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아름다운 봐하우

봐하우의 마을들

정준극 2020. 3. 18. 16:49

봐하우의 마을들

봐하우 계곡에 있는 주요 마을들을 소개한다.


멜크의 다운타운


[멜크] 도나우를 품에 안고 있는 멜크는 봐하우 지역을 시작하는 곳이다. 말하자면 서쪽의 봐하우 계곡으로 가는 게이트웨이이다. 멜크는 해발 228 미터의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먼곳으로부터도 마을과 수도원과 교회가 보인다. 멜크는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의 국경 요새가 있던 곳이다. 그후 바벤버그 시대에도 요새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요새 이름은 나마레(Namare)였다. 그러나 주민들은 멜크를 메델케(Medelke)라고 불렀다. 대서사시 '니벨룽의 노래'(Nibelunggenlie)에 나오는 명칭을 가져다가 붙인 것이다. 멜크의 인구는 대략 5천 5백명에 이른다. 그만하면 봐하우 지역에서는 상당히 큰 마을이다. 멜크는 수도원과 교회로 봐하우의 관광 1번지이다. 그래서 멜크 수도원을 찾아오는 관광객들 때문에 멜크 마을의 유동인구는 항상 주민수보다 훨씬 많았다. 멜크 수도원(우리나라에서는 멜크 대사원으로 알려졌다)은 1089년에 설립되었다. 1089년이면 우리나라는 고려 중기에 해당하며 중국은 북송 시대이다. 멜크 수도원은 바로크 건축 양식의 최고 걸작이다. 그래서 '바로크 예술의 진정한 통합'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멜크 수도원은 해발 200 미터의 고지대에 있으며 교회가 있는 서쪽은 도나우와 맞닿은 낭떨어지이다.


멜크 수도원의 서쪽. 도나우가 내려다보이는 낭떨어지에 자리잡고 있다.


멜크 수도원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한다. 본 블로그의 다른 파트에 멜크 수도원에 대한 설명이 간략하게나마 있다는 것을 덧붙인다. 여기서는 멜크 수도원의 아랫 쪽에 있는 멜크 마을에 대한 설명이다. 멜크 마을은 11세기와 12세기에 형성되었지만 중심가의 역사적인 건물들은 16세기로부터 18세기에 완성된 것들이다. 마을의 중심되는 길은 시청에서 뻗어 나온 하우프트슈트라쎄(Hauptstrasse)와 슈테른가쎄(Sterngasse)이다. 실상 슈테른가쎄는 멜크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이다. 마을 중심가에 있는 건물 중에서 두드러진 것은 지금은 약국이 들어서 있는 시청(Rathaus)이다. 전에는 레브첼터하우스(Lebzelterhaus)라고 불렀던 건물이다. 일찍이 1657년에 세워졌다. 현관문이 목재와 구리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시청앞 광장에는 또한 4백년 역사의 빵집도 있다. 몇 건물이 합쳐진 것 같은 빵집인데 지붕은 하나여서 흥미롭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언덕에는 아주 오래된 포도원이 있다. 슈테른가쎄의 뒷편, '하우스 암 슈타인'(Haus am Stein)의 옆에 있다. 또 하난 흥미로운 건물은 1792년에 세워진 옛 우체국이다. 당시에 우체국장을 지낸 사람이 지었다고 한다. 1792년이면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이며 이탈리아에서 로시니가 태어난 해이다. 현재는 마을회관이다. 마을 언저리에는 비엔나에서 볼수 있는 별장 스타일의 집들도 많이 볼수 있다. 옛 우체국 건물은 Wiener Cottage Verein 스타일이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별장 처럼 생긴 건물이다. 멜크 근교에는 자전거 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음도 덧붙인다.


