜크 박물관의 일환으로 되어 있다.


수도원 교회의 성베드로와 성바오로상


교회의 중앙제단과 쿠폴라(천정의 돔)은 자연광으로 밝게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수랑(Transept)에는 성콜로만의 석관(sarcophagus)이 놓여 있다. 또 다른 매우 인상적인 형상은 성베드로와 성바오로상이다. 중앙제단의 천정에는 성삼위일체가 그려져 있으며 양쪽으로 성자들의 모습이 있다. 중앙제단에는 비교적 근자인 1976년에 바로크 장식을 추가하였다. 도서실 다음에 있는 대리석실(Marmorsaal)은 명칭은 그렇지만 실제로 대리석을 사용한 것은 문짝들의 프레임에서이다. 이 방은 전에 황실의 식당으로 사용되었으나 그후에는 공식 행사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방에는 바로크 말기의 오스트리아 화가인 파울 트로거(Paul Troger)가 제작한 '계몽'(Enliightment)이라는 주제의 프레스코화가 있다.  대리석방과 도서실을 연결하는 발코니가 있다. 이 발코니에 나와서 내려다보면 도나우가 흐르는 가운데 봐하우 계곡의 전경이 장쾌하게 펼쳐진다.


멜크 수도원 도서실


수도원박물관에는 멜크 수도원에 대한 사항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대한 사항도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4세기 후반의 '멜크 십자가'에 대한 설명도 곁들여져 있다. '멜크 십자가'는 수도원의 보물실에 보관되어 있다. '멜크 십자가'는 각종 보석과 진주가 박혀 있는 귀중한 것이다. 수도원 보물실의 또 다른 보물로는 바다코끼리의 상아에 그리스도의 생애를 새긴 슈봔힐트(Swanhild) 이동식 제단, 그리고 성콜로만의 아랫턱과 치아이다. 중세 이전부터 성자의 유해의 일부분을 간직하는 것은 수도원이나 교회로서 대단한 영광이었다. 이들 종교적 보물들은 보통 때에는 일반에게 전시되지 않고 있으며 1년에 한번, 10월 13일의 '성콜로만 축일에 전시된다. 멜크 수도원에는 1년에 몇명이나 방문할까? 약 50만명이 찾아 온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요제프 2세는 종교계의 폐해를 줄이기 위한 개혁을 단행하여 전국에 있는 수도원 중에서 상당수를 철폐하였다. 그러나 멜크 수도원은 역사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중요한장소로 간주되어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멜크 수도원은 나폴레옹 전쟁에서도 살아 남을수 있었으며 나치의 오스트리아 합병에도 생존할수 있었다. 물론 나치 시대에는 수도원 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수도원 재산의 상당부분이 당국에 압류되기도 했다. 수도원 학교는 2차 대전이 끝난 후 복귀되었고 현재 약 7백명의 남녀 학생들이 재학중이다. 멜크 수도원 학교는 오스트리아에서도 명문으로 알려져 있다.


성 콜로만 제단의 석관


슐로스 샬라부르크(Schloss Schallaburg)는 니더외스터라이히주에 있는 여러 성 중에서 가장 뛰어난 르네상스 양식의 성이다. 멜크로부터는 약 5km 떨어진 숄라흐(Schollach)에 있다. 이 지역은 모스트피어르텔(Mostviertel)로 알려진 곳이다. 성의 중심 파트는 1572년에 완성된 것이다. 건축학적으로 볼때 이 성은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틱 양식이 복합되어 있음을 알수 있다. 주거 목적의 구역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교회는 고틱 양식이다. 이런 복합된 스타일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팔라쪼 형식이어서 샬라부르크도 영향을 받았다. 슐로스 샬라부르크는 대단히 심미적인 관점에서 지어진 건물이다. 풍부한 장식이 눈길을 끈다. 계단의 철책 하나하나도 대단한 예술적 감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테라코타 모자익의 장식들은 신화적인 인물들, 신들, 가면들, 그리고 잘 알려진 인물이나 동물들의 모습이 장식되어 있다. 가장 눈을 끄는 형상은 전설의 신화에 나오는 여인인 훈더프로일라인(Hunderfräulein)이다. 여인의 몸이지만 개의 머리를 한 존재이다. 슐로스 샬라부르크의 입구 정문에는 두 마리의 연기를 뿜은 용이 있다. 목재로 만든 용이다. 길이가 30 미터에 이르고 높이가 6 미터에 이른다. 아이들이 용의 머리에 올라가서 미끄럼을 타는 것으로 인기가 많다. 정원은 만너리스트(Mannerist)의 품격이 스며 있는 것이다. 여기에 두 곳의 사과 과수원이 있다.


샬라부르크 성 전경. 높은 타워가 인상적이다.

연기를 뿜어내는 용. 어린이들의 미끄럼틀이다.

훈데프로일라인. 머리는 개이지만 몸은 여인의 모습


크렘스의 슈타이너 토르(Steiner Tor)는 크렘스의 출입문이다. 아름다운 건축물이어서 크렘스의 랜드마크이다. 원래는 15세기에 세워졌으나 그후 바로크 스타일로 재단장을 하였다. 크렘스는 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성으로 둘러쌓인 도시였다. 그러다가 도시의 확장과 함께 성벽들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네 성문 중에서 세 성문은 다른 장소로 옮겨져야 했다. 슈타이너 토르만은 그대로 남았다. 그러다가 2005년에 크렘스의 시승격 7백 주년을 맞이하여 슈타이너 토르를 오리지널 모습대로 최대로 복구하였다. 슈타이너 토르의 양 옆에는 원추형의 탑이 있다. 중세로부터의 건축물이다. 아치형 문의 오른쪽에는 프리드리히 3세 황제의 문장이 돌판에 새겨져 있다. 1480년에 설치한 것이다. 아마 1477년에 헝가리 군대가 침공했을 때 파괴된 것을 복구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해서 만들어진 명판인것 같다. 슈타이너 토르의 탑은 18세기 초반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하에서 바로크 양식으로 완성을 본 것이다. 오늘날 슈타이너 토르 부근 지역은 크렘스의 쇼핑 지역으로 이름나 있다.


슈타이너 토르


크렘스의 고틱 피아리스트 교회(Piaristenkirche)는 일찍이 1014년에 완공된 교회이다. 15세기에 보수되었으며 성가대석은 1457년에 봉헌되었다. 중앙제단은 화려하기로 이름나 있다. 프레스코와 중앙제단화는 바로크 화가인 유명한 M. J. 슈미트(Schmidt)가 제작한 것이다. 이 교회에는 1636년부터 1641년 사이에 신학대학을 운영하기도 했다.


피아리스트 교회

피아리스트 교회 중앙제단


괴트봐이크 수도원(Stift Göttweig)은 크렘스 인근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수도원이다. 파사우의 주교인 복자 알트만(Blessed Altmann: 1015-1091)이 규칙으로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을 위해 설립하였다. 규칙적인 공동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을 Canons Regular 라고 부른다. 괴트봐이크 수도원은 '오스트리아의 몬테카시노'라고도 불린다. 이탈리아의 오리지널 베네딕도 수도원을 본따서이다. 수도원 교회의 중앙제단은 1072년에 봉헌되었다. 하지만 수도원 전체가 봉헌된 것은 1083년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도사들의 생활이 여간 나태한 것이 아니었다. 파사우의 울리히 주교는 교황 우르반 2세의 승인을 받고 성베네딕도 규칙을 괴트봐이크에도 적용키로 했다. 그후 괴트봐이크는 엄격한 규율과 교육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하르트만이라는 사람이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 수도원 학교가 정식으로 문을 열었다. 그는 또한 귀중한 도서실을 설치했으며 수도원의 아랫 자락에 작은 수녀원을 세웠다. 이 수녀원에서는 중세의 독일어 시인으로 이름 떨친 아바(Ava)가 은둔자로서의 생활을 했다. 얼마후 수녀원은 언덕 위로 옮겨졌는데 1557년까지 존속했었다. 그러다가 15

세기와 16세기에 수도원은 급작스러울 정도로 쇠퇴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수도원장이 없는 시기도 있었다. 그러다가 1564년에는 수도사들이 모두 떠나서 한사람도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크렘스 인근의 괴트봐이크 수도원. 오스트리아의 에스코리알 이란 별명이 붙어 있다.