멜크의 시청앞 광장(라트하우스플라츠)


[크렘스] 일반적으로 크렘스(Krems)라고 하면 인근의 슈타인(Stein)을 포함해서 말한다. 크렘스는 크렘스 안 데어 도나우(Krems an der Donau)라고도 부른다. 역시 도나우를 안고 있는 마을이기 때문이다. 크렘스는 15세기에 조성된 크렘저 토르(Kremser Tor)와 그보다 앞서 이루어진 괴트봐이거호프(Göttweigerhof) 사이에 있는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오래된 마을이기 때문에 아기자기한 역사적인 건물들이 많다. 중심지역의 오베레 란트슈트라쎄와 운테레 란트슈트라쎄는 항상 차없는 거리이다. 크렘스는 예로부터 테라스 스타일의 포도밭과 함께 포도주 교역지로서 명성이 높았다. 구시가지에 있는 미노리텐교회는 교구교회였지만 지금은 미술전시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현재의 교구교회는 성니콜라우스교회이다. 성니톨라우스교회의 천정화와 제단화는 유명한 크렘저 슈미트(Kremser Schmidt)가 제작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후기 바로크의 거장인 크렘저 슈미트는 린처 토르(Linzer Tor)에 살았었다. 마우트하우스(Mauthaus) 마을에는 르네상스 빌딩과 바로크 궁전이 있어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바로크 궁전은 1721년에 세워진 것이다. 바로 이 건물에서 모차르트 연구의 대가인 루드비히 폰 쾨헬(Ludwig von Köchel: 1800-1877)이 태어났다. 모차르트의 작품에 쾨헬 번호가 붙은 것은 쾨헬의 업적이다. 크렘스에서 또하나 눈길을 끄는 건축물은 1480년에 세워진 중세의 슈타이너 토르(Steiner Tor)이다.


크렘스와 도나우

      

[슈피츠] 슈피츠(Spitz)는 크렘스로부터 약 17 km 떨어져 있는 도나우 계곡의 마을이다. 마을 주변은 대체로 포도밭이며 마을의 거리들은 굵은 돌맹이를 깐 것이 인상적이다. 슈피츠의 역사는 오래되어서 830년의 기록에 이미 언급되어 있는 마을이다. 슈피츠의 남쪽 언덕에는 지금은 폐허가 된 힌터하우스(Hinterhaus) 요새가 있다. 중세의 성마우리체(St Maurice) 교회는 슈피츠의 유일한 교회이다.


도나우를 안고 있는 슈피츠. 언덕의 폐허가 힌터하우스 요새이다.


[뒤른슈타인] 봐하우 계곡의 뒤른슈타인(Dürnstein)은 아름다운 경치로도 유명하지만 사자왕 리챠드의 전설로도 유명한 곳이다. 전설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먼저 뒤른슈타인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부터 설명코자 한다. 뒤른슈타인은 도나우가 부드럽게 구부러져 돌아가는 곳에 있는 중세의 고도이다. 일찍이 1019년에 정식 마을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뒤른슈타인은 봐하우 계곡의 중간 쯤에 위치하고 있다. 비엔나로부터 서쪽으로 73km에 있으며 크렘스로부터는 겨우 9 km 떨어진 곳에 있다. 예전에는 뒤른슈타인이 아니라 티른슈타인(Tirnstein)이라는 지명이었다. 슈타인(바위)이란 단어가 들어간 것은 마을의 뒷산이 바위산이기 때문이다. 산위에 고성이 있다. 원래는 정착민들을 보호하고 홍수를 감시하기 위한 탑으로 지은 것이다. 슐로스 퀸링거(Schloss Künringer)이다. 고성의 위치는 해발 약 2백 미터이다. 서울의 남산이 해발 270 미터이므로 그보다는 훨씬 닞지만 아랫 마을에서 고성까지 걸어 올라가려면 땀깨나 흘려야 한다. 이 성에 사자왕 리챠드가 감금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1192년 12월부터 1193년 3월까지 4개월동안 갇혀 있었다고 한다. 앞서도 말했지만 뒤른슈타인은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중세로부터 '봐하우에서 가장 로맨틱하고 가장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마을과 테라스 포도밭과 도나우가 한데 어울려 자연의 경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뒤른슈타인 마을은 작은 마을이다. 주민이래야 1천명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을의 거리에서는 중세의 향취가 물신 풍긴다. 눈길을 끄는 옛 건물 중에 대표적인 것으로는 코르헤렌슈티프트(Chorherrenstift)가 있다. 아우구스틴 수도회의 참사회원들을 위한 수도원 건물이다. 원래 1410년에 세운 아름다운 건물이다. 현재의 모습은 18세기에 보수한 것이다.


뒤른슈타인의 코르헤렌슈티프트. 멀리 언덕 위는 퀸링거 성


12세기에 뒤른슈타인을 중심으로 이른바 퀸링의 반란이 일어났다. 바벤버그의 프리드리히 2세가 반란을 진압했다. 1355년에는 이 지역을 다스리던 퀸링 왕조가 막을 내렸고 이듬해인 1356년에는 합스부르크의 알브레헤트 3세의 치하에 속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틴 참사회원 수도원(코르헤렌슈티프트)이 완공을 본 것은 1440년이었다. 30년에 걸친 역사였다. 그 이전에는 작은 규모의 성클라라 수녀원이 있었으나 나중에 아우구스틴 수도회에 소속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틴 수도원은 1788년 요제프 2세 황제의 칙령에 의해 해산되었다. 18세기에는 포도주 저장을 위한 건물인 켈러 슐뢰슬(Keller-Schlössl)이 완성되었다. 1805년에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중요한 전투인 '뒤른슈타인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는 인근 크렘스에도 연결되어 벌어졌다. 그리고 1909년에는 도나우를 따라 철도가 처음 놓여지게 되었다.


포도밭의 한 가운데에 있는 켈러 슐뢰슬(포도주 저장고)


뒤른슈타인은 또한 봐하우어 라베를(Wachauer-Laberl)이라는 빵으로 유명하다. 와인 바에서 곁들여 먹는 빵이다. 봐하우어 라베를은 간단히 게배크(Gebäck)라고도 하는데 이는 둥글게 생긴 구운 빵을 말한다. 게베크는 귀리와 밀가로루 만든다. 빵을 만드는 비법은 뒤른슈타인의 슈미트 가문의 소유로 되어 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비밀로 되어 있다. 뒤른슈타인에서 포도주를 가장 많이 생산하고 있는 마을은 뒤른슈타인에서 약 6 km 떨어진 봐이센키르헨(Weissenkirchen)이다. 봐이센키르헨은 굵은 돌맹이로 포장한 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매력적인 마을이다. 16세기에 지은 타이젠호퍼호프(Teisenhoferhof)는 아케이드가 있는 내정으로 사랑받고 있는 건물이다. 이 작은 마을에 봐하무제움(Wachamuseum)이 있다. 그림과 같이 아름다운 봐하우를 그린 그림들, 배카날리즘()이라고 불리는 에칭 작품들, 가족들의 초상화 등과 포도주에 대한 사항도 전시되어 있다.


봐하우어 라베를

봐이센키르헨


[뷜렌도르프] 크렘스에서 약 20 km 떨어진 뷜렌도르프(Willendorf)는 비너스라고 생각되는 선사시대의 누드 조각상이 발견된 것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이 조각상을 '뷜렌도르프의 비너스'라고 부른다. 11 cm 길이 밖에 안되는 작은 것으로 1908년에 발견되었지만 2만 5천년 전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사시대 사람들의 예술적 감각을 볼수 있는 작품이다. 비너스 상은 다산과 풍요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뷜렌도르프의 비너스'는 현재 비엔나의 미술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뷜렌도르프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 있는 비너스 상은 복제품이다. 2008년에는 '뷜렌도르프의 비너스' 발견 100 주년을 기념하여 3. 75 유로의 기념우표가 발매되었다.


뷜렌도르프

뷜렌도르프의 비너스. 2만 5천년 전의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르트슈테텐 푀브링] 아르슈테텐 푀브링(Artstetten-Pöbring)은 아르슈테텐 성으로 잘 알려진 멜크 지역의 마을이다. 아르슈테텐 성은 여러개의 양파처럼 생긴 돔으로 유명하다. 이 성은 종전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소유여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될 인물이었으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에 의해 피살되었고 그로 인하여 세계 1차 대전의 촉발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성에 있는 기념관에는 대공과 대공비가 이 성에서 지낼 때의 여러 모습들이 그림으로 전시되어 있다. 이 성에는 페르디난트 대공과 호엔버그의 조피 대공비의 묘지가 있다. 


아르슈테텐 성. 페르디난트 대공과 조피 대공비의 묘지가 있다.

아르슈테텐 성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박물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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