그러한 막막한 상황이어서 황실이 관여하지 않을수 없었다. 멜크 수도원의 수도사인 미하엘 헤를리히를 괴트봐이크의 수도원장으로 임명했다. 새로운 수도원장은 괴트봐이크를 영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부흥시켰다. 또한 1580년의 화재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수도원 건물을 완전히 복구하였다. 17세기의 수도원장인 다비드 코너는 이 지역에서 개신교가 세력을 펼치려는 것을 성공적으로 방지하였다. 수도원 건물은 1718년에 또 다시 화재로 파손되었다. 거장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복원사업을 책임 맡아 더 웅장한 건물로 완성해 놓았다. 폰 힐데브란트는 스페인의 에스코리알 수도원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 모습을 반영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괴트봐이크를 '오스트리아의 에스코리알'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임페리얼 계단의 프레스코 장식은 오스트리아에서 바로크 건축의 걸작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프레스코는 거장 파울 트로거가 1739년에 제작한 것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르 6세를 아폴로 신에 비유한 것이다. 샤를르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이다.


샤를르 6세를 아폴로 신으로 신격환한 천정화


오늘날 괴트봐이크 구내는 역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수도원 교회의 두 탑은 납작한 피라미드 모양의 특이한 모습이다. 두 탑 사이에는 투스카나 스타일의 기둥들이 네개나 설치되어 있다. 중앙제단은 639년에 완성된 것으로 뒷편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인장적이다. 제단의 옆에는 괴트봐이크의 설립자인 알트만의 납골당이 있다. 이밖에도 서쪽 동의 3층으로 된 계단이다. 웅장하여서 카이저슈티게(Kaiserstiege)라고 불린다. 괴트봐이크 수도원에도 박물관이 있다. 과거에 황제 또는 대공들이 사용하던 방들을 박물관으로 개조했다. 박물관에는 종교적 판화, 기념 주화, 골동품. 악기, 그리고 자연사를 말해주는 전시품들이 있다. 이 모든 전시품들이 거의 모두 안전하게 2차 대전의 전화에서도 살아 남았다. 수도원은 매년 수도원 소장의 미술품 전시회를 갖는다.   


괴트봐이크 수도원 교회의 중앙제단과 회랑

중앙제단 디테일


억슈타인 고성(Burgrine Aggstein)은 멜크 북쪽 약 15 km의 도나우 우안에 있는 고성이다. 고고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이 성은 12세기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예전의 이름은 둥켈슈타이너봘트)였다. 이 성은 악명 높은 퀸링 가문의 마네골트 3세 아슈바흐 게트벤(Manegold III Aggsbach Getbeen)이 세웠다. 이후 퀸링 가족들은 이 성에서 1180년 이래로 살았다. 퀸링 가문의 사람들이 악명 높았다는 것은 슐로스 숀부엘과 부르크 악슈타인의 이른바 '남작 도적들'(Robber Barons) 때문이다.  이들은 라이발들을 붙잡아 와서 성안에 가두어 두고 몸값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는 중에 상대방들을 위협하기 위해 커다란 바위에 봍잡아 온 사람을 묶어 놓고 돈을 안가져 오면 계곡 아래로 떨어트리겠다고  했기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악슈타인 성은 도나우 수면으로부터 약 90 미터 높이에 지어졌다. 기초는 암석이다. 이 성은 여러 운명을 겪었지만 그중에서 하나는 13세기 초반에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헤트 1세 대공에게 대항하여 귀족들이 반기를 들었을 때 귀족들이 점령했었다는 것이다. 1429년에 알브레헤트 5세 대공은 이 성이 도나우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하여 대폭 재건하였다. 목적은 지나가는 배들로부터 세금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도나우에 세관사무소를 짓고 지나가는 배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었다. 하지만 아떤 때는 지나가는 배들을 약탈하기도 해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레오폴드 3세 대공의 치하에서 그런 해적 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다. 이 성은 1529년 터키의 1차 비엔나 공성과 관련하여 잿더미가 되었다. 그후 이번에는 군사 방어 목적의 요새로 재건되었다. 그리고 여러 귀족들의 소유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악슈타인 고성


슐로스 쇤뷔엘(Schloss Schönbühel)은 멜크에서 약 5 km 떨어진 도나우 강변의 암석 위에 세워진 12세기의 고성이다. 성이 세워진 곳은 도나우로부터 약 40 미터 높이에 있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니더외스터라히이의 쇤뷔엘 악스바흐 마을에 속한다. 1064년에는 성에 부속하여 교회를 지었다. 이 성은 오랜 역사를 지탱해 오면서 소유주가 여러 번 바뀌었으나 1차 대전 이후에는 자일레른 아스팡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소련군이 점령하였다가 1955년에 다시 자일레른 아스팡 가문의 소유가 되었다.


쇤뷔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